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하면 떠오르는 것!" 하면 (아무래도 여기는 씨네플레이 블로그니까) "공포영화!"라고 외치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끄덕끄덕. 하지만 7월의 끄트머리를 바라보는 요즘, 모범답안은 '록 페스티벌'이다. 7월 22일 지산밸리록페스티벌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떠들썩한 페스티벌이 열릴 예정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페스티벌 현장의 흥분을 미처 가라앉히지 못한 이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어폰으로 대리만족할 이들을 위한 영화 여섯 편을 준비했다.
<테이킹 우드스탁>
(Taking Woodstock, 2009)
록 페스티벌 시즌에 맞춘 기사인 만큼, 세상 모든 록 페스티벌의 시초인 '우드스탁'을 다룬 영화부터. <테이킹 우드스탁>은 실제로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기획한 엘리엇 타이버의 자전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1969년, 부모의 망해가는 모텔 사업을 돕기 위해 고향으로 온 엘리엇(디미트리 마틴)은 이웃 동네에서 록 페스티벌이 취소됐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를 통해 돈을 벌 수 있겠다고 판단한 그는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온갖 우여곡절 끝에 페스티벌을 유치한다.
<테이킹 우드스탁>의 감독 이안은 '록'보다는 '페스티벌'에 방점을 둔 것처럼 보인다.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우드스탁을 만드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에서 음악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1969년 당시에 촬영된 푸티지 영상들을 적극 활용하되, 무대 위에 선 뮤지션의 이미지는 제외됐다. <테이킹 우드스탁>은 페스티벌을 기획하며 주인공 엘리엇이 깨닫는 '자유'의 가치를 보여주는 데에 공을 들인다. 음악을 통한 '사회'의 변혁보다는 엘리엇의 '가족'과 '고향'의 성숙에 집중하기 때문에, 록 페스티벌을 다룬 영화 특유의 흥분을 기대한 관객들에겐 다소 밋밋할 수도 있겠다.
<스쿨 오브 락>
(School of Rock, 2003)
잭 블랙은 유능한 배우인 동시에 테네이셔스 D라는 록 밴드의 보컬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2000)에서 레코드가게 직원 베리를 연기하며 자신의 얼굴을 확실히 알렸다. 그의 대표작 <스쿨 오브 락>은 뚱뚱하고 촌스러운 외모 때문에 밴드에서 쫓겨난 듀이(잭 블랙)가 급전이 필요해 친구의 이름을 사칭해 사립초등학교 교사로 취직해, 아이들에게 록 음악을 연습시키는 이야기다.
<스쿨 오브 락>은 말끔한 유머로 가득하다. 위장 취업을 했어도 수업 시간에 뻔뻔하게 아이들에게 록 음악을 가르치는 잭 블랙의 오도방정은 볼수록 귀엽다. 아이들 또한 각자 캐릭터가 선명히 살아 있어, 잭 블랙의 원맨쇼를 적절히 뒷받침한다. 마치 보컬 뒤에 선 연주자들처럼 말이다. 록에 대한 애정이 크면 클수록 <스쿨 오브 락>에 대한 재미는 불어난다.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짜고짜 록 밴드의 이름을 읊고 급기야 록의 역사를 강의하는 대목은 '록 덕후'들을 위한 강력한 떡밥이다. 듀이와 아이들이 레드 제플린의 'Dazed and Confused'를 빵빵하게 틀어놓고 학교로 향할 때, 환호성을 지른 건 에디터뿐만은 아닐 것이다.
<올모스트 페이머스>
(Almost Famous, 2000)
전작 <금지된 사랑>(1989)과 <클럽 싱글즈>(1992)로 음악과 로맨스를 접목하는 귀한 재능을 선보인 카메론 크로우는, '음악영화'와 '하이틴 로맨스'의걸작 <올모스트 페이머스>를 만들었다. 이 작품을 보며 "아, 부러워..."하며 중얼거렸다면 당신이 필히 ‘록 키드’가 였을 것이다. 감독 카메론 크로우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올모스트 페이머스>는 록 키드가 꿈꿀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 담긴 영화다.
1973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15살 윌리엄(패트릭 후짓)은 홀로 방안에서 록 음악과 벗하며 사춘기를 지난다. 저명한 음악 잡지 <롤링 스톤>의 편집장 레스터 뱅스(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와 친해진 윌리엄은 (무려!) 블랙 사바스를 인터뷰 할 기회를 갖게 되고, 블랙 사바스의 무대 뒤편에서 신인 그룹 스틸워터를 만나 그들의 투어에 따라나선다.
록 뮤지션의 일상에 밀착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영화는 끝내 서늘한 결말로 맺어지는 경우가 많다. 록 스타의 예민하고 방탕한 삶이 대개 파멸을 향하(고 그런 이들의 사연이 더 많은 드라마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모스트 페이머스>는 2시간 42분(감독판 기준) 동안 따스한 공기를 잃지 않는다. 이 온기는 다름 아닌 로맨스에서 비롯된다. 동경하던 록의 현장에 속한다는 것만으로도 벅찬 와중, 윌리엄은 로커 페니 레인(케이트 허드슨)과 사랑에 빠진다. 절대적인 아름다움과 그것을 해칠 것만 같은 위태로움을 동시에 지닌 그녀는 '첫사랑'에게 품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독차지할 만한 존재다.
