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너무 무서워!" 지영은 무섭다. 2주째 생리가 늦어지고 있는 지영은 임신으로 엄마가 되는 것이 무섭고, 엄마 같은 엄마가 될까봐 무섭다. 남자친구의 엄마에게 어머님이라는 호칭을 내뱉는 게 무섭다. 수현도 무섭다. 연을 끊고 살던 술주정뱅이 아빠를 환갑잔치라는 명목으로 마주한다는 것이 무섭고, 미술학원 강사로는 돈이 모이지 않아 무섭다. 무서운 것 투성이인 지영과 수현은 동거 중인 7년 차 연인이다. 지영과 수현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며 서로에게 가장 다정하지만, 다정함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무서운 순간들이 있다.

연애와 결혼의 경계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김대환 감독의 <초행>이 12월 7일 개봉했다. 인천과 삼척 두 곳을 가는 연인의 초행길을 그린다. 전주국제영화제 전주시네마프로젝트 수상과 더불어 여러 해외 영화제 수상과 초청으로 주목받은 이 작품을 드디어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게 됐다.

첫 번째 초행길은 지영의 부모가 인천으로 이사한 집이다. 식탁에 앉자마자 "아빠가 퇴직하기 전에는 결혼식을 올려야 하지 않겠냐"는 엄마의 핀잔이 시작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영의 가방 속에 있던 임신테스트기를 들킨다. "임신이면 어떻게 할 거냐"는 엄마의 물음에 지영은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두 번째 초행길은 수현 아빠의 환갑잔치가 열리는 삼척의 횟집이다. 지영은 삼척에 도착하자마자 어색하게 '어머님'을 외치며 어색하게 생선전을 부치다 태운다. 수현의 가족들은 지영에게 며느리, 형수님 칭호를 써가며 이미 결혼한 듯한 취급을 하고, 술에 취한 수현 아빠는 수현 엄마에게 별거 부부를 그만하면 안 되냐고 횡포를 부린다.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영화적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닌데 <초행>은 관객의 마음을 잡아 끈다. 결혼을 압박하는 양가 부모님의 상투적인 이야기를 <초행>은 뻔하지 않게 그려낸다. 카메라는 핸드헬드 촬영기법으로 둘을 비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수현과 지영의 마음처럼 화면은 계속해서 미세하게 흔들린다. 대사 또한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수현 역의 조현철과 지영 역의 김새벽이 맞대는 대사의 호흡은 생생함으로 빼곡하다. 실제로 시나리오는 있었지만 맥락에 대한 제시만 있었을 뿐, 대사의 대부분을 배우들의 애드리브로 채워나갔다. <초행> 속 갈등은 지겹지만, 그 지겨움이 좋은 이유다. 

<초행>을 연출한 김대환 감독은 전작 <철원기행>(2014)으로 똘똘한 연출가임을 증명한 바 있다. 졸업작품으로 내놓은 영화가 들꽃영화상 신인감독상을 안겼다. <철원기행>에서는 가정의 해체 앞에 놓인 가족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나아가는 '여정'을 그렸고, <초행>에선 현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이 놓인 '여정'을 담아냈다. 두 작품 모두 현실에서 마주할 것 같은 생생함에 집중한다. 배우와 시나리오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이질적인 공백을 믿음으로 채워 넣는 게 김대환 감독의 힘이다. 김새벽 역시 자신에 대한 감독의 신뢰가 있었기에 시나리오를 선택할 수 있었다.

<초행>에서 연인으로 호흡을 보여준 김새벽과 조현철은 독립영화계에선 이름나 있는 이들이다. 김새벽은 <한여름의 판타지아>, <수요기도회>, <누에치던 방>, <그 후>로 얼굴을 비추며 잔잔해 보이지만 강단있는 배우임을 입증했다. 어떤 역할이든 제 것으로 야무지게 소화해내는 조현철은 <뎀프시롤: 참회록>, <척추측만> 등 여러 단편 영화에 연출과 배우로 참여했고, <건축학개론>의 후배 동구, <차이나타운> 홍주, <터널>의 막내 대원, <마스터>의 안경남 등 상업영화의 조연 출연도 꾸준히 했다. <초행>은 착한 얼굴을 가진 두 배우의 조합으로 더욱 시너지 효과를 낸다. 

두 번의 초행길이 그러했듯 지영과 수현이 여전히 길을 찾지 못한 채로 영화는 끝난다. 촛불시위가 한창인 광화문 앞에서 두 사람은 촛불을 들고 앞으로 행진할지 뒤로 행진할지 모르겠다고만 되뇐다. 그럼에도 둘은 계속 나아간다.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닌 마지막 장면은 수많은 초행길 앞에 놓인 모두에게 신중한 위로를 건넨다. <초행> 기자간담회에서 조현철이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도 그렇다. "어차피 인간은 다 풋내기고 누구나 다 초행길이니까요. 너무 불안해하시지 마시고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초행

감독 김대환

출연 김새벽, 조현철

개봉 2017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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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인턴 에디터 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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