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울하고 혼란스러운 일본 청춘영화의 원형으로 꼽히며 후대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소마이 신지 감독의 <태풍 클럽>(1985)이 4K 리마스터링으로 40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제1회 도쿄국제영화제 최고상인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2008년 '키네마 준보'가 선정한 '올타임 일본 영화 베스트' 10위에 오르는 등 일본 영화계의 전설로 회자된 작품인 만큼 많은 이들이 국내 첫 정식 개봉을 손꼽아 기다렸다. 현대 일본 영화의 계보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소마이 신지를 하마구치 류스케는 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영화를 만드는 일본 감독은 없다"고 극찬했고, 구로사와 기요시는 "일본 영화사의 마지막 거장"이라는 말로 최고의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태풍이 다가오는 장마철, <태풍 클럽>을 봐야 할 때다. 비전문 배우들의 즉물적인 연기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연출과 한 장면을 촬영하는 동안 단 한차례도 컷을 넣지 않는 '원신, 원컷'으로 인물들이 순간에 느끼고 반응하는 육체의 리듬을 온전히 잡아내는 '소마이 스타일'을 따라가보자. 40년이 지나도 여전히 유효한 영화적 경험이 청춘의 위태로운 찰나를 파격적이고 독특한 시선으로 포착한 <태풍 클럽>을 타고 투둑투둑, 우르르 쾅쾅 쏟아진다.

일본 나가노 현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자리한 한 중학교. 발톱을 감춘 태풍 직전의 푸른 하늘이 그렇듯 폭풍 전야로 은유되는 청춘들이 한껏 몸을 웅크린 채 불안과 불만을 그러안고 살아가는 중이다. 곧 체에 담겨 걸러질 운명인 3학년 학생들은 각자의 이유로 흔들리고 불안은 이제 품에 안아 숨길 수 없이 커진다. 태풍을 목전에 둔 여름날. 분출할 길 없는 반항심과 욕망은 치명적인 장난으로, 은밀한 성적 일탈로, 쉴 새 없이 뿜어대는 줄담배로, 죽음에 대한 이유 없는 불안으로 불길하게 스며든다. 태풍이 삽시간에 세상을 삼키듯, 불만이 가득 찬 현실 세계를 그들은 일거에 폭파하고만 싶다.
방향성을 상실한 어른들은 불온함에 잠식당한 미성년의 세계를 이해할 겨를도 작정도 없다. 수업 중인 교실에 교제 중인 여성의 가족들이 들이닥쳐 난장판이 벌어진 뒤에도 수학교사 우메미야(미우라 토모카즈)는 아이들에게 한 마디 변명조차 하지 않는다. 우등생이지만 고집이 세고 윤리적 잣대가 높은 미치코(오니시 유카)는 문제 교사의 수업은 들을 수 없다며 해명을 요구하고 나서고, 나중에 설명하겠다는 약속으로 상황을 모면한 우메미야는 정작 미치코와의 약속을 잊고 그를 교실에 홀로 방치한다. 태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혼돈과 광기는 고립된 미치코를 발견한 켄(베니바야시 시게루)의 반복적인 발길질과 강박적 인사말로 고조된다. 아버지를 닮은 폭력으로 미치코를 강간하려 하지만 그것이 답습됐음을 깨닫는 순간 켄은 온몸을 뒤틀며 괴로워한다. 폭풍에 고립된 학생들이 도움을 청하려 담임 우메미야에게 건 전화는 술주정으로 돌아온다. 야쿠자로 대표되는 후안무치의 어른들이 태풍을 구경거리 삼아 취하고 노래하는 사이 아이들은 방치된다. 성인이 되고 싶은 동시에 그들에게 환멸을 느끼는 미카미(미카미 유이치)는 기성세대에 실망을 쏟아내듯 전화 너머 우메미야에게 비장히 선언한다. 나는 절대, 절대 당신 같은 사람은 되지 않겠노라고.

여섯 명의 아이들이 갇힌 교정에서 입을 맞추고, 춤을 추고, 옷을 벗고, 결핍과 욕망, 불안과 쾌락이 뒤섞인 불가사의한 흥분 상태에서 광란의 축제를 벌이는 동안, 리에(쿠도 유키)는 등교하던 중 홀연 방향을 바꿔 도쿄로 향한다. 흠모하는 미카미가 고교 진학을 위해 도쿄로 떠날 동안, 리에가 서 있는 곳은 그를 농부 혹은 농부의 아내로 운명 지을 것이다. 무력한 소녀에게 허락되는 것은 하라주쿠로의 하룻밤 일탈뿐이다. 도쿄를 짐작해 보려 떠난 그곳은 이유 없는 호의 따윈 없는 무정하고 차가운 곳이다. 원조교제를 노리는 어른은 가혹한 태풍의 한가운데로 내몰리는 개인에게 관심이 없다. 악천후에 휩싸인 그곳에서 기댈 수 있는 어른이라곤 모형 경찰관 뿐이고, 리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생명 없는 인형 옆에서 허락되지 않은 맑은 날에 대한 동경을 노래하는 것뿐이다.
태풍이 고조되는 와중 미카미는 영화를 관통하는 질문인 "'개(個)'는 '종(種)'을 초월할 수 있을까?"를 곱씹는다. 영화 초반 형과의 대화에서 단순한 철학적 탐구로 시작한 질문은 기성세대와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커져간다. 불가해한 밤이 지나고 마침내 맑게 갠 아침. '죽음은 개가 종을 뛰어넘을 수 없는 증거'라는 형의 답을 반박이라도 하듯 미카미는 "역동적인 삶을 위해서" "역동적인 죽음을 경험하기 위해" 높이 쌓은 의자 위에서 놀라운 행동에 나선다. 도쿄를 찾아간 리에의 능동성, 폭력에 대한 켄의 자기반성, 도덕에 대한 미치코의 문제 제기를 경유해 마침내 도달한 미카미의 마지막은 종을 넘어서는 개체의 증거가 되어 환하게 빛을 밝힌다.

아이들에게 허용된 태풍 속 일탈은 한시적이었고 거리를 방황하던 리에는 무사히 학교로 귀환한다. 더 이상 소년이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 소녀는 어떤 삶을 살까. 다시 질서에 숨어들거나, 다른 세상, 즉 죽음의 세계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을까. 영화의 마지막, 태풍이 지난 아침 등교한 학생들은 "봐! 너무 예뻐, 꼭 금각사 같아!"라 말하며 교정에 생긴 연못 같은 웅덩이에 푹푹 발을 들여놓는다. 무책임한 어른들이 망쳐버린 토양을 가볍게 지르밟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아이들은 밝고 굽히지 않는다. 기존 질서를 초월해 다른 진화를 이뤄갈 것이라는 옅은 희망 같은 것을 나는 발견했다.
억압적인 일본 사회를 태풍의 위태로움과 극적으로 대비시키며 영화는 염산 테러, 강간 문화 등 시대적 한계로 무마하기에는 수위가 높은 여성 대상의 폭력을 묘사하기도 한다. 영화 속 폭력이 미성년 앞에 놓인 무자비한 생에 대한 불안정함, 두려움, 가혹함에 대한 메타포인지, 감독의 시선이 배우들을 대상화하진 않는지, 직접 보고 판단하길 바란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