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좀비 블록버스터로 일찌감치 화제를 모은 <부산행>이 어제 7월 20일 개봉했습니다. 개봉 전 3일간의 유료시사에서 56만 관객을 모은 데 이어, 개봉 첫날에만 무려 87만 관객을 동원해, 올해 첫 천만영화의 가능성을 높였습니다. 칸 국제영화제와 극장가에 작품을 공개하며 연상호 감독이 매체들과 나눈 대화 중, 키워드 별로 일부를 모아 <부산행>이 어떤 영화인지 깊게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부산행>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
연상호 감독은 1997년 데뷔 이후 꾸준히 애니메이션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2011년 발표된 첫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은 사회의 폐부를 향한 염세적인 이야기로 애니메이션계는 물론 한국영화 전반에 연상호의 존재를 알렸죠. <부산행>은 연상호 감독이 처음으로 만드는 실사영화입니다. 변화는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간극만큼이나 큽니다. 순수제작비만 85억이 투입된 ‘상업영화’인 만큼 대중적인 터치가 가미돼, 연상호 특유의 암흑 같은 세계관은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영화의_시작

<부산행> 프리퀄 격인
애니메이션 <서울역>을
먼저 준비를 했었다.
노숙자, 가출소녀 등이
같이 있는 서울역에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아예 <서울역>을
실사로 리메이크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건
배급사 NEW였다.
그 아이디어는 내가 반대했다.
이미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걸
실사영화로 리메이크 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다음 이야기를
어떤 것으로 만들까 논의를 했다.
<서울역>이 있으니
거기에서 출발하는 KTX에
한 아버지와 아들이 타면 어떨까
이런 아이디어를 냈다.
그러면서 <부산행>을 실사영화로 만들자는
기획이 구체화됐다.
(스타뉴스)
사회적 함의가 직설적으로 표현된
<서울역>에 좀더
개인적인 감수성을 부여해
만든 작품이 <부산행>이다.
(칸 국제영화제 기자간담회)
내가 잘 아는,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바이러스에 걸려
다른 존재가 된다는 설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 상황을 마주했을 때만
생기는 복합적인 감정도 있으니까.
치매도 비슷하지 않나.
익숙하던 사람이
낯설게 변하는 것 말이다.
(맥스무비)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쓸 때
가상의 관객을 만드는 습관이 있다.

<부산행>의 가상 관객은 전작과 크게 달랐다.

1년에 한번 극장을 찾는
우리 어머니 같은 일반 대중을
염두에 두고 썼다.
그러다보니 관객이 어느 선까지
(좀비물을) 허용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내놓은 결과물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칸 국제영화제 기자간담회)

포스터에는 ‘재난영화’라고 에두르고 있지만, <부산행>은 ‘좀비영화’입니다. 여태껏 한국 상업영화의 틀에서 제대로 만들어진 적이 없어, 다수의 대중에겐 분명 낯설고 거리낌이 드는 장르죠. 하지만 연상호 감독은 서구에서 온 이 장르의 컨벤션에 억지로 끼워 맞추기보다, 한국적인 요소를 적극 활용해 ‘<부산행>만의’ 좀비를 만들었습니다.


#좀비

감염자의 설정을 과하지 않게,
서양의 것을 그대로
가지고 오지 않으려고 했다.
비주얼적인 측면에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앞서 개봉한 <곡성>의 특수분장 팀이
우리 영화도 맡게 되면서
수월하게 구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맥스무비)
좀비 바이러스 창궐 초기의 이야기다.
그래서 좀비들이 빠르다.
그리고 열차라는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니
액션 효과가 극대화되기 위해선
좀비가 빨라야 했다.
(스타뉴스)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의
크리처 디자이너인 장희철 디자이너가
잘 알고 지내는 형이라
디자인을 지켜볼 수 있었다.
<괴물>에서 괴물이
처음에는 에일리언과
비슷한 형태였다가
점점 달라졌는데,
그때 봉 감독님이
요청한 사항이 있었다.
배경이 한국이라는 점,
송강호와 같이 섰을 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는 점.
그 지적이 나에게도 도움이 됐다.
이질적이면서도 어울려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작업했다.
서구 장르영화에
한국인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스토리텔링, 톤앤매너, 대사 모두
한국영화에 맞게
철저하게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씨네21)


