세상에는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한 수많은 영화가 있다. ‘오늘은 무슨 영화를 볼까’라는 행복한 고민에 빠진 이들을 위해 쓴다. ‘씨네플레이’는 10년 전, 20년 전 이맘때 개봉했던 영화를 소개한다. 재개봉하면 당장이라도 극장으로 달려가서 보고 싶은 그런 영화들을 선정했다. 이름하여 ‘씨네플레이 재개봉관’이다.

색, 계
감독 이안 출연 양조위, 탕웨이, 조안 첸, 왕리홍 개봉 2007년 11월 8일  상영시간 157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색, 계

감독 이안

출연 양조위, 탕웨이, 조안 첸, 왕리홍

개봉 2007 미국, 중국, 대만,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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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는 ‘색’(色, Lust)의 영화인가, ‘계’(戒, Caution)의 영화인가. 암살해야 하는 대상과 사랑에 빠지는 스파이. 파격적인 세 번의 정사 신과 일제강점기 괴뢰 정부의 고위층을 암살하기 위한 작전. 이 두 가지 모두를 담고 있는 <색, 계>는 로맨스 영화이면서 동시에 에스피오나지 영화다.
 

파격적인 세 번의 섹스
조금 솔직해지자. 10년 전 개봉한 <색, 계>는 수위 높은 정사 신으로 유명했다. 그러니까 ‘색’의 영화로 더 유명했다. 미국에서는 NC 17 등급을 받았다. 17세 이하 절대 관람불가다. 부모 동반 시 관람 가능한 R 등급보다 더 높은 등급이다. NC 17 등급의 영화는 신문이나 잡지 등 매체에 광고를 할 수도 없다. 중국에서는 약 30분 가까이 삭제된 버전이 개봉했다. 정사 신은 7분 가량 삭제됐다. 중국인들은 무삭제판을 보기 위해 대만이나 홍콩으로 원정을 가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무삭제판을 다운로드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현상을 이용한 해커들 탓에 바이러스 주의보가 내려지기도 했다. 심지어 중국 언론은 “영화 속 섹스 체위를 따라 하지 말라” 보도를 하기도 했다.
 

어설픈 애국자들의 암살 작전
<색, 계>의 원작은 장아이링의 단편 소설이다. 일본이 세운 괴뢰 정부의 고위층 인물을 암살하려던 여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1938년 홍콩. 대학 연극반에 가입한 왕지아즈(탕웨이)는 항일 애국활동을 벌이는 광위민(왕리홍)에게 매료된다. 광위민은 친일파 핵심 인물인 정보부 대장 미스터 이(양조의)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광위민에게 마음이 있던 왕지아즈는 작전에 가담한다. 막 부인이라는 신분으로 위장하고 이의 아내(조안 첸)에게 접근하고 미인계를 이용해 이의 신임을 얻어내려 한다.
어설픈 애국자이자 대학생이었던 광위민과 동료들은 홍콩에서의 암살 계획을 허무하게 실패하고 만다. 3년이 지나 상하이에서 광위민은 다시 한번 왕지아즈와 함께 이의 암살 계획을 도모한다. 이때 유명한 정사 신이 등장한다. 러닝타임으로 따지면 90분이 지나서야 나온다. 2시간 30분이 넘는 <색, 계>의 러닝타임에서 많은 부분은 스파이물이라고 볼 수 있는 ‘계’의 영화다.

색과 계, 무의미한 구분법
사실 <색, 계>를 색과 계라는 이분법으로 보는 건 매우 어리석은 접근법이다. <색, 계>의 배급사 포커스픽처스의 대표이자 <색, 계>의 공동각본가이기도 한 제임스 샤머스는 2007년 당시 미국영화협회로부터 NC 17 등급을 통보받은 뒤 완성된 영화에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흥행에서 어느 정도의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그는 “이안 감독은 성인 관객을 위한 걸작을 만들어냈다. 스크린에 나오는 모든 장면은 캐릭터의 감정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했다. 색과 계는 결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색과 계라는 이분법은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색, 계>는 ‘탕웨이의 영화인가, 양조위의 영화인가’라는 물음은 어떨까.

