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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유쾌한 일본종합절망세트 〈파문〉

씨네플레이
〈파문〉
〈파문〉


낯선 나라로 떠나, 역시 이곳이 낯선 어떤 이와 시나몬 롤을 나누고 싶다(<카모메 식당>(2006)). 훌쩍 떠난 해변 마을에서 뜻 모를 체조를 하다 천천히 익힌 팥을 한 스푼 크게 베어 무는 것도 좋겠지(<안경>(2007)). 낯선 곳에서 찾는 영혼의 안식.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전매특허인 '치유의 판타지'를 기대했던 관객들이라면 신작 <파문>(2023)은 조금 낯설 것이다. 성차별, 재해, 간병, 신흥종교, 장애인 차별, 고립 등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차례차례 농락당하는 가족의 모습은 현대 사회가 품고 있는 어둠과 불안의 축소판이다. 사실 '힐링계' 영화감독으로만 남길 거부했던 오기가미 나오코는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2017)와 <강변의 무코리타>(2021)로 한발 한발 진지한 리얼리즘의 세계로 진입해왔던 참이다. 감독은 일본 사회가 가진 문제를 영화 곳곳에 배치하더니 음지에서 배척받는 이들을 영화 전면에 내세웠다. 싫어하는 세계를 떠남으로써 위안을 주던 주인공들은 이제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해 용기를 준다. 영화 <파문>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모두가 떠난 자리를 지키던 한 여성이 진정한 자신과의 대면이라는 경이의 순간에 도달한다. 불화와 불온의 파문만이 일던 인생이지만 회복하기로 결심하자 전에 없는 적극성으로 이 여성은 자신의 삶을 거머쥔다.


〈파문〉
〈파문〉

 

잘 가꿔진 정원을 가진 단독주택. 단란한 세 가족. 오늘도 '평범한 중산층'이라는 기만 아래 아내 요리코(츠츠이 마리코)의 말 못 할 스트레스는 쌓여만 간다. 소파에 누워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는 철부지 아들, 아버지 간호를 아내에게 떠넘긴 남편, 병상에 누워 수발을 받으며 수시로 며느리 몸에 손을 대는 시아버지. 게다가 마트에서 물 하나 사기도 이제 쉽지 않다. 동일본 대지진에 의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직후, 인당 2병만 구매 가능한 생수를 구하느라 요리코는 개점부터 전쟁을 치른다. 이 전쟁은 가족을 위한 것이다. 할당량을 챙긴 요리코는 남편 오사무(미츠이시 켄)와 아들 타쿠야(이소무라 하야토)에게 방사능에 오염됐을지 모를 수돗물은 마시지 말라고, 빗물에도 맞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며 생수를 건넨다. 병든 시아버지의 죽을 수돗물로 만드는 것은 비밀이다. 이런 소소한 복수마저 없다면 요리코는 살아갈 수 없으니.


〈파문〉
〈파문〉

그러던 어느 날, 식사 준비를 마친 요리코는 아들에게 아빠를 불러오라 하지만 정원에서 물을 주던 남편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방사능 유출 사건으로 일본이 떠들썩해진 틈을 타 한순간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수년의 시간이 흐른 뒤 요리코의 모습은 평안해 보인다. 시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대학을 마친 아들은 먼 규슈에서 직장인이 되었다. 네 식구가 살던 집에 홀로 남겨졌지만 외롭지는 않다. '녹명회'가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 지키던 집은 이제 ‘녹명수’라는 라벨이 붙은 물병이 가득하고, 제단에는 커다란 유리구슬과 물병이 놓여 있다. 영혼을 정화시켜 준다는 물을 숭배하는 사이비 종교 '녹명회'에 빠진 요리코는 종교의 가르침과 주기적인 신자 모임에 의지해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 중이다. 매일 모래로 된 마당에 물결무늬를 만들어 정리하는 일도 평정심 유지를 위해 빼놓지 않는 루틴이다. 동네 마트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생활을 꾸려나가는 안온한 일상이 영원처럼 이어질 것 같던 어느 날, 요리코는 집 맞은편에 숨어 자신을 바라보는 수상쩍은 중년 남자를 발견한다.


〈파문〉
〈파문〉

남루한 행색의 남자는 다름 아닌 실종됐던 남편이었다. 뻔뻔한 이 남자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며 길지 않은 여생을 함께 보내고 싶다 간청한다. 이 와중에 아들은 청각장애 여자친구를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고, 아르바이트하는 마트에선 예의 없는 손님이 대거리를 해댄다. 요리코는 어떻게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을까. 솟아오르는 악감정을 종교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눌러보지만, 이미 거액의 돈을 뜯어낸 것도 모자라 특별 한정판 녹명수까지 권하는 사이비 종교가 그를 구원할리 만무하다. 가족들은 생명수가 사이비 종교의 사기라고 코웃음치지만 정작 요리코를 파괴하는 것은 가족이다.


〈파문〉
〈파문〉

여전한 휴머니즘과 한층 짙어진 블랙 유머를 담았지만 <파문>은 본질적으로 어둡다. 먼저 영화의 저변에는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가 깔려있다. 감독은 "일본은 전 세계 성차별 지수 146개국 가운데 116위를 차지한 나라다. 우리는 남성 중심 사회에 남아 있다. 많은 가정에서 남자들은 밖에서 일하고 여자들은 집을 지키는 오래된 전통을 지키고 있다”라고 말하며 “일본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은 숨 막히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뭔가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영화를 만들었다"고 영화 제작 계기를 전했다. 감독은 성차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한 여성이 가부장제에 신음하다 현실 도피처로 사이비 종교를 택하는 과정과 경제적, 정신적으로 자립하며 삶의 활력을 되찾는 회복의 여정을 블랙 유머에 실어 전했다.


〈파문〉
〈파문〉

<파문>은 또한 일본인에게 큰 의미를 지닌 동일본대지진과 원자력 발전 사고가 야기한,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뒤틀려 버린 것 같은 세월을 기묘하고 예리하게 엮어간다. 감독은 "나는 아이가 있기 때문에 아직도 수돗물을 쓰지 않고 생수를 사용한다. 아베 총리 시절에 도쿄 올림픽이 열렸는데 그때 방사능을 잘 통제하고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걸 들으면서 ‘웃기지 마’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하며 "1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선 과거를 망각하지 않도록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보고자 했다"라고 창작의 이유를 전했다. 재난 상황의 전시보다는 재난 발생 이후 인물들의 대처 방식에 주목하며 그 속에서 연대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도 감독은 잊지 않았다. 혈연이 아님에도 가족처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감독의 다른 영화처럼 <파문>에도 등장하는데 요리코는 미즈키(키노 하나)와 나이를 뛰어넘는 특별한 우정으로 재난의 고통과 슬픔을 나누며 서로를 다독인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인생 최고의 각본"이자 "내 안의 심술궂고 사악한 면을 모두 투영한 것 같은 영화"라고 자평했다. 블랙 유머에 담긴 '일본절망종합세트'를 즐기고 싶다면 지금 극장을 찾자. 1월 15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