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최신작 <팬텀 스레드>가 개봉했다. 사랑에 빠진, 우아하면서도 나약한 드레스 디자이너를 연기하는 그의 '경지'를 본다는 건 그저 황홀하다. 다만 이것이 지난해 6월 은퇴를 선언한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걸 떠올리면 한없이 아쉬움이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안녕을 보내며, 한편 이 예민한 예술가의 '변덕'을 내심 기대하며, 그의 커리어를 일대기순으로 정리했다.

팬텀 스레드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출연 다니엘 데이 루이스, 빅키 크리엡스

개봉 2017 미국

상세보기

다니엘 마이클 블레이크 데이 루이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1957년 4월 29일 영국에서 태어났다. 풀네임은 다니엘 마이클 블레이크 데이 루이스. 예능에 조예가 깊은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영국의 계관시인(영국 왕실이 영국의 가장 명예로운 시인에게 내리는 칭호) 세실 데이 루이스, 어머니는 배우 질 발콘이다. 외할아버지 마이클 발콘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초기 걸작 <사보타주>, <39계단> 등을 제작한 영국 영화 산업의 거물이었고, 누나 타마신은 영국 내 인지도가 상당한 음식평론가가 됐다.


왕따를 면하려다 연기의 맛을 알게 되다

데이 루이스가 어릴 적 그리니치에서 살았던 집은 '계관시인 세실 데이 루이스의 집'으로 영국 유산에 지정됐다.

켄싱턴에서 태어나 그리니치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유대계와 상류층이라는 이유로 런던 남부 아이들과 부딪히는 경우가 많아, 그들의 악센트와 습관을 따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모사의 경험이 연기에 대해 처음 흥미를 갖게 된 계기가 됐다고 한다.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는 등 자잘한 범죄를 저지르는 문제아로 자라는 걸 염려해 부모는 그를 켄트의 기숙학교로 보냈다. 목공, 연기, 낚시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긴 했으나, 2년 만에 누나가 다니던 햄프셔의 비데일즈 스쿨로 전학했다.


우연히 출연한 첫 영화

사랑의 여로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첫 영화는 존 슐레진저의 1971년작 <사랑의 여로>(원제: Sunday Bloody Sunday)다. 병으로 비싼 자동차를 긁고 다니는 아이로 짤막하게 등장한다. 데이 루이스가 햄프셔에 살던 때였다. 과일장수가 동네 불량배들을 불러모았고 제일 껄렁해 보이는 애들이 차 긁는 역할을 맡았다고. 크레딧에도 오르지 못하는 엑스트라였지만 데이 루이스는 이때를 '천국'으로 기억한다.


배우 →  가구공 배우

비데일즈를 졸업할 무렵, 국립 유소년 극단의 일원으로서 두각을 보이는 등 연기에 대한 애착이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대생활의 더러운 면면들을 보고는 가구공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경험 미달로 견습직에 낙방했고, 극단 '브리스톨 올드 빅'이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가 결국 정식 단원이 됐다. 25살이 되던 해인 1979년 처음 무대에 올랐고, TV와 연극을 병행하며 열심히 경력을 쌓았다.

브리스톨 올드 빅 단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11년 만에 찍은 두 번째 영화

간디 / 바운티호의 반란

본격적인 연기를 시작한 이후 처음 출연한 영화는 1982년작 <간디>다. 간디(벤 킹슬리)와 그의 동료 선교사 찰리를 모욕하는 남자로 1분가량 등장한다. 다음 작품은 2년 후 <바운티호의 반란>(The Bounty). 18세기 영국의 역사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에서 데이 루이스는 바운티호의 함장 블라이(안소니 홉킨스)의 명령으로 강등 당하는 항해장 존 프라이어를 연기했다. 주연 안소니 홉킨스와 멜 깁슨에 비해 작은 역할이긴 했지만, 처음으로 '조연'으로 부를 수 있을 만한 비중의 캐릭터였다.


