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만원만 내면 매일 극장에서 영화 한 편씩 볼 수 있다.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한달에 최대 31편의 영화를 볼 수 있다. 1년이면 365편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아니, 말이 되는 소리다. 미국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최근 ‘무비패스’(MoviePass)라는 정액제 멤버십 서비스의 가입자가 150만 명을 돌파했다. 무비패스는 한 달에 9.95달러를 내고 매일 영화 한 편씩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서비스다. 미국의 평균 영화관람료는 8.93달러다. 뉴욕, LA 등 대도시의 극장에서는 13달러에서 17달러까지 티켓가격이 책정되어 있다. 그러니 한 달에 한 편만 봐도 이득인 셈이다. 미국 전역 91%가량의 극장에서 무비패스를 이용할 수 있다. 국내 도입이 시급하다고? 판단은 아직 이르다. 무비패스를 좀더 따져보자.
무비패스의 무서운 성장세
무비패스는 사실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 2011년에 설립된 회사다. 갑자기 회원수가 늘어난 건 2016년 8월부터다. 넷플릭스 공동창립자인 미치 로우가 CEO로 취임하고 월 정액제 가격을 50달러에서 9.95달러로 내려버렸다. 그러면서 8월 이전 2만 명이던 가입자수가 12월에 100만 명을 돌파했다. 이후 150만 명 돌파까지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무비패스는 어떤 시스템인가?
무비패스는 온라인으로 영화를 보는 데 익숙한 젊은 세대를 타겟으로 잡았다. 오프라인판 넷플릭스라고 해도 되겠다. 무비패스 이용법은 간단하다.
1. 무비패스에 가입하고 신용카드처럼 생긴 무비패스 카드를 받는다.
2. 무비패스 앱으로 영화를 예매한다. 이때 무비패스가 회원 카드에 해당 영화의 관람료를 충전해준다.
3. 극장에 가서 무비패스 카드로 결제하고 티켓을 수령한다. 이용자가 매달 정액요금을 미리 내고 영화 티켓을 예매하면 결제는 무비패스가 대신 해주는 시스템이다.
무비패스의 맹점도 있다. 3D나 아이맥스 영화는 볼 수 없다. 아직까지는 티켓을 한 번에 1장씩만 구입할 수 있다. 연인이나 친구, 가족이 나란히 앉는 좌석을 예매하기 힘들 수도 있다. 추후 커플, 가족 요금제가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예매만 하고 영화를 안 보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예매 시 반드시 해당 극장 반경 100야드(약 91미터) 이내에 있어야 한다.
회원수가 늘어날수록 손해?
무비패스는 회원들이 보는 영화의 관람료를 대신 결제해준다. 예를 들어 한 회원이 한달에 티켓값 1만 원의 영화10편을 보면 무비패스는 10만 원을 써야 한다. 무비패스는 극장에서 제공하는 일체의 할인을 적용받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회원수가 많아지고 관람횟수가 늘어날수록 무비패스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떻게 돈을 벌려는 걸까?
잠깐, 하루에 한 편씩 영화보는 게 쉬운 일일까? 한 달에 10편 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직장인이라면 퇴근 후 친구도 만나고, 운동을 하기도 하고, 각종 취미·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다. 많은 경우 야근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무비패스는 이렇게 정액제에 가입하고 극장에 가지 않는 회원이 많을수록 돈을 번다. 헬스클럽 이용료나 요가, 필라테스 강습료를 1년 단위로 결제하는 걸 떠올려보자. 누군가는 1년 내내 부지런히 가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한 두 번, 많게는 세 네 번만 가고 말지도 모른다.
무비패스 CEO 미치 로우가 예상한 진짜 수익은 따로 있다. 회원들의 월정액 납입금보다 이게 더 큰 수익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바로 무비패스 회원들의 극장 관람 행태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마케팅 회사, 극장, 할리우드 스튜디오 등에 판매하는 것이다.
극장은 무비패스를 싫어해!
극장들은 무비패스를 싫어한다. 미국의 최대 극장 체인 AMC가 무비패스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도 나왔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무비패스 회원이 폭발적으로 늘어 극장을 자주 찾는다면 더 좋은 것 아닌가? 극장은 온전한 영화관람료를 다 받는다. 팝콘도 더 많이 팔릴 것이다. 영화관람료는 배급사와 나눠야 하지만 팝콘 판 돈은 오롯이 극장 몫이다. 게다가 미국은 국내와 달리 극장 이용객이 매해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그런데도 극장은 왜 무비패스를 싫어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무비패스의 영향력이 세지면 극장에게 영화관람료를 낮추라고 압박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곧 극장이 무비패스에게 영화 유통시장의 열쇠를 넘겨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관객들이 더 이상 극장 앱에서 영화를 예매하지 않고 무비패스 앱만을 사용하는 상황은 극장 입장에선 최악일 것이다. 직접적인 비교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을 국내에 적용시켜 보면 이렇다. 극장은 배달 앱에 목을 멜 수밖에 없는 음식점과 비슷한 신세가 된다.
