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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되새기는 작품들

씨네플레이

봄의 마지막 달인 5월은 따뜻한 날씨만큼이나 공휴일이 많아 설레는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때문에 ‘가정의 달'이란 별명도 있지만, 한국에서의 5월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의 봄과 5.18 민주화운동까지, 역사적 굴곡이 많은 달이지만 공휴일이 아니기에 신경쓰지 않으면 자연스레 잊혀진다. 작년 겨울, <서울의 봄>(2023)이 천만 영화에 등극하며 관심이 모였지만 바쁜 일상 속에 결국 흩어졌다. 5월 18일을 앞둔 오늘, 광주의 그날을 되새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비교적 덜 알려진 5.18 민주화운동 영화를 소개한다. 


<꽃잎>(1996)

 

〈꽃잎〉
〈꽃잎〉

 

<꽃잎>은 국내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전면에 내세워 다룬 첫 상업영화로, 이정현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영화는 계엄군에 의해 어머니를 잃은 충격으로 미쳐버린 소녀(이정현)와 우연히 그를 보고 집에 데려가는 날품팔이 인부 장(문성근)의 이야기로, 러닝타임 내내 처참하다. 소녀를 집으로 들이고 성적으로 유린하던 장이 소녀가 정신이 나간 이유를 조금씩 알게 되며 그를 이해하는 게 극의 주된 서사다. 아무것도 모른 채 순진하게 어머니를 따라나섰던 소녀는 우연히 학살 현장에 휘말려, 총격으로 눈앞에서 어머니를 잃는다. 소녀는 도망치려 했지만 죽은 어머니의 손이 꽉 잡고 있어 발로 어머니의 손을 떼어낸 채 정신없이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충격으로 소녀는 미쳤고, 그날을 끊임없이 재현한다.

 

〈꽃잎〉
〈꽃잎〉
〈꽃잎〉
〈꽃잎〉


<꽃잎>은 그날의 광주와 관련된 사실을 서사가 아닌 서정의 영역으로 접근했다. 장선우 감독은 <꽃잎>을 두고 ‘이 영화를 논리적 단위로 보지 않았다’고 말하며 민족의 아픔을 미친 소녀로 풀어내었는데, 현대적 시선으로 보면 다소 과한 장치가 많다. 소녀 역을 맡은 이정현은 당시 16살 미성년자로 연기 경험이 전무한 상태였는데 연기 경험이 없다보니 소녀 그 자체가 되겠다는 마음에 다소 위험한 메소드 연기를 펼쳤다. 극중 기차에서 유리창 너머로 귀신을 본 소녀가 이마로 유리를 깨다 기절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실제로 이정현이 머리로 유리창을 기차 유리창을 깨고 기절했을 때다. 이외에도 극중에서 장에게 학대 당하는 장면이 이어져 ‘거칠다'라는 느낌을 지울 순 없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직접적으로 광주항쟁을 언급하며 그날의 참혹함, 그리고 여전히 그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소녀’로 대변함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의가 깊다. 


<김군>(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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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 김군의 사진. 1980년 5월 22일 중앙일보 사진 기자 이창성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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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 스틸컷. 극우 논객 지만원이 주장한 근거 이미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중앙일보 이창성 사진기자가 촬영했던 한 시민군의 사진. 차량에는 기관총이 장착되어 있고 사진 속 인물은 카메라를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은 사진 속 인물, 김군의 정체를 찾아가는 42년의 과정을 담고 있다. 군사평론가(혹은 극우 논객) 지만원은 그를 5.18 당시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으로 지목하며 이 사진을 광주항쟁에 북한이 개입한 증거라 주장했다. 사진이 증거인 이유는 사진 속 인물과 북한의 농업성 상이자 최고인민회의 제12기 대의원인 김창식과 닮았다는 것이었다. 영화 <김군>은 지만원의 주장에 맞서 그가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제작진이 사진 속 ‘김군'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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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 예고편 캡처

 

찾아도 나타나지 않는 김군의 존재. 어느 날 당시 그를 만났던 사람이 나타나며 그의 윤곽이 빠르게 잡혀간다. 고아에 폐지를 주워파는 넝마주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서로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탓에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중 시민군으로 활동했던 이강갑이라는 인물이 자신이 김군과 함께 순찰을 하고 있었으며 송암동 근처에서 계엄군에 체포되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1989년 2월 22일 광주청문회에서 그날을 증언하는데, 굉장히 충격적이다. 본인과 김군을 포함해 총 4명이 송암동 민가에 숨어있다 계엄군의 위협에 김군이 가장 먼저 나섰는데, 계엄군이 김군의 관자놀이에 총을 쏴서 죽여버렸다는 것. 그는 “부사관 한 명이 에워싼 특전사들 틈을 뚫고 와서 ‘뭐야 이 새끼는' 하면서 김군의 관자놀이를 바로 쏴버렸다. 망설이지도 않았다”라며 그날의 참혹함을 증언했다. 