상반된 캐릭터로 주목받다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는 데이 루이스의 첫 주연작이다. 마가렛 대처 집권 시절, 영국에서 방황하는 파키스탄 출신의 좌파 지식 오마르와 사랑에 빠지는 어릴 적 친구 조니를 연기했다. 조연으로 참여한 <전망 좋은 방>에서는 과묵하고 진지한 시골 청년 조지와 함께 주인공 루시(헬레나 본햄 카터)에게 구혼하는 세실 역을 맡았다. 두 영화는 1986년 3월 7일 같은 날 뉴욕에서 개봉했다. 조니가 껄렁해보일지언정 마음은 순수하기 그지없는 하층민 게이였다면, 세실은 여유로워 보여도 다분히 속물적인 상류층 헤테로다. 서로 정반대 같은 인물들인 셈. 당시 미국의 영화평론가들은 한 신인배우가 상반된 두 사내를 소화했다는 점을 극찬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전설이 그렇게 시작됐다.

전망 좋은 방

오스카를 품에 안다

프라하의 봄 / 정열과 사랑

출세작 이후 1988년 발표된 <프라하의 봄>과 <정열과 사랑>에서는 다소 가벼운 모습의 데이 루이스를 만날 수 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로 옮긴 <프라하의 봄>에서는 자유분방한 태도로 쾌락에 탐닉하는 바람둥이 의사 토마스를 연기했고, <정열과 사랑>에서는 르누아르의 희귀작을 구입하기 위해 미국 남부를 여행하는 영국 미술상으로 분해 영화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노골적인 코미디 연기를 선보였다. 다만 그의 연기에 대한 반응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나의 왼발

하지만 이듬해 굉장한 작품이 도착했다. 짐 셰리던 감독과 함께한 첫 작품 <나의 왼발>이다. 뇌성마비를 앓아 왼발만을 움직이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 크리스티 브라운 역을 맡아 훗날 그의 상징이 된 '메소드 연기'를 쏟아냈다. 인물을 구현하기 위한 지독한 접근법이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 데이 루이스는 크리스티 브라운의 육체를 보여주기 위해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오랫동안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식사 때도 스태프들이 직접 그에게 밥을 떠먹여줬다고 한다. 노력은 고스란히 결과로 드러났다. 크리스티 브라운의 고통과 의지를 고스란히 그려낸 명연에 전 세계가 열광했고, 1990년 데이 루이스는 생애 처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의 수상 이후 <행운의 반전>의 제레미 아이언스, <양들의 침묵>의 안소니 홉킨스까지 영국 배우가 3년 연속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Daniel Day-Lewis Wins Best Actor: 1990 Oscars

원주민 대장이 되기 위한 준비

라스트 모히칸

<나의 왼발>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는 꽤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 그리고 1992년 첫 할리우드 진출작 <라스트 모히칸>으로 돌아왔다. 아메리카 대륙을 놓고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격렬해지던 18세기 중엽을 그린 시대극에서 데이 루이스는 사랑하는 여인과 모히칸족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다니엘로 변신했다. 그렇다. 3년의 공백은 나다니엘의 캐릭터를 갈고닦기 위한 시간이었던 것. 데이 루이스는 미군 훈련 센터에서 사격과 백병전의 기술을 습득했고, 촬영 시작 수개월 전부터 촬영지에 도착해 직접 카누를 만들고 사냥을 하는 등 당시 원주민처럼 생활했다. 자기가 사냥한 것만 먹었다는 소문도 있다. 그는 훗날 거의 모든 신을 20회 이상 찍었던 <라스트 모히칸>의 고된 촬영으로 인해 폐소공포증과 환각을 경험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살짝 물러서도 여전히 빛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 순수의 시대

<라스트 모히칸> 이후 데이 루이스가 90년대에 작업한 영화는 <순수의 시대>, <아버지의 이름으로>, <크루서블>, <더 복서> 딱 4편이다. <나의 왼발>이나 <라스트 모히칸>과 달리, 데이 루이스의 존재가 거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이 네 영화에선 배우의 아우라보다는 '결백을 향한 의지', '거짓된 관계의 망설임', '마녀사냥의 살풍경' 등 영화 자체의 테마가 더 먼저 다가왔다.

