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한 수많은 영화가 있다. ‘오늘은 무슨 영화를 볼까’라는 행복한 고민에 빠진 이들을 위해 쓴다. ‘씨네플레이’는 ‘씨플 재개봉관’이라는 이름으로 재개봉하면 당장 보러 갈 영화, 실제로 재개봉하는 영화들을 소개해왔다. 이번에 만나볼 영화는 꼭 20년 전, 1998년 1월에 개봉한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다.

2013년 재개봉 포스터.

8월의 크리스마스
감독 허진호 출연 한석규, 심은하, 신구, 오지혜, 전미선, 이한위 개봉 1998년 1월 24일 재개봉 2013년 11월 6일 상영시간 97분 등급 15세 관람가

8월의 크리스마스

감독 허진호

출연 한석규, 심은하

개봉 1998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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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또 봐도 보고 싶은 영화, 보면 볼수록 새로운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많은 영화팬들이 잘 알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2003년 11월에 한 차례 재개봉했던 영화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다시 스크린에서 상영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극장을 찾게 만드는 영화다. 20년의 세월이 지나 다시 본 <8월의 크리스마스>를 소개한다.

멜로영화의 클래식
<8월의 크리스마스>는 흔히 말하는 동시대 고전, 클래식의 반열에 올려도 좋을 영화다. 앞으로 20년이 더 지나면 그때는 ‘동시대’라는 말을 빼도 무방해 보인다. 어떤 점이 <8월의 크리스마스>를 고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만들었을까. 그전까지 멜로영화는 눈물을 짜내는 문법을 사용했다. 특히 1990년대 말 <편지>, <약속> 등 두 글자 제목의 멜로영화들이 그랬다. 이 영화가 안 좋은 영화라는 뜻은 아닌다. 어쨌든 죽음이 갈라놓은 사랑 앞에 영화 속 주인공도 울고 관객도 울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달랐다. <8월의 크리스마스> 역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캐릭터가 등장한다. 사진관을 운영하는 30대 남자 정원(한석규)이다. 주차단속을 하는 구청직원 다림(심은하)이 사진을 현상하기 위해 사진관에 자주 오게 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두 사람이 죽도록 사랑했냐고? 그렇지 않다. 죽음을 앞둔 남자는 쉽게 곁을 내주지 못했고 두 사람의 감정은 일종의 ‘썸’ 단계에 머무른다. 그럼에도 감히 멜로영화의 클래식이라 말할 수 있을까. 당연하다. 썸만큼 더 설레는 게 어디 있나. 상태가 악화돼 병원에 입원하게 된 정원의 사정을 모르는 다림은 아무 연락 없이 사라진 정원의 사진관에 돌을 던진다. 이들의 이뤄지지 못한 사랑의 속사정을 다 아는 관객은 그저 애가 탈 뿐이다. 다림이 슬쩍 정원의 팔짱을 끼는 장면에서는 ‘심쿵’할 테고.

관조적 카메라
음악이 깔리고 스크린에서 ‘울어라, 울어! 이래도 안 울래’ 하는 영화가 있다. 그렇게 터져나온 눈물보다 무심한 화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딱 그랬다. 허진호 감독은 덤덤하게 정원의 죽음을 바라본다. ‘덤덤하게’라는 표현을 관조적 카메라라는 말로 바꿔볼 수 있겠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카메라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클로즈업도 거의 없다. 멀찍이 서서 인물을 바라보는 장면이 많다. 캐릭터가 지나간 텅빈 풍경을 조금 더 보여주기도 한다. 허진호 감독은 개봉 당시 ‘씨네21’ 인터뷰에서 “실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 인터뷰를 했는데 3∼4개월쯤 앞둔 사람들은 열이면 7∼8명은 차분해지고 착해진다고 들었다. 그런 데서 영화가 영향을 받았을 거다. 정원이란 인물을 밝게 그린 것도 그렇다. 물론 밝은 면만 있는 건 아니지만 관조적인 느낌으로 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는 여백과 절제가 있다. 허진호 감독이 절제해서 만든 여백을 채우는 건 관객의 몫이다.