 

<김군>이 개봉한 이후, ‘진짜' 김군이 42년만에 밝혀졌다. 그의 이름은 차복환으로 고아도, 넝마주이도 아니었으며 김씨도 아니었다. 그는 배우자가 영화 <김군>의 김군 사진이 남편과 닮았다며 그에게 말해줬고 차복환 씨는 사진 속 인물이 자신임을 그제서야 알았다고.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차복환 씨가 김군과 동일 인물인지 검증했고 사실로 판명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무 살로 시민군이 탄 군용트럭을 보고, ‘나도 참여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갑작스레 올라탔고 그때 사진에 찍혔다. 침투한 북한군, 사살 당한 시민군 등 추측이 많았지만 실제 그는 자동 소총을 다룰 줄 모르는 상태여서 걸려있던 소총은 빈총이었다. 어린 동생들 생각에 얼마 안 있어 다시 집으로 향했고, 그는 끝까지 싸우지 않은 것에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오래된 정원>(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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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오래된 정원>은 멜로 서사를 통해 억압된 한국의 80년대를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80년대, 군부독재에 반대하며 사회주의 사상 운동을 한 현우(지진희)는 도피생활을 하다 지인에게 한윤희(염정아)를 소개 받는다. 연고도 없지만 그를 숨겨주기로 한 그는 현우가 사회주의자란 말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고 그를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한다. 그들의 보금자리인 갈뫼에서, 유토피아에 온 듯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진다. 두 사람의 사랑은 6개월 뒤, 현우가 동료들이 모두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떠나며 끝이 난다. 서울로 떠난 현우는 사회주의 사상으로 17년간 옥살이를 하고 출소한다. 당연하게도, 이미 세상은 바뀌어있다. 휴대폰이 등장했고 사람들은 평화롭다. 사회주의 사상 때문에 감옥에 갔던 그이지만 그의 엄마는 부동산 투자로 큰 돈을 벌어 출소한 아들에게 명품을 입힌다. 모든 게 변해버렸고 변하지 않은 건 현우 뿐이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는 갈뫼에서의 시간, 윤희와 함께 보냈던 그곳을 다시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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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영화는 현우가 출소한 이후, 윤희와의 시간을 회상하는 형태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참혹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현우와 윤희, 두 사람의 인생을 통해 관객들을 자연스럽게 그 시대를 살아간 인물에 이입시킨다. 사상과 동료와의 의리가 중요했던 현우, 사상은 모르겠고 현우를 사랑했던 윤희. 영화는 황석영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현우의 이야기가 주되었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그가 떠나고 난 뒤 그의 아이를 임신한 윤희의 인생이 보다 강조되었다. 영화 <오래된 정원>은 과거에 갇혀있던 현우가 희망을 만나는 모습을 통해 참혹한 시대 속에도 피어나는 사랑과 새 시대를 향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아들의 이름으로>(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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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이름으로〉

 

<아들의 이름으로>는 5.18 민주화운동을 광주 시민이 아닌, 명령을 받은 군인의 입장에서 풀어나간다. 주인공 오채근(안성기)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대리운전 기사지만 과거 시민군을 폭행했던 공수부대 소대장으로 죄책감에 괴로운 여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날을 반성하지 않는 이들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어느 날, 5.18 당시 책임자였던 기준(박근형)이 채근에게 대리운전을 요청하게 되고, 채근은 속내를 숨긴 채 기준에게 접근해 복수 계획을 실행한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의도치 않게 가해자가 된 군인이 스스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가해자들의 양심 고백을 이끌어내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는 “그분들(군인)은 나름대로 피해자이기도 하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다"라며 지금까지 피해자의 시선만 조명되어 왔다면 가해자 시각과 피해자의 시각을 동시에 다루고자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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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이름으로〉


영화는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채근을 보여준다. 대리기사이자 가장이자 유학 간 아들과의 통화가 낙인 평범한 아버지. 하지만 영화는 점차 과거 그의 모습을 현재에서 얼핏 비춰준다. 강도 높은 운동과 동네 불량배를 망설임 없이 허리띠 하나로 혼내는 모습까지, 점차 ‘평범'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과거 사람을 해쳤던 일로 아들과의 갈등을 빚고 과거를 숨기며 고통받고 있는 그는 과연 피해자인가. 그렇다면 그에게 가족을 잃었던 광주 시민은 무엇이 되는가. ‘폭도'라는 말을 들으며 끊임없는 왜곡과 의혹에 맞서야 했던 광주 시민들에게 <아들의 이름으로> 속 계엄군의 진심 어린 사과는 어쩌면 가장 필요한 말이지 않았을까. 


<스카우트>(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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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우트〉의 포스터. "웃지마라. 심각하다"가 그 뜻일 줄이야...

 

<스카우트>는 포스터만 보면 그저그런 코믹 야구영화 정도로 보이지만, 사실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영화로, 야구를 소재로 한 한국 영화 중에 손꼽히는 수작으로 불린다. 포스터 압박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추천 받지 않으면 손이 가지 않지만(이해한다) 본 사람은 모두다 입을 모아 추천한다. 연세대학교 야구부 직원 호창(임창정)은 3연패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 특급 투수 선동열(이건주)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광주에 급하게 파견을 나가게 된다. 날짜는 1980년 5월 8일,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딱 열흘 전이다. 선동열은 사실상 맥거핀으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역사의 비극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영화는 대부분 밝고 유쾌한 톤을 유지하지만, 관객은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알고 있기에 유머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2007년 11월 14일 개봉한 〈스카우트〉
2007년 11월 14일 개봉한 〈스카우트〉
2007년 7월 6일 개봉한 〈화려한 휴가〉
2007년 7월 6일 개봉한 〈화려한 휴가〉

 

그리고 같은 해, <스카우트>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5.18 민주화운동 영화가 개봉한다. <화려한 휴가>(2007)다. <스카우트>는 <화려한 휴가> 직전 시점으로, 두 영화를 이어서 보면 그날의 비극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화려한 휴가>가 광주를 향한 국가의 폭력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직구 영화였다면, <스카우트>는 광주의 아픔을 평범한 인물에 녹여내며 속죄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는 변화구에 가깝다. 결국 영화 속 코미디 요소는 일상적 추모를 돕는 장치로 작용하여 깊이 있되 무겁지 않게 그날을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