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니까 뭘 쓸까, 고민하다가 '월별 BEST'를 선정해볼까 싶었다. 어떤 영화들을 봤었나 기억을 떠올려보니 이상하게 올해는 영화 자체보다 배우나 캐릭터들에 더 애정이 간 느낌이었다. 그래서 좀 더 덕심을 담아, 올해 활약했던 배우들을 짧게나마 소개해보고자 한다. 에디터가 장르 영화, 상업영화를 좋아하고 중년 남성 배우들의 연기를 선호한다는 걸 염두에 두시면 좋겠다.


<녹터널 애니멀스> <컨택트>
에이미 아담스

운이 좋게도 2017년 연초에 에이미 아담스를 두 번이나 만날 수 있었다. <마법에 걸린 사랑>으로 처음 알게 됐고, DC 영화의 '로이스 레인'으로 만나니 종종 잊었다. 그는 정말 연기도 잘하고, 작품도 잘 고르는 배우다. <마스터>, <그녀>, <빅 아이즈>에서도 그의 연기를 충분히 봤음에도 새삼 감탄했다. 무기력에 빠진 상류층 수잔(<녹터널 애니멀스>)과 외계인의 언어를 연구하는 루이스(<컨택트>)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그래서 에이미 아담스는 두 영화에서 전혀 다른 얼굴로 등장, 조용히 스크린을 장악한다.

녹터널 애니멀스

감독 톰 포드

출연 에이미 아담스, 제이크 질렌할, 마이클 섀넌, 애런 존슨

개봉 2016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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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택트

감독 드니 빌뇌브

출연 에이미 아담스, 제레미 레너, 포레스트 휘태커

개봉 2016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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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러너 2049>
라이언 고슬링

과거 라이언 고슬링은 내 관심 밖의 배우였다. <드라이브>를 만나기 전까진. <드라이브>의 라이언 고슬링은 묘한 아우라의 극치였다. 그래서 이후 라이언 고슬링의 출연작을 볼 때, 그가 누군가를 때릴까 무서울 때도 있었다(심지어 <노트북>을 다시 볼 때조차). <블레이드 러너 2049>의 K는 그 벽을 무너뜨렸다. 라이언 고슬링은 2시간 넘게 스크린에 등장하지만, 드니 빌뇌브 감독의 스타일에 맞춰 느리게 걷거나, 뒷모습을 보여주거나, 뭔가 응시하거나, 대체로 그런 행동을 취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의 얼굴엔 K의 감정이 고스란히 적혀있었고 그것만으로도 나는 마침내 <드라이브>를 잊었다. 더불어 올해의 대사라면 K의 "개수는 절반이지만 두 배로 우아하잖아"를 뽑고 싶다.

블레이드 러너 2049

감독 드니 빌뇌브

출연 라이언 고슬링, 해리슨 포드

개봉 2017 영국, 캐나다,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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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셰이프 오브 워터>
샐리 호킨스

조금 비겁하지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미개봉작 <셰이프 오브 워터> 얘기를 안 꺼낼 수 없다. <셰이프 오브 워터>가 국내에도 올해 개봉했다면, 2017년은 샐리 호킨스의 해였을 것이다. 결핍을 가졌지만 그걸 뛰어넘는 행동을 보여준 두 캐릭터는 157cm에 깡마른 체형이지만 연기 하나로 관객을 사로잡는 샐리 호킨스 자신과 닮았다. 고질적인 관절염에도 자신의 독립을 결정하는 모드 루이스(<내 사랑>), 매카시즘의 광기에도 운명적인 만남을 놓치지 않는 엘리사 에스포지토(<셰이프 오브 워터>). 때때로 배우가 숭고한 연기를 보여줄 때, 나는 아름답다고 한다. 샐리 호킨스는 올해 가장 아름다운 배우다.

내 사랑

감독 에이슬링 월쉬

출연 에단 호크, 샐리 호킨스

개봉 2016 아일랜드,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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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감독 길예르모 델 토로

출연 마이클 섀넌, 마이클 스털버그, 옥타비아 스펜서, 더그 존스, 샐리 호킨스

개봉 201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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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박해일

김윤석과 이병헌을 정말 좋아하나 <남한산성>은 좋은 배우들이 너무 많이 나왔다. 처음 봤을 때는 송영창이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나, 박희순이 이렇게 무게중심이 잘 잡힌 배우였나 싶었다. 최근 <남한산성>을 다시 봤을 땐 박해일의 인조가 보였다. 역사적 사실을 잠깐 접어두고, 박해일은 나라의 운명을 짊어졌으나 스스로 무능을 알고 있는 인조의 순간들을 포착했다. 흔히들 말하는 박해일의 '평범한 얼굴'은 왕조의 위엄과 만나 더 특별해졌다. 박해일의 인조는 자신과 얘기하기 위해 땅으로 고개를 조아리는 이들 가운데서 처량하고 외로웠다.

