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한 장풍대작전>이던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어느 영화 도입부쯤에서 중년 배우들이 모여서 소위 도 닦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열심히 대화하던 장면이 지금도 기억난다. 도 닦는다고 하면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폭포 아래서 물 맞으며 수련하거나 벽 보고 수행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그게 아니라고. 밥은 먹어야 하니 일어나서 쌀을 씻고 밥을 준비하고 먹고 설거지하고 정리를 마치고 나면 오전이 거의 다 지나가고, 그렇게 끼니 때우다 보면 하루가 다 간다고, 이러니 도 닦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던 장면 말이다. 도를 닦고, 내공을 쌓고 하는 것들이 무협지나 대중문화 속의 흔한 클리셰라면 클리셰였던 셈인데, 그 클리셰 뒤의 민낯을 처음 접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민낯들을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어렴풋이 알면서도 외면하곤 하는 것은 누구든 현실을 떠나 지금보다 나은 세상에서 새로운 기회를 갖기를 한 번쯤은 소망해보기 때문이다. 소위 환상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고, SF 영화라는 것이 그렇고, 무협지니 이세계물이니 하는 것들이 다 마찬가지다. 가깝게는 <도깨비> 같은 드라마도 포함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원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도깨비가 없는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고 지금 사는 세상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한데, 막상 떠난다 해도 그게 생각처럼 편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하곤 한다. <배트맨> 영화를 보면서 현실성 없다고 생각해봤자 의미 없으니까요. :)

그래도 사람과 만나며 에너지를 채우게 아니라 되레 에너지를 소모하는 나같은 타입은 다른 건 몰라도 싫은 사회적 관계에서 벗어나 혼자 사는 걸 꿈꾸곤 한다.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고, 빵을 굽고, 술을 담그며 사는 슬로 라이프를. 그래서 <리틀 포레스트>만났을 때 반가웠다.

만화책 <리틀 포레스트>. 한 권은 띠지가 없어졌네요 ㅠㅠ

<리틀 포레스트>는 원래 이가라시 다이스케가 그린 만화의 이름이다. 개인적으로도 영화보다 만화를 먼저 접했는데 수수한 그림체에 수수한 내용, 거기다 수수한 대사까지, 마치 영화에 나오는 감주 같은 느낌이 드는 만화다. 그 만화를 모리 준이치 감독이 동명의 영화로 만들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에 맞춰 4부작으로 만들었지만, 시간관계상 여름과 가을그리고 겨울과 봄으로 2개씩 짝지어 상영했다. 주연은 하시모토 아이. 만화 주인공에 비하면 좀 많이 씩씩한 인상이다.

만화와 마찬가지로, 영화 내내 주인공이 하는 일은 별게 없다. 농사를 짓고, 산을 오르고, 식사와 간식을 만드는 내용들이 다다. 도무지 영화적인 클라이맥스는 찾을 길이 없다. 그래서 보는 사람을 쓸데없이 긴장하게 만들지 않고, 영화를 보고 나면 어느새 마음속 긴장이 풀어지는 느낌을 갖게 해준다.

영화 속 가장 중요한 내용이 음식을 만드는 것인데 계절별로 음식이 7가지씩 등장한다. 여기서는 그 중 甘酒(아마자케)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영화 속 아마자케

영화 속의 아마자케는 보통 식혜로 번역되곤 하지만 일본의 아마자케는 이름에도 술주(酒)자가 들어가 있듯이 식혜와 막걸리류의 술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식혜에 엿기름을 사용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마자케는 누룩을 사용해 만드는 것이 전통적인 방법인데 최근에는 술지게미를 물에 풀고 설탕을 녹여 만드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우리나라 전통주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은 이 제조법을 듣고 바로 모주를 떠올릴 것이다.

전주주조

모주는 술지게미나 막걸리에 흑설탕을 넣어 만들며 여기에 보통은 계피나 감초, 칡뿌리 등의 약초들을 같이 넣는다. 술지게미를 쓴다면 보통 물을 섞어 며칠 두었다가 만들고, 막걸리를 쓸 때는 그냥 재료를 넣고 바로 끓여 만든다. 설탕은 마지막에 넣는다.

명목상 술이기는 한데 콩나물국밥 전문점에서 드셔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알코올 도수는 체감 1~2도 정도로 거의 느껴지지 않는 편이다. 애초에 독하지 않은 막걸리나 술지게미를 끓이기까지 해서 만드니 당연할 것이다. 실제로 마셔보면 달달한 첫맛에 계피나 약초의 향긋함이 뒤따라와서 꽤 마시기 편한 음료에 가깝다. 애초의 용도(?)는 역시 해장용인 국밥과 같이 마시는 해장술이었지만 한여름에 얼음을 넣어 시원하게 마시는 모주가 개인적으로는 더 취향에 맞는다.

시골을 그리 좋아하는 편도 아니니 주인공처럼 생활하는 건 애당초 내 워너비 라이프는 아니다. 그래도 저렇게 내가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 밥을 해먹고 시간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밖으로 나가 혼자 일을 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며 살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뭐 문제는 저렇게 살아갖곤 술값을 댈 자신이 없다는 건데(먼 산...) 역시 현실은 냉혹하고, 상상은 상상으로 놔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

<리틀 포레스트> 예고편

우리나라에서도 임순례 감독이 같은 원작으로 우리나라에 맞게 각색한 동명의 영화가 2018년에 개봉할 예정이라고 한다. 식혜가 등장할 수도 있겠고 다른 우리나라의 전통 음식이 등장할 수도 있겠지. 개인적으로는 막걸리가 등장했으면 좋겠다. 여태 영화와 술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정작 우리나라 전통주는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고, 그게 개인적으로는 뭐랄까, 약간의 부채처럼 느껴졌다. 예고편에서도 살짝 보이던데 개인적으로도 정말 좋아하는 임순례 감독이 막걸리 이야기를 해준다면 정말 행복하게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모주(母酒)자는 누구나 알다시피 어머니라는 뜻이다. 술 좀 그만 마시라고 암만 말해도 듣지 않는 나같은 못난 아들 몸이라도 덜 축나라고 몸에 좋은 약초를 넣어 맛도 달게 만든 술이다. 세상 모든 어머니의 마음이 다 같을 텐데 정작 자식은 근처에 살면서도 생활에 치여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니 그저 죄송스러울 뿐이다. 이번 주말엔 어머니 아버지와 식사라도 같이 해야겠다 싶다. 맛있는 술 한 병과 고기를 사들고 아들과 함께 어머니 집으로 가야.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

감독 모리 준이치

출연 하시모토 아이, 마츠오카 마유, 누쿠미즈 요이치, 키리시마 카렌, 미우라 타카히로

개봉 2014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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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포레스트2: 겨울과 봄

감독 모리 준이치

출연 하시모토 아이, 미우라 타카히로, 마츠오카 마유, 누쿠미즈 요이치, 키리시마 카렌

개봉 2015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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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렉 / 술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