또 극장 쪽에서는 무비패스로 인해 영화를 관람하는 체험, 영화라는 콘텐츠에 대한 가치가 낮아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더 이상 극장에 가는 행위 자체가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된다는 뜻이다. 좀 비약해서 말하자면 거실에 나와 TV나 컴퓨터로 넷플릭스를 켜는 것과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게 비슷한 체험, 경험이 된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재미가 없으면? 리모컨을 들고 채널 돌리듯이 그냥 나와버리면 그만이다. 무비패스 회원들에게 영화 한 편 보는 가격이 그만큼 싸기 때문이다.
무비패스는 다양성영화를 사랑해?
극장은 영화 콘텐츠에 대한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영화 산업 전반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무비패스 CEO 미치 로우는 그 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극장에 관객들이 많아질수록 다양성영화, 독립영화 관람도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부지런히 극장을 찾는 무비패스 사용자라면 평소에 잘 보지 않던 다양성영화를 보게 될 확률이 자연스레 커진다는 것이다. 영화산업의 다양성 측면에서 좋은 현상처럼 보인다. 다만 여기에 함정이 있다. 최근 무비패스는 무비패스 벤처스(MoviePass Ventures)라는 자회사를 설립했다. 영화 콘텐츠 사업에 뛰어들어 배급까지 하겠다는 뜻이다. 즉, 무비패스가 끌어모은 관객들에게 자신들이 배급하는 영화를 보게 하려는 것이다. 확장된 다양성영화 시장을 차지하려는 의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프랑스에도 영화 시즌권이 있다고?
국내에서도 극장 정액제와 스크린독점, 다양성영화 활성화에 대한 비슷한 의견이 나온 적이 있다. 지난 2017년 12월 27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후보 토론회에서 권칠인 후보가 “프랑스처럼 ‘시즌권’을 도입해 자연스럽게 독립영화, 다양성영화 관람을 유도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참고로 새 영진위 위원장은 오석근 후보가 임명됐다.) 프랑스의 정액제도는 무비패스와는 달리 극장 체인에서 직접 만들고 운영한다. 프랑스에서는 정액제가 활성화돼 있다. 영진위 자료에 따르면 프랑스 극장 체인 위제세(UGC)의 경우 25%의 관객이 정액제를 이용하고 있다. 위제세의 무제한 정액제 요금(2016년 기준)은 26세 이상 1인은 월 21.9유로(약 2만 8600원, 이하 1월22일 환율 기준), 2인은 36.87유로(약 4만 8300원), 26세 미만은 월 17.90유로(2만 3400원) 수준이다.
무비패스 국내 도입 가능성은?
무비패스가 국내에 도입되면 어떨까? 당장은 그럴 일이 없겠지만 국내 최대 극장 체인의 의견을 들어봤다. CGV 황재현 홍보팀장은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다. 그는 “(무비패스가) 극장에게 분명 장점도 있지만 영화 콘텐츠의 가치를 낮아지게 만들고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 배우 등의 노력이 '시간 때우기' 식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만약 무비패스와 같은 서비스가 국내에서 시작된다면 “합리적인 가격으로 도입돼야 한다”는 의견도 밝혔다. 롯데시네마 홍보팀 관계자는 무비패스와 같은 서비스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배급사 등 극장 관계자들의 논의가 사전에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무비패스, 성공할까?
무비패스는 분명 획기적인 발상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서비스이기도 하다. 지금 추세라면 월정액 제도로 스트리밍 공룡이 된 넷플릭스처럼 무비패스가 오프라인 극장을 거느린 공룡이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넷플릭스와 무비패스의 조합이라면 TV드라마, 영화를 거의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겠다.
그럼 좋은 거 아니냐고? 만약 무비패스가 시장을 지배하게 된다면 분명 부작용도 따를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 예측이지만, 그 피해는 어쩌면 싼값에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돌아갈지도 모른다. 소셜커머스 쿠폰으로 구매해 찾아간 무제한 곱창집의 음식이 언젠가부터 맛이 없어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신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