남한산성

감독 황동혁

출연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고수, 박희순

개봉 2017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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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비> 곽도원

중년 남자 배우들의 연기를 좋아한다. 돌아보면 시기별로 선호했던 배우들이 있다. 최민식, 송강호, 김윤석, 지금은 곽도원이다. 곽도원과 인터뷰를 했던 기억 때문인지 유독 더 친근하고 관심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강철비>를 보고 나서야 확신했다. 그가 명배우란 사실을. 무능한 남편, 열일하는 관료, 의외로 남에게 쉽게 정 주는 아저씨. 그 모든 얼굴을 이렇게 저렇게 조합시켰더니 그게 곽도원이었다.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아직 상영 중인 영화이니 극장에서 만나보길 권하고 싶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마크 해밀

일각에선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의 루크는 루크가 아니라고 한다. 심지어 마크 해밀마저 인터뷰에서 "감독에게 '제다이는 이렇지 않다'고 말했다"고 털어놨다. 그 말을 듣고 마크 해밀이 더 위대해 보였다.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한 걸 설득시켰으니까. 마크 해밀은 스스로 나이가 들었단 걸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그걸로 루크의 염세주의적이고 회의적인 성격을 '세월 풍파에 무너진 전설'이라고 납득시켰다. 관객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이해했고, 공감했다. 굳이 큰 그림을 보지 않더라도, 루크가 과거의 순간과 마주하는 장면들은 마크 해밀의 전설은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란 걸 체감하게 한다. 내 마음에서 (많은 애니메이션과 게임에서 전담했던) '조커' 마크 해밀이 '루크' 마크 해밀로 변경되는 순간이었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감독 라이언 존슨

출연 데이지 리들리, 마크 해밀, 아담 드라이버, 오스카 아이삭, 캐리 피셔, 존 보예가

개봉 201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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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하비에르 바르뎀

<마더!>는 제니퍼 로렌스를 위한 영화다. 이 영화의 모든 요소가 제니퍼 로렌스를 빛내기 위해 존재한다. 영화 내내 그가 쏟아내는 에너지는 스크린을 보는 관객까지 지치게 한다. 이 영화를 소개한 IMDB에조차 바르뎀의 단독 스틸컷이 없다. 하지만 단 한 순간, 영화의 주도권이 하비에르 바르뎀에게 넘어간다. 어떤 복선도, 징조도 없지만 그 순간 그의 아우라가 영화를 집어삼킨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영화의 '양식'을 완성한 <마더!>에서 격조 높은 연기를 만났으니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마더!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출연 제니퍼 로렌스, 하비에르 바르뎀

개봉 201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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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후> 피터 카팔디

영화가 아니지만 '덕심'으로 시작했으니 한 배우만 더 껴 넣어보겠다. 그동안 미뤄뒀던 <닥터 후> 시즌 8~10을 올해 몰아봤다. 12대 닥터는 그렇게 유쾌하지 않다. "내가 좋은 사람이야?"라고 물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다. 덕분에 이전보다 더 제멋대로에 혼자 모든 걸 해결하려는 성격이다. 피터 카팔디는 진성 '후비안'(<닥터 후> 팬덤의 별칭)답게 그 괴상한 성격을 12대 닥터의 '밀당' 요소로 승화시켰다. 이해하기 어려워도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닥터를 보여줬다. 어제 방영된 크리스마스 스페셜로 그의 12대 닥터는 막을 내렸다. 13대 닥터가 오기 전, 마지막으로 그의 닥터를 음미하고 싶다.

닥터 후 시즌10

연출 스티븐 모팻, 니키 윌슨

출연 피터 카팔디, 맷 루카스, 펄 맥키, 스테파니 하이암, 미나 앤워, 랄프 리틀, 카이저 악타르

방송 2017, 영국 BBC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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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에디터 성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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