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와 어리석음이
만들어낸 영화다.
- 스티븐 스필버그
때는 1973년, 26살의 젊고 유능한 신인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상업 장편영화 연출 데뷔작인 〈슈가랜드 특급〉을 발표했다. 할리우드의 무서운 신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를 모든 메이저 스튜디오가 주목했다. 당연하게도 그는 어떤 차기작을 선택할지 넘나 고민이 됐다. 그때 마침 이름도 생소한 소설 <죠스>를 읽기 시작한 것. 그가 주말 동안 읽은 백상아리에 관한 이 소설은 너무 재미있었고, 자신이 <슈가랜드 특급> 전에 만들었던 TV용 영화 <결투>의 이야기와 닮아 있단 걸 느끼게 된다. <결투>는 광폭한 트럭 운전사와 불운한 운전사에 관한 영화인데 스필버그는 <결투>와 <죠스>가 모두 "평범한 사람을 괴롭히는 괴물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죠스>를 <결투>의 속편이라 생각하고 작업하기 시작했다. 그 후 <죠스>는 할리우드 전체 시장 자체를 뒤흔들어놓은 역대급 이슈를 만들어냈다. 그의 나이 불과 27살 때였다.
제목을 '죠스'라고 지은 이유는?
작가 피터 벤츨리의 소설 '죠스'는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죠스>의 원작소설이다. 소설의 제목을 그대로 영화 제목으로 옮겨왔다. 지금에야 '죠스'라는 단어에서 당연히 식인상어를 연상하지만 스필버그가 처음 소설을 접했을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이 책이 치과의사에 관한 책인줄 알고 봤다고 한다. '죠스'라는 제목은 순간의 아이디어에서 얻은 제목이었다. 피터 벤츨리가 소설을 탈고하고 인쇄까지 넘긴 시점에서 제목의 후보는 '물의 정적', '심해의 침묵', '떠오르는 리바이어던', '죽음의 죠스' 따위가 거론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 제목들이 너무 극적이고 과장됐고 이상했고 가식적이라고 느꼈다. 그는 거의 포기한 상태로 인쇄 20여분을 남겨두고 편집자와 밥을 먹다가 "제목은 커녕 우리가 공통으로 좋아하는 단어도 없다. 그나마 유일하게 통하는 단어는 '죠스' 밖에 없다."라고 자조하다가 그냥 '죠스'라고 지으면 어떨까 싶어 결정했다. 이 소설은 이름 없는 작가의 데뷔작이었음에도 당시 유명 출판사에서 57만 5천 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판권을 구매했고,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는 영화화 판권을 15만 달러에 구매했다. 초대박 성공이었던 것이다. 당시 영화화 판권 계약이 성사되전 시점에 작가의 전재산은 3백 달러였다. 영화 <죠스>의 성공 뒤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와 작가 피터 벤츨리라는 젊은 신인의 패기가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개봉관을 줄여라!
할리우드 판도를 뒤바꾸다
<죠스>는 1975년 6월 20일에 개봉했다. 여름 시즌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언론 시사회 반응은 역대급이었고 입소문도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배급관계자들은 이미 미국 전역 400개관에 스크린을 잡아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시사회 반응을 본 뒤에 할리우드 역사상 처음으로 600개관으로 확장하려고 시도 중이었다. 그런데 제작사인 MCA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루 와서맨 이사장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상영관을 반으로 줄이라"는 미션을 던져주었다. 사람들 모두가 황당해하며 영화가 재미없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려고 LA로 몰려드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는 "재미있는 영화일수록 관객이 기다렸다가 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에게 최고의 영화 광고는 줄지어 선 관객이었던 것이다. (변칙개봉 의문의 1패) 이런 특별한 배급방식은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 영화는 초대박 흥행을 이어나갔고 실제로 그해 여름 시장 흥행을 휘어잡았다. <죠스>는 전체 수익 2억 6천 달러를 달성했고, 이른바 바다 호러 영화 가운데 역대 가장 많은 수익을 남긴 영화로 남게 됐다.
영화사상 처음으로
TV 광고를 시도하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영화 광고를 옥외가 아닌 TV 브라운관을 통해 집행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기보다는 어느 누구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그런데 이를 최초로 시도한 영화가 바로 <죠스>다. 이 영화의 독특한 마케팅 방식은 지금도 여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광고에서는 목소리 더빙도 시도했다는 점. 극장 예고편과 TV 광고의 더빙 목소리는 성우이자 배우인 퍼시 로드리게스가 맡았다. 제작사에서는 높은 톤의 목소리를 요구했지만 그가 스스로 저음이 훨씬 공포 효과가 극대화될 거라며 밀고나갔다.
실제 바다에서
촬영한 최초의 영화
<죠스> 이전에 만들어졌던 대부분의 영화는 바다가 등장하는 장면이 있을 경우에는 야외 촬영장에 인공호수나 수중 세트를 만들어놓고 촬영했다. 그것이 일반적인 당시의 촬영 상식이었다. 그런데 이를 최초로 어긴 감독이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다. 그는 영화의 리얼리티를 위해서 실제 대서양 한복판에서 촬영하길 원했다. 그래야 더욱 사실적인 느낌을 갖게 될 거라 생각했다. 해류, 조수, 파도, 하다 못해 비와 햇빛까지도 실제 상황과 똑같아야 카메라에 보다 생생하게 담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촬영에 참여했던 스탭들이 얼마나 고생했을지는 관련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 수 있다. 스필버그에게도 이렇게 순진했던 시절이 있었다.
스필버그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찍지 않는다?
그렇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자신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직접 연출하지 않는다. 이유는 좀 유치하다. <죠스>의 마지막 장면인 상어가 터지는 장면을 촬영할 때였다. 빌 버틀러 촬영감독이 고속촬영을 준비해야 하는데 아직 준비가 덜 됐다며 감독에게 미안하다고 하자, 스필버그는 천천히 준비하라고 말한 뒤 자신은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갔다. (으응?) 그가 집으로 돌아간 이유는 스탭들이 마지막 촬영 때 감독을 바다에 빠트리기로 모의한 사실을 사전에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필버그는 시치미 뚝 떼고 아침 촬영 현장에 나가지도 않고 전화로 촬영감독에게 알아서 찍으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제작진이 자기한테 마지막날에 무슨 짓을 할지 겁이 나서 자리를 뜬 것이, 그 뒤로 스필버그 감독의 촬영현장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가로등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