<벨벳 골드마인>
(Velvet Goldmine, 1998)
아래의 이미지는 <벨벳 골드마인>의 스틸컷이다. 어디 하나 화려하지 않은 구석이 없는 자태에서 올해 초 우리 곁을 떠난 데이빗 보위를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70년대 글램록 신을 탐미적인 이미지로 담아낸 영화 <벨벳 골드마인>의 주인공 브라이언 슬레이드(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는 전적으로 보위의 삶을 모델로 삼은 캐릭터다. 시대별로 각기 다른 이미지를 내세워 팔색조의 매력을 선보인 점은 물론, 결코 범상치 않았던 일상마저도 그와 꼭 닮았다. 영화 제목 'Velvet Goldmine' 역시 보위의 노래에서 따왔다. 브라이언 슬레이드의 행적에서 보위뿐만 아니라 티렉스의 마크 볼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루 리드 등 당시에 활동하던 록 스타의 이미지를 발견하는 건 <벨벳 골드마인>의 또 다른 재미다.
하지만 <벨벳 골드마인>에서 데이빗 보위의 노래를 만날 수 없다. 보위가 동성애 관계, 위태로운 사생활 등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며 이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영화를 탐탁지 않아 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커트 와일드(이완 맥그리거)의 원전인 이기 팝을 포함한 수많은 아티스트들은 사운드트랙에 적극 참여했다. 루 리드, 브라이언 이노, 티렉스, 록시 뮤직의 오리지널 트랙들이 담긴 사운드트랙은 (톰 요크, 조니 그린우드, 버나드 버틀러 등이 합세한 프로젝트 밴드) 비너스 인 퍼스와 플라시보가 커버한 명곡들까지 알차게 구성돼 있다. <벨벳 골드마인>을 연출한 토드 헤인즈는 9년 후 밥 딜런의 일대기를 실험적인 형식으로 담은 <아임 낫 데어>(2007)를 발표한 바 있다.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
(This is Spinal Tap, 1984)
"여태껏 만들어진 로큰롤에 관한 가장 웃긴 영화"는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의 거의 모든 포스터마다 큼직하게 붙는 카피다. 이 문구는 엄연히 진실이다. 히트작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 <미저리>(1990),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1993) 등을 줄줄이 내놓은 로브 라이너의 연출 데뷔작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는 헤비메탈 밴드 스파이널 탭의 미국투어 여정을 찍은 '페이크(fake) 다큐멘터리'다. 스파이널 탭은 가상의 밴드고, 이들의 여정 역시 모두 연출된 것이다. 이 작품은 요즘은 공포영화의 컨벤션으로 자리잡은 페이크 다큐멘터리 혹은 모큐멘터리(mockumentary)의 불씨를 당긴 작품으로 회자된다.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는 60년대 결성돼 포크록과 사이키델릭록을 거쳐 헤비메탈에 이른 스파이널 탭을 따라간다. 이들의 미국 투어는 거창하게 나름 계획됐지만, 밴드의 처지처럼, 점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굴러떨어진다. 티켓이 팔리지 않아 공연은 취소되기 일쑤고, 초라한 장소에서 공연하는 일도 벌어진다. 이들이 무대에서 난처해질수록 영화는 점점 더 우스워진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준비된 장비들은 말썽만 일으키고, 18피트로 대형 구조물로 계획된 고인돌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18인치 짜리 돌멩이로 무대에 올라간다. 그렇게 폭소는 쓴웃음으로 바뀐다.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는 과거의 영광에 허우적대는 얼뜨기에 대한 애정 가득한 기록, 쇼 비즈니스에 대한 비판으로 봐도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스파이널 탭은 실제로 3개의 앨범을 발표한 바 있다.
<더 레슬러>
(The Wrestler, 2008)
레슬링은 왕년엔 지구적인 사랑을 누렸지만 이제는 철저히 추억 속 이름으로만 남겨진 신세가 됐다. <더 레슬러>는 한때 전설의 레슬러였지만 지금은 근근이 그 명맥만을 이어가고 있는 레슬러 랜디(미키 루크)의 삶을 쫓아간다. 단 한시도 그의 뒤를 놓치지 않는 영화는 랜디의 비참한 생활과 고단한 육체를 지독하리만큼 밀착해 담아낸다. 영화 속 레슬링처럼, 80년대 화려한 전성기를 보내고 점점 설곳을 잃었던 배우 미키 루크가 주인공 랜디를 연기했다.
록 페스티벌과 함께 권하는 영화 리스트에 <더 레슬러>가 떡 하니 등장해 의아해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잊혀진 80년대'에 바쳐지는 영화 <더 레슬러>의 또 다른 주인공은 '헤비메탈'이기에 과감히 포함시켰다. "80년대 음악이 최고였지!" 하며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 하는 영화 속 인물들을 지켜보는 <더 레슬러>는, 그들의 말에 공명하듯 러닝타임 내내 80년대 헤비메탈 음악을 배치했다. 클린트 만셀의 오리지널 스코어가 무색할 정도로 <더 레슬러>의 분위기를 장악하는 헤비메탈 트랙들은, 이 음악들을 듣고 자란 관객층의 향수를 대번에 자극한다. 콰이어트 라이엇, 신데렐라, 랫, 스콜피온스, 건스 앤 로지스 등의 명곡들은 랜디의 처절한 몸부림과 조응하며 뜨거운 눈물을 끌어내는 데에 일조한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