일상의 소중함 
멜로영화의 고전이라고 서두에 소개했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에는 꼭 언급해야 할 인물이 있다. 신구가 연기한 정원의 아버지다. 이 아버지는 정원과 다림 사이에 있다. 멜로 드라마 사이사이 스며든 일상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다만 이 아버지는 친절하지 못하다. 먼저 보내는 아들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지 않는다. 그런 아버지를 대하는 아들도 언뜻 그래 보인다. 비디오 플레이어 사용법을 알려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하나 하나 설명하던 정원은 아버지가 제대로 못 하자 벌컥 화를 내고 만다. 그 뒤에 생략한 말을 추측하는 건 관객의 몫이다. ‘내가 죽고 나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것도 못 하세요!’ 차마 정원이 하지 못한 말. 관객은 안다. 아버지도 안다.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비디오 작동법을 글로 남긴다.
아들의 마음을 알지만 모르는 척하는 아버지는 죽음이 두려워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고 있는 아들의 방문을 서성이다 결국 뒤돌아선다. 아들을 먼저 보내야 하는 그의 심정은 영화를 보는 모든 이가 짐작하고도 남는다. 아버지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인물의 개입은 이 멜로 드라마를 더 현실적으로 만들어줬다. 물론 가족이 모여 밥을 먹거나, 초등학교 운동장을 보여주거나, 마루에 앉아 발톱을 깎는 정원을 바라보는,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장면들도 여운을 남긴다.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는 사진사
<8월의 크리스마스>를 한 문장으로 줄인다면, ‘자기 영정사진을 찍는 사진사의 이야기’ 정도가 좋겠다. 이 문장에는 자기가 좋아했던 첫사랑 여자 지원(전미선)도 아버지도 동생 정숙(오지혜)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자 다림도 생략돼 있다. 본질은 죽음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진사 정원은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으며 옅은 미소를 남긴다. 허진호 감독은 <8월의 크리스마스>가 “가수 김광석의 영정사진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처럼 <8월의 크리스마스>는 늘 다시 생각나는 영화다.

말을 걸고 싶은 영화
번역가 황석희도 대학 시절 허름한 자취방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고 또 봤다. ‘씨네21’에 기고한 ‘내 인생의 영화’를 통해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봤다”고 썼다. 그의 글에서 공감하는 부분을 빌려왔다. “자랑하지 않고, 충고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는 그 침묵에 더없이 큰 위로를 받는다. 대사도 적지만 이렇게 여백이 많은 작품도 드물다. 인물이 다 빠진 배경이 덩그러니 남아 한참 동안 날 쳐다본다. 이 정도면 오히려 영화에 내가 말을 걸고 싶을 정도다.” 말을 걸고 싶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대해 구구절절 더 말을 늘어놓기보다 이 한마디를 전한다. 20년 전 이 영화를 아직 못 봤다면 꼭 보길 바란다. 황석희 번역가처럼 당신은 분명 영화에게 말을 걸게 될 거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소소한 사실들

*한석규가 직접 영화의 주제가를 불렀다.

8월의 크리스마스 '뮤직비디오'

*일본에서 2005년 리메이크 됐다. 이는 2007년 국내에서도 개봉했다. 원작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았다.

8월의 크리스마스

감독 나가사키 슌이치

출연 야마자키 마사요시, 세키 메구미

개봉 2005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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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촬영감독 유영길의 유작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시작되면 그의 죽음을 기리는 문구가 제일 처음 등장한다. 유영길 촬영감독은 <8월의 크리스마스> 이전에 <초록물고기>, <꽃잎>,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등을 촬영했다.

고 김애라(왼쪽)와 한석규.

*극중 한복을 차려 입고 영정사진을 찍으러 온 할머니로 나왔던 배우 김애라가 영화 개봉 3년 뒤 작고했다. 미처 영정사진을 준비하지 못한 유족들은 <8월의 크리스마스>의 영화 스틸을 사용했다.

*영화에 나온 초원사진관은 군산의 세트장이다. 촬영 당시 실제로 필름을 맡기러 온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영화 촬영 이후 방치됐다가 2012년 복원됐다.

*아버지에게 비디오플레이어 작동법을 알려주는 장면은 허진호 감독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신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