#한국적인_것

다른 좀비영화들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 자체는 별로 없었다.
한국적인 요소를
'부산행'에 넣으려 한 건,
좀비라는 이질적인 장르를
어떻게 그려야 한국 관객이
그럴듯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를
고민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 이야기에
빨려들어갈 수 있을테니깐.
구제역 같은
한국인들에게 아주 일상적인 것들을
담아야 몰입도가 생길 것 같았다.
(스타뉴스)

<부산행>에서 좀비만큼 중요한 게 KTX입니다. 단순히 한국의 교통수단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KTX가 빠른 속도를 자랑한다는 점을 경유해, 그에 맞춰 좀비들의 움직임 역시 빠르게 설정했죠. 속도감을 자랑하는 한편, 차체가 작고 좌석 사이가 비좁은 특징은 <부산행> 촬영의 난점으로 작용했다는군요. 하지만 연상호 감독과 이형덕 촬영감독은 이와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아니 그걸 영화의 장점으로 끌어들여 KTX라는 공간을 십분 활용했습니다.

#KTX

KTX는 매 칸이
다 똑같이 생겼고 좁아서
카메라를 놓는 데
제약이 굉장히 많다.
자칫하면 앵글이 전부
비슷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다.
영화 대부분을 차지하는 게
열차 신이기 때문에
촬영 감독과 카메라 운용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컷을 너무 많이 쪼개면
더 어려워질 거라는 생각에,
컷 수를 줄이고 카메라 워크를 활용해
다양한 그림을 만들었다.
(맥스무비)
무궁화호가 아니라
KTX로 설정한 것은
그 기차가 가진 속도감을
활용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닫힌 공간인데
그 공간이 이동한다는 점이
재미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좁은 공간을 어떻게 활용해
액션을 만들지가
촬영감독과 무술팀
전체의 고민이었다.
처음에는 KTX (지붕)에 올라갈까
생각도 해보고 별별 생각을 다 했다.
100% 해결 안 되고
들어간 것도 있었다.
그래서 찍으면서 많이 고쳤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구상했다.
닫힐까 말까 한 문 하나로도
액션의 컨셉이 만들어질 수 있다.
또 액션보다는 상황에 대한 컨셉을
더 중요하게 가져갔다.
특히 역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씨네21)

(왼쪽부터) <12인의 성난 사람들>, <새벽의 저주>, <아이 엠 어 히어로>
아무래도 연상호 감독이 애니메이션 감독인지라, 참고로 삼은 영화들도 애니메이션이 많을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더군다나 좀비물이기 때문에 극영화보다는 애니메이션이 그 판타지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데에 유용할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12인의 성난 사람들>과 <미스트> 같은, 한정된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신경전이 오가는 극영화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달리는 열차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다는 점에서 <설국열차>를 떠올리는 분들도 많은데요. 연상호 감독은 두 영화의 차이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습니다.

#레퍼런스

최초 버전은 규모가 작았다.
시드니 루멧의 <12인의 성난 사람들>
처럼 닫힌 공간에서 벌어지는
연극적 요소의 영화를 생각했다.
프랭크 다라본트의 <미스트>나
M. 나이트 샤말란의 <싸인>같은
분위기도 떠올렸다.

좀비를 설정하면서
잭 스나이더의 <새벽의 저주>와
하나자와 겐고의 만화
<아이 엠 어 히어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새벽의 저주>는 좀비물로는
대규모 자본이 들어간 드문 영화로,
리얼함을 바탕으로
좀비물을 구현하는 점이 신선하더라.
그동안 좀비가 서양인으로
주로 묘사되어왔으니
동양인에게도 과연 어울릴 것인지가
고민 중 하나였는데,
그런 점에서는 일본 좀비가 등장하는
<아이 엠 어 히어로>를 보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씨네21)
좋아하는 몇몇 실사영화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림자를 활용한 장면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하나-비>
에서 영감을 얻었다.
(맥스무비)


#설국열차

<설국열차>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설국열차>는 순환선이고,
<부산행>은 종착역이 분명한
열차를 탔다는 점이다.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가는 이야기,
그 목적지가
안전한지조차 모르는 이야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다.
그게 인생을 함축한다고 생각한다.
(스타뉴스)

