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 <살인 나비를 쫓는 여자> 등 문제작을 남긴 김기영은 한국영화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감독입니다. 기괴한 그의 영화 세계는 제법 여러 번의 회고전을 통해 영화팬들을 찾아갔었습니다.
김기영 감독이 세상을 떠난 지 20주기를 맞이해 조금 특별하게 그를 기리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입니다. 바로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 중인 전시 ‘하녀의 계단을 오르다’입니다.

- 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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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기영
출연 김진규, 이은심, 주증녀, 엄앵란, 안성기
개봉 1960 대한민국
‘계단’은 그의 작품에서 여러 가지 상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전도연 주연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던 영화 <하녀>에서의 계단은 신분 상승의 욕구, 계급 간 갈등, 성에 대한 갈망과 추락 등으로 해석되곤 하지요. 그의 작품들은 후배 감독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고 박찬욱이 연출한 <스토커>의 집안 계단에서 김기영을 읽어내는 팬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제 GV에서 젊은 영화학도가 아는 척하느라고 던질 법한 이런 분석적인 물음에 감독은 좀처럼 기대했던 답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전혀 딴소리를 하거나 자신이 ‘변태’라서 그렇다며 얼버무리곤 했지요.
그는 그렇게 변태의 기운이 가득한 32편의 명작을 남겼습니다. 특히 스스로 대표작이라고 꼽은 작품으로는 <양산도>(1955), <10대의 반항>(1959), <하녀>(1960),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1966), <화녀>(1971), <충녀>(1972), <파계>(1974), <육체의 약속>(1975), <이어도>(1977) 등이 있는데요. 이번 전시에서는 각 작품을 상세하게 소개하는 내용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김기영이 연출한 장면들엔 주로 일본에서 양산된 괴작 감독들의 문제적인 장면을 가볍게 뛰어넘는 파격이 있었습니다. <이어도>(1977)의 종반부에 섬의 여인들은 죽은 남자의 시체를 서로 갖겠다며 설전을 벌입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시체와 섹스를 나누는 사이, 무당은 그 옆에서 사이키델릭한 춤판을 벌이지요. 당시 박정희 정권의 심의를 대체 어떻게 돌파했을지 모를 이런 장면들에서 특유의 ‘마기’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 이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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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기영
출연 이화시, 김정철, 최윤석, 권미혜
개봉 1977 대한민국
후기작 중 하나인 <육식동물>(1984)에선 심약한 성격의 남자가 부인과 정부에게 절반씩 소유당하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당시 이미 40대 중반이던 거구의 배우 김성겸은 젖병을 물고 기저귀를 찬 채로 사육당하는데요. “당신은 지금부터 나의 아기니까, 아기처럼 누워서 기저귀에 볼일을 봐라” 같은 류의 가학적인 설정이 가득합니다.
김기영 감독의 천재적이고 변태적인 연출 방식과 관련해서는 ‘쥐’와 관련한 일화도 유명합니다. <화녀>(1971) 촬영 당시 살아있는 쥐에 불을 붙이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감독은 쥐를 스스로 사육하고 나름의 연기 교육까지 시켰습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쥐에 실제로 불을 붙이고 촬영을 감행했습니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던 불타오르는 쥐가 미쳐 날뛰면서 현장은 그야말로 불지옥이 되었지만, 촬영을 멈추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선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스테인드글라스에 작품의 주요 스틸컷을 장식하고 그 앞 5개의 비전에서 각각의 주제를 가진 명장면이 상영됩니다. 얄궂게도 이 전시물에는 몇 개의 쥐인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독은 생전에 32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1990년대 들어서는 그 악명이 잊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90년대 후반, 영화매체의 호들갑스러운 칭송을 받으며 갑자기 재조명받기 시작합니다. 세간의 갑작스러운 관심에 놀라는 기색도 없이 감독은 노구를 이끌고 다양한 영화제와 회고전에 바쁘게 불려 다녔습니다. 그러다 1998년 48회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돼 장거리 출장을 준비하던 중, 살던 집에 불이 나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감독이 살던 집은 자신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스토리의 흉가로 유명했습니다. 평론가 김영진이 그를 회고하는 글에서 김수용 감독의 이야기를 빌어 전하기를, 김기영 감독은 이런 흉가야말로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곳이라며 기꺼이 입주했다고 합니다.
씨네플레이 객원 에디터 안성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