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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극 스릴러의 수작 〈혈의 누〉

씨네플레이

영화 <혈의 누>는?

 

〈혈의 누〉
〈혈의 누〉

 

<혈의 누>는 <번지점프를 하다>를 연출한 김대승 감독의 2005년 개봉작이다. 제지업을 기반으로 한 외딴섬마을에서 벌어진 화재사건과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원규(차승원) 일행이 이곳에서 숨겨 놓은 비밀에 점점 다가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차승원이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원규 역을, 지성이 이 마을이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의 비밀의 키를 쥐고 있는 두호 역을 맡았다. 그리고 박용우가 제지소의 주민들을 멸시하고 학대하는 양반 인권 역을 맡아서 놀라운 연기를 선보인다.


<혈의 누>의 관전포인트

시대적 특색과 한계를 절묘하게 이용한 추리극

〈혈의 누〉
〈혈의 누〉

 

​<혈의 누>는 조선시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일명 ‘조선연쇄살인사건’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현대극 못지않은 추리력으로 풀어간다. 마을에서 벌어진 의문의 화재사건, 곧이어 계속해서 일어나는 연쇄살인사건에 원규가 하나씩 단서를 찾아내고 유력한 용의자들을 불러 모은다.

영화는 여기서 흥미로운 경우의 수를 보여준다. 두호와 인권을 번갈아 가며 보여주는데, 두 사람이 이 모든 비극과 관계된, 어쩌면 둘 중 하나는 무조건 범인임을 관객에게 미리 알려준다. 다만 절묘하게 두 인물의 알리바이를 끝까지 감추고, 누구 하나로 쉽게 예단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가 작품의 흥미를 끝까지 유지시킨다.

특히 정체불명의 범인이 피해자들을 기발하면서도 극악무도한 방법으로 처단하는 모습은 끔찍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후 밝혀진 비밀 앞에 범인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분노와 그들의 업보가 함께 서려 있음을 깨닫게 한다. 조선시대라는 제한된 환경 속에서도 철저히 과학적인 수사 방법으로 진실에 향해가는 원규의 수사법도 인상 깊다. 시대적 특징과 한계를 절묘하게 이용해 장르적 재미와 메시지를 동시에 잡아내는 한국 사극 스릴러 솜씨를 보여준다.

 

사극에 첫 도전한 차승원, 지성의 변신, 박용우의 인생연기까지…

〈혈의 누〉
〈혈의 누〉 차승원

 

​이야기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차승원, 지성, 박용우의 연기 변신이 돋보인다. 원규 역을 맡은 차승원은 필모 사상 처음 사극 스릴러에 도전했다. 서구적인 마스크와 커다란 키가 사극에서 결코 장점이 될 수 없음에도,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며 사건을 수사하는 원규의 우직한 모습을 흡입력 있게 보여준다. 특히 나중 밝혀지는 비밀 앞에 허망한 표정으로 마을을 바라보는 원규의 눈빛은 차승원의 탄탄한 연기 내공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다.

 

〈혈의 누〉
〈혈의 누〉 지성

지성 역시 이 작품을 통해 실질적으로 영화계에 데뷔한다. 드라마에서 선한 인물을 많이 맡았던 그는 <혈의 누>에서 선과 악 양가적인 마음을 가진 두호 캐릭터를 통해 다채로운 감정 연기를 선사한다. 후반부에 밝혀지는 비밀과 함께 분노를 표하는 그의 모습은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한 연기의 힘을 느끼게 만든다.

〈혈의 누〉
〈혈의 누〉 박용우

 

<혈의 누>의 최대 발견은 단연 박용우다. 마을의 실질적인 지배자 김치성의 서자로, 백성들을 폄하하는 뒤틀린 양반 정도로 생각되었으나, 후반부에 드러나는 그의 모습들은 <혈의 누>에서 가장 입체적이고 공감 가는 이야기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싸늘한 모습 속에 상대의 허를 찌르는 언변은 영화가 강조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박용우의 연기가 당시 관객들에게도 상당히 인상 깊게 다가왔는데, 이 같은 열연으로 각종 영화제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2005년 13회 춘사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밖에 지금도 왕성히 활동 중인 윤세아, 유해진의 초기 모습을 만나는 재미도 이 작품에 함께 들어있다.