<부산행>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늘 시간에 쫓기는 펀드매니저 석우(공유)와 그의 딸(김수안), 험상궂지만 의리남이자 애처가인 상호(마동석)와 그를 꽉 잡는 아내 성경(정유미), 고교 야구부원 영국(최우식)과 그를 좋아하는 친구 진희(안소희) 등이 이야기를 채웁니다. 각자 상징하는 바가 명징한 인물들은 어쩌면 흔히 보아온 캐릭터지만, 그들이 모여서 만든 서사의 에너지는 점점 특별한 방향으로 뻗어나갑니다. 물론 그 원동력은 가족애, 우정 같은 아주 보편적인 가치입니다. 사랑 따위는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연상호 감독의 전작 애니메이션을 떠올린다면 의외의 방향이죠.


#캐릭터

영화가 빠르게 진행되다보니
캐릭터를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받아들이기 쉬운
보편적인 캐릭터여야 했다.
상황 자체가 이미 특수하니
이전 <돼지의 왕>이나 <사이비>처럼
어려운 캐릭터로 가면
영화 호흡이 떨어질 것 같았다.
(씨네21)
원래는 좀 더 적은 캐릭터의
이야기로 구상했었다.
그런데 제작자와 투자사 등에서
여러 명을 생각하더라.
시나리오를 쓴 박주석 작가도
여러 등장인물을 생각했었고.
그게 독이 될지,
득이 될지를 고민했다.
아무래도 인물들의 등ㆍ퇴장을
다 생각해야 하니깐.
여러 인물이 등장하면
정형성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전형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니깐
캐릭터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난 좀비열차가
하나의 캐릭터가 되길 바랐다.
그렇기에 인물들 사연에
하나하나 집중하면
오히려 이야기가
분산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캐릭터가 다 전형적이니
이 이야기로 관객이 더 빠르게
몰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타뉴스)

#가족애

아버지와 아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아주 중요했다.
영화를 찍을 때 '가오' 잡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가족애를 담으면 촌스럽다,
그런 건 전혀 없다.
그냥 가족애라는 게
보편적인 감성이라고 생각했다.

<부산행>을
상업적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족애를 강조한 건 아니다.
인간 사회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바로 가족애가 아닌가 싶다.
(스타뉴스)

하지만 눈앞에 좀비가 우글거리는, 생사가 오가는 KTX 열차 속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만이 꽃필 순 없겠죠. 많은 이들이 예상 가능하듯, <부산행>은 인간과 좀비의 싸움에서 더 나아가, 위험을 무릅쓰고 모두가 살아야 한다는 사람들과 자신만의 안위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대립을 그립니다. 득달같이 달려 들어 목을 물어뜯는 좀비보다 이기심에 눈이 먼 사람들의 모습이 더 징그러워 보입니다. 그런 와중, <부산행>에서 유일한 '아이'인 수안의 대사와 눈빛은, 각박한 이 시대 한국을 향한 연상호 감독의 간절한 목소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열차에_탄_사람들

칸과 칸 사이를
무사히 넘어가야만 하는,
아주 단순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지.
극한 상황에 몰린 사회에서 사람들은
개인주의 성향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러면 최소 단위인 가족조차
연대하기 힘들어진다.
이게 <부산행>이 보여주는 세계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의 한국 사회와 많이 닮아있다.
어느 무리에도 섞이지 못하는 인물이
도움을 받으면서 그 안에 녹아들거나,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존재가 있는 사람들끼리
연대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판단했다.
(맥스무비)



#아이의_시선

공유 딸 역할인
수안의 시선, 시점이 중요했다.
수안의 관점에 의해
만들어진 게 많다.
기획할 때부터 영화의 톤앤매너
(성격, 분위기 등을 일컫는 말)를
누구 시점으로 가느냐가 중요했다.
아이의 시점이 맞다고 생각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면
어느 순간 아이의 시점이 발견되면서
어떤 감정이 발생한다.
<부산행>에선 아이가
올바른 시선을 담당한다.

난 근거가 없는 희망을
주는 것에는 반대한다.
그렇기에 아이의 시선은
일종의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세대는
좀 더 세상이 좋아져야 한다는
당위라고 할까.
희망보다는 당위라고 생각했다.
(스타뉴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