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과 신입생 승민(이제훈 분)은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만난 음대생 서연(배수지 분)에게 자꾸만 눈이 갑니다. 하얀 피부에 야무지게 다문 붉은 입술, 긴 생머리에 단정한 옷매무새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특히 승민의 눈에는 더 완벽해 보이죠.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내준 과제로 두 사람은 같은 동네인 정릉에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새초롬하면서도 태연한 서연과 달리 승민의 마음은 이유도 없이 설레기 시작한 듯하네요. 과제를 하다가 우연히 동네에서 마주치게 된 둘은 조금씩 가까워집니다. 동네를 걷다가 낡은 빈집을 발견해 안으로 들어가 구경하기도 하고, 더 멀리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며 과제를 할 때도 있습니다. 첫사랑에 빠진 남자답게 승민은 서연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헷갈려 합니다. 그는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이미 마음이 부풀 대로 부풀었으니까요.

승민은 이제 그녀에게 고백할 순간만을 기다립니다. 모두에게 인기 있는 그녀에게 유일한 남자가 되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그가 고백하려는 그 찰나, 서연은 술에 취해 같은 동아리 남자 선배의 등에 업혀 집으로 들어갑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질투와 배신감으로 가슴이 답답한 승민은 아무 시도도 해보지 않고 그녀를 둔 채 떠나갑니다. 그는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외면하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멀어져 갑니다.

시간이 흘러 15년 뒤, 건축가가 된 승민(엄태웅 분)이 일하고 있는 사무소로 한 여자가 찾아옵니다. 우아하고 귀티 나는 그녀는 바로 서연(한가인 분)이었습니다. 서연이 승민을 찾아온 이유는 제주도에 있는 고향집을 헐고 새로 지어달라는 의뢰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사코 거절하던 그는 마지못해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15년 전의 기억을 하나씩 꺼내 엇갈렸던 퍼즐을 다시 맞춰갑니다.

<건축학개론>을 본 사람들은 반응이 제각각이었습니다. 특히 남자와 여자의 반응이 사뭇 달랐습니다. 보통 로맨스 영화라면 여자들이 더 감정이입을 하는 편인데, 이 영화는 반대로 남자들의 반응이 더 뜨거웠습니다. 시종일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띠는 서연의 모습은 승민뿐 아니라 많은 남자 관객들의 마음에 혼란을 안겨줘 영화에 대한 공감도를 높인 것 같네요.

공사를 위해 내려간 제주도에서 둘은 바다가 훤히 보이는 포장마차에 앉아 술 한 잔을 기울입니다. 이때 매운탕을 먹던 서연은 말합니다. “매운탕. 이름 이상하지 않냐? 알이 들어가면 알탕, 갈비가 들어가면 갈비탕인데, 이건 그냥 매운탕. 탕인데 맵다. 그게 끝이잖아. 안에 뭐가 들어가도 다 그냥 매운탕. 맘에 안 들어. 내가 사는 게 매운탕 같아서.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고 그냥 맵기만 하네.” 어쩌다 서연이 살아온 지난 15년은 맵기만 한 매운탕이 되었을까요?
 
서연이 하는 말을 매운탕이 들으면 억울해할 소리,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사실 매운탕은 그런 음식입니다. '고추장이나 고춧가루를 풀고 생선, 야채 등을 넣어 끓인 찌개'가 매운탕이니까요. 바닷고기나 민물고기나 어떤 것을 넣어 끓여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바닷고기는 너무 오래 끓이면 살이 부서져 맛이 없으니 살이 익을 정도로만 끓이고, 민물고기는 오래 푹 끓여야 흙내가 없고 제맛이 난다는 정도의 룰이 있을 뿐입니다. 어쩐지 자신의 인생을 '매운탕'에 비유하게 된 서연의 모습이 안타깝다가도 사실 우리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극장에 앉아있던 많은 남녀들이 이 대사에 공감했던 걸 보면요.

영화 속 두 사람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소품들로 잊었던 감성을 깨웁니다. 삐삐, CD 플레이어, 헤어 무스가 있었고, “바닥청소하고 다니냐?"라는 엄마의 핀잔이 날아왔던 통 넓은 바지가 있었습니다. 이 시절의 추억은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란 음악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아련하게 합니다. 추운 겨울, 집 앞에서 꽁꽁 언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소녀를 기다리던 소년도, 소년의 귀에 이어폰을 꽂아두던 새초롬한 소녀도 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억 속에서 각자가 추억하고 싶은 모습으로 남아있겠죠?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질 쳐서 사라졌습니다.” 한용운 시인의 시구처럼 우리의 인생은 첫사랑이 떠나도 빠른 속도로 흘러갑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첫사랑을 실제와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걸요. 순수하고 뜨거웠던 시절, 둘만 아는 기억의 집이 첫사랑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건축학개론

감독 이용주

출연 엄태웅, 한가인, 이제훈, 수지

개봉 2012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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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메뉴 따라하기

서연의 집을 증축하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간 승민은 서연에게 자꾸 밥을 먹자고 합니다. 사실 그날은 서연의 생일이었거든요. 둘은 식당에 마주 앉아 따뜻한 밥과 미역국을 먹습니다. 영화에서는 성게를 넣어 미역국을 끓였지만 저는 좀 더 구하기 쉬운 홍합으로 미역국을 끓여봤어요. 여기에 들깨가루를 넉넉히 넣으면 진하고 구수한 맛의 미역국을 완성할 수 있답니다. 그런데 말이죠. 여전히 첫사랑의 생일을 기억하고 그날 그녀에게 밥 한 끼라도 꼭 사려고 하는 이 남자, 승민의 약혼녀 입장이라면 좀 속상하겠죠?


홍합 미역국

재료
말린 미역 12g, 들기름 1 큰 술, 쌀뜨물 5, 홍합 살 50g, 국간장 1 큰 술, 소금 조금, 들깨가루 3 큰 술.

만드는 법
1. 미역은 물을 넉넉히 부어 1시간 이상 불린 뒤 물기를 뺀 다음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2. 홍합 살은 깨끗하게 헹군 뒤 물기를 빼둔다.
3. 달군 냄비에 들기름을 두른 다음 1의 불린 미역을 넣어 볶는다.
4. 3에 쌀뜨물을 붓고 미역이 부드럽게 익을 때까지 끓인다.
5. 마지막에 홍합을 넣고 조금 더 끓인 뒤 국간장과 소금으로 간하고 마지막에 들깨가루를 넣어 완성한다.


파란달 / 요리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