1만 대 1의 경쟁률을 뚫은 신인 배우, 탕웨이
탕웨이는 <색, 계>를 통해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신인이었던 탕웨이는 다섯 번의 오디션 끝에 왕지아즈 역을 따냈다. 영화 정보 사이트 IMDb에 따르면 탕웨이는 1만 대 1의 오디션 경쟁률을 뚫었다. 이안 감독은 <색, 계>가 상영된 베니스영화제에서 “탕웨이를 처음 보는 순간 이 역할에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디션을 통해 만 명의 여배우 중에서도 탕웨이를 뽑아 오랫동안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했다”고 말했다. 왕지아즈는 복잡한 인물이다. 그녀는 항일단체의 미인계 암살 작전의 스파이로 철저하게 이용당한다. 광위민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으면서 암살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탕웨이는 이 모든 감정의 얼굴을 다 보여줬다. 신인 배우에겐 큰 부담이었을 정사 신 촬영은 11일 동안 비공개로 진행됐다. 카메라와 음향 주요 스태프만 그 공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정사 신과 <색, 계>의 ‘매국영화’ 논쟁으로 탕웨이는 영화 개봉 이후 중국 내 활동을 금지 당하기도 했다.
 

동정심을 자아내는 악역을 연기한 관록의 배우, 양조위
양조위는 탕웨이와 달리 관록의 배우다. 이안 감독 이전에 그는 왕가위의 페르소나이기도 했고, 허우샤오시엔의 페르소나이기도 했다. 이안 감독은 그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양조위는 <색, 계>에서 일종의 악역을 연기했다. 일본에 동조한 매국노인 이라는 인물은 매우 조심스럽고 한편으로 잔인한 면을 보이기도 한다. 이안 감독은 양조위를 더 악하게 보이기 위해 반사판에 크리스마스트리에 쓰이는 전구를 붙인 일명 ‘킬러 라이트’를 사용하기도 했다. 악인이지만 한편으로 미스터 이는 동정심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는 늘 불안에 떨고 있기 때문이다. 양조위가 아니었다면 그 섬세함을 포착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삶을 연기하는 여성
색과 계의 구분법처럼 <색, 계>가 탕웨이의 영화인지, 양조위의 영화인지 따지는 것 역시 부질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탕웨이에 대해 더 얘기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색, 계>의 원작이 그러하듯이 영화 역시 왕지아즈라는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연극반 활동을 하던 연기자였다. 미스터 이의 암살을 위해 그녀는 목숨을 건 연기를 했다. 이안 감독은 영화 개봉 당시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색, 계>를 향한 대부분의 관심이 섹슈얼리티에 집중되고 있지만 나 역시 이 영화는 삶에 있어서의 연기와 연극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왕지아즈가 겪는 혼란은 결국 처음에는 연기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던 일이 점점 자신의 실제가 돼가고 있음을 깨닫고 받게 되는 충격과도 같다”고 덧붙였다.
 


<색, 계>는 제6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안 감독은 당시 수상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좋은 작품을 만든 것에 만족한다.” 이안 감독의 말처럼 <색, 계>는 좋은 작품이다. 그는 분명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칭찬할 자격이 있는 감독이다.

틀림없이 좋은 작품인 <색, 계>를 혹시나 파격적 정사 신의 영화로만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다시 보길 권하고 싶다. 조직을 배신한 뒤 정처 없이 상하이 거리를 헤매다 인력거를 탄 왕지아즈의 무심한 표정, 왕지아즈의 정체를 알고 난 뒤 그녀의 처형 명령서에 사인을 한 이가 불 꺼진 텅 빈 방의 침대에 앉아서 보여준 허망한 표정의 묵직한 감동을 느껴보길 바란다. 이 장면은 색과 계의 오묘한 경계에 살았던 인물을 연기한 탕웨이, 양조위가 만들어낸 최고의 장면이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신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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