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미국. 낙태권이 여성의 기본권으로 인정되고, 성별 구분 없이 균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수정 법령 '타이틀 나인'이 본격적 시행되던 해다. 하지만 여성을 향한 사회는 여전히 캄캄했다. 여자 테니스 챔피언 빌리 진 킹(엠마 스톤)은 같은 대회임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8배나 적은 상금을 받아야 한다는 현실에 분통이 터진다. 협회에서는 "승부욕은 남자가 앞서지", "남자 경기가 더 박진감 넘치잖아"따위의 변이나 늘어놓을 뿐, 제도를 바꿀 의지가 전혀 없다. 결국 빌리 진은 미국테니스협회를 박차고 나와 동료들과 함께 여자테니스협회를 만든다. 은퇴한 전설적인 테니스선수 바비 릭스(스티브 카렐)는 도박에서나 재미를 찾으면서 시간을 죽이던 중 빌리 진의 행보를 지켜보다가 그에게 대결을 제안한다.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은 젠더 이슈와 관련한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손꼽히는 빌리 진 킹과 바비 릭스의 대결이 개최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보고 나오면서 한숨을 크게 쉬었다. 영화는 세상이 변화하고 있다는 논평이 두드러지던 1973년 미국에서도 도처에 쏟아지던 성차별 발언들을 끊임 없이 보여준다. <미스 리틀 선샤인>, <루비 스팍스> 등을 연출한 조나단 데이턴, 발레리 페리스 감독의 작품답게 일정 이상의 명도가 유지되지만, 일말의 부끄러운 내색도 없이 내뱉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당대 가장 뛰어난 테니스 선수조차 뒤집어써야 하는 상황의 반복은 내내 텁텁한 뒷맛을 남긴다. 1973년 미국을 공들여 재현했음에도 불구하고, 눈 앞에 펼쳐지는 부조리가 여전히 너무 익숙한 나머지 좀체 45년 전의 풍경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미장센의 성공적인 실패랄까.  

원제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성의 대결(Battle of the Sexes). 한국 개봉명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은 두 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세기의'라는 수식을 붙임으로써 이 영화가 소실점을 놓치지 않는 젠더 문제를 애써 흐릿하게 만든다. 여성이 차별 받는 상황에 철저히 집중하는 방향이, '대결'이 부각돼 보이는 제목에 가려진다. 데이턴-페리스 듀오는 스포츠영화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대결의 쾌감에 기대지 않는다. 테니스 경기 시퀀스는 고작 두 번 등장하고, 빌리 진의 위축과 바비 릭스의 기세등등함을 강조하기 위해 배치된 듯한 마가렛 커트와 바비 릭스의 경기마저 여성 선수의 패배를 서둘러 전달하는 선에서 그친다. 나머지는 빌리 진이 기획한 여성리그가 난항을 겪고, 바비 릭스를 비롯한 남성우월주의자들이 늘 그래왔던 대로 거들먹거리며 상대편을 조롱하는 모습으로 채워진다.

빌리 진 킹'만'을 제목에 강조한 것도 아쉽다. 더 많은 돈이나 하찮은 자존심을 점하려는 뭇남자들과 달리, 평등이라는 대의를 위해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빌리 진은 관객의 이입이 용이한 캐릭터다. 빌리 진이 미용사 마릴린에게 첫눈에 반하면서 레즈비언의 정체성을 깨닫는 로맨스도 꽤나 중요하게 그려지고 있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지금껏 많은 영화에서 큼직한 이목구비를 한껏 드러내며 사랑스러움을 발산하던 엠마 스톤은 웃음기를 싹 거둔 채 영화 내내 신중한 얼굴로 지난한 싸움을 밀고 나가야 하는 빌리 진의 지친 마음을 드러낸다.

영화는 바비 릭스를 그려내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장인의 회사에서 세월아네월아 내기 테니스나 치며 늙어가는 바비의 삶에도 눈길을 돌리면서, 아내와의 불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통해 그에게 '남성우월주의자' 이상의 인격을 부여한다. 여자를 깔아뭉개려는 남자의 우매함을 비판하기만을 위한 영화였다면 차라리 사족에 가까운 설정. "여자가 코트에 없으면 공은 누가 줍죠?" 같은 망언을 내뱉고, 빌리 진이 경기에서 질 수 있다고 불안해하는 걸 비웃기라도 하듯 여유를 부리며 망나니같은 쇼맨십을 자랑하지만, 정작 그가 이 상황을 진정 즐기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는다. 흥청망청 여유롭던 스티브 카렐의 얼굴이 시간이 지날수록 그늘로 덮히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명과 암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스티브 카렐의 유능함이 돋보이는 이 모습이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이 품은 결을 보다 풍부하게 만든다.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은 주인공의 감정을 배제하고자 애쓴다. 마릴린에게 이끌림에도 남편 래리도 등돌릴 수 없는 상황을 그리면서도, 빌리 진의 사랑은 승부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종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는 영화는, 심지어 클라이막스인 빌리 진과 바비의 경기에서조차 둘 중 어느 누구의 시점숏도 부여하지 않는다. 스코어에 따라 급변하는 인물들의 감정을 묘사하는 과정이 완전히 비어 있다. 당시 전 세계 9천만 명이 TV 중계로 지켜봤던 것처럼, 관객 역시 두 선수가 공을 주고 받는 모습을 건조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 경기가 끝난 후, 승자의 기쁨과 패자의 아픔조차 흐릿하다. 하지만 그 순간, 두 사람을 제외한 그 경기를 지켜보던 모든 인물들의 얼굴에는 각자 환희와 좌절이 명징하게 드러난다. 승리하고 패배한 두 주인공은 안중에 없는 듯, 그들 주변 사람들을 끈질기게 쳐다본다. 특히 러닝타임 내내 거들먹거리면서 여성을 폄하하던 남자들. 그 얼굴들에 만면한 부끄러움이 피날레를 장식한다.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감독 조나단 데이턴, 발레리 페리스

출연 엠마 스톤, 스티브 카렐

개봉 2017 영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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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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