 

범인 찾기보다 더 중요한 것

〈혈의 누〉
〈혈의 누〉

'피의 비'라는 강렬한 제목답게 영화는 핏빛 향연을 단순히 추리 장치로만 활용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엄연히 신분과 계급의 벽이 있는 사회를 바탕으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 속 당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한계를 통렬하게 보여준다. 초반에는 구미가 당기는 여러 단서 속에 “과연 범인이 누구일까”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사건 관계자들의 치졸하고 비겁한 모습, 진실에 다가갈수록 더 악랄해진 계급의 벽은 이 사건이 단순히 치정에 얽힌 살인만이 아님을 원규는 깨닫는다.

원규가 만난 이들 중 몇몇을 빼면 모두 그들의 인간성에 혀를 차게 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의 비극을 기꺼이 이용하고 팔아먹는 자들, 그런 쉴 새 없는 비판에 중립적이고 도덕적인 주인공 원규 역시 벗어날 수 없음을 영화는 날카롭게 꼬집는다.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범인이 누군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욕망에 사로잡혀 강객주를 발고한 이들은 물론, 부조리에 맞서지 않고 침묵한 모두를 꾸짖으며 영화의 목소리는 점점 굵어진다. 사극스릴러로 출발했지만, 지금 현실의 추악한 그림자를 똑똑히 목격한 듯한 씁쓸함, <혈의 누>가 장르적으로도 훌륭한 동시에 메시지적으로 긴 여운을 건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혈의 누>의 명장면-명대사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가 사람이냐...."

인간의 이중성을 비판한 <혈의 누>의 메시지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면. 동화도 살인사건 진범인 인권이 수사관 원규를 꾸짖으며 하는 대사다. 사실 원규가 동화도에 오기 전 그의 아버지도 이곳과 관계있었다. 평소 아버지를 존경하던 원규는 이곳에서 아버지 역시 기득권과 결탁하며, 불의를 행한 것을 알게 된다. 원규는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해야 하는 수사관과 아비의 부도덕을 덮어야 하는 아들로서 어느 쪽에 무게중심을 두어야할지 큰 혼란에 빠진다. 이에 갈등하는 원규를 보며 인권이 했던 대사는 영화 전체의 이야기를 꿰뚫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혈의 누> 당시 인기와 현재 시청 가능한 OTT

〈혈의 누〉 포스터
〈혈의 누〉 포스터

<혈의 누>는 2005년 5월 4일 개봉했다. 당시 어린이날 연휴와 강렬한 예고편 덕분에 상당한 많은 관심을 받으며 흥행 질주를 이어갔다. 다만 극 중에 나오는 살인수법과 거열형이 상당히 잔인해서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점은 아킬레스건. 약 227만 관객을 동원해 개봉 전 작품의 기대도에 비하면 살짝은 아쉬운 성적.

​그럼에도 사극과 추리 장르의 매력을 접목시키며, 한국 기획영화에서 만나기 어려운 씁쓸하고 비판적인 메시지를 강조한 점은 흥행 결과 이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중이다. N차할 때마다 작품의 숨겨진 코드가 보이며, 특히 반전으로 다가오는 인권의 정체에, 그가 이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마음이 쓰이는 영화로 다가온다. 올해로 개봉 20년을 맞는 이 작품, 지금 봐도 흥미진진한 재미 속에 묵직한 메시지가 뼈를 때린다. 현재 넷플릭스와 티빙, 왓챠에서 <혈의 누>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테일러콘텐츠 에디터 홍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