그럼에도 캐릭터 구축을 향한 그의 노력은 여전히 지독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촬영 기간 내내 북아일랜드 악센트를 사용한 건 물론, 13kg을 감량했고 실제 감옥에서 밤을 보낸 적도 많았다. <순수의 시대>의 뉴랜드 아처가 입었을 법한 복장을 하고 플라자 호텔에 'N. 아처'라는 이름으로 2주간 묵었다는 건 차라리 귀엽게 들리는 일화다. 악마 의식을 거행하는 10대 소녀와 간음을 저지르는 <크루서블> 속 농부의 꼬질꼬질한 모습은 촬영 기간 단 한번도 목욕과 샤워를 하지 않은 성과(?)다. 권투를 소재 삼아 아일랜드/영국 간 갈등을 보여준 <더 복서>에서 권투선수를 연기하고자 아일랜드 선수 배리 맥기건에게 1년 넘게 트레이닝을 받았다.

크루서블 / 더 복서

다시, 5년 만에 복귀

갱스 오브 뉴욕

또 다시 데이 루이스의 필모그래피는 멈췄다. 오랜 협업자 짐 셰리던과의 마지막 작품 <더 복서> 이후 5년 동안 신작이 없었다. 치열한 90년대를 지나왔으니 오랜 휴식을 취한 것 아니냐고? 글쎄. 그 시기에 데이 루이스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구두공으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갱스 오브 뉴욕>의 절대 악당 뉴욕 갱의 우두머리 '도살자 빌' 역을 제안하기 위해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 마틴 스콜세지 감독,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합세해 그를 설득했다. 결국 영화 현장으로 돌아왔다.

빌은 도살자다. 데이 루이스는 당연히 푸줏간 일을 배웠다. 휴식 시간엔 푸줏간용 칼을 갈았다. 빌의 의안은 자기 안구에 인공유리를 부착해 만든 것이다.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만큼 그 당시 사람들이 입던 얇고 낡은 코트만 착용했다. 스콜세지 감독이 시인 월트 휘트먼의 음성을 들으며 연구한 19세기 뉴욕 악센트를 데이 루이스가 촬영 내내 구사했다는 건 예삿일처럼 느껴질 정도다. 5년이 흘러 21세기가 됐어도, 그는 여전히 그였던 것이다. 빌 특유의 너저분하고 기름진 머리를 유지하던 데이 루이스는 촬영이 끝나자마자 제 손으로 머리를 완전히 밀어버렸다고.


아내 레베카 밀러와의 협업

발라드 오브 잭 앤 로즈

한국에서 개봉하지 않았지만 데이 루이스의 필모그래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화가 있다. 그의 아내 레베카 밀러가 연출한 <발라드 오브 잭 앤 로즈>다. 영국의 전설적인 극작가 아서 밀러의 딸인 레베카 밀러와 데이 루이스는 아서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크루서블> 현장에서 처음 만나 바로 그해 부부가 됐다. 배우로도 활동한 레베카 밀러는 <안젤라>, <퍼스널 벨로시티> 등 감독작으로도 명성을 쌓았고, 2005년작 <발라드 오브 잭 앤 로즈>에 남편 데이 루이스를 기용해, 외딴 섬에서 16살 딸과 함께 자연친화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남자의 삶을 그렸다.

부부가 함께 작업한 영화지만 제작 당시 그들은 오히려 떨어져 있었다. 외부와 격리해 살아가는 주인공 잭의 상황에 몰입하기 위해 아내, 자식들과 떨어져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서 혼자 살았다. 훗날 <데어 윌 비 블러드>와 <팬텀 스레드>를 함께 하는 폴 토마스 앤더슨은 데이 루이스의 최고 연기로 <발라드 오브 잭 앤 로즈>를 꼽았다.

<발라드 오브 잭 앤 로즈> 현장의 레베카 밀러와 다니엘 데이 루이스

괴물

데어 윌 비 블러드

마틴 스콜세지의 <갱스 오브 뉴욕>에 이어 또 다른 거장 폴 토마스 앤더슨과 한 첫 협업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도 데이 루이스는 미국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을 연기했다. 알코올에 절어 사는 무일푼 광부였다가 석유 유전을 발굴해 일확천금을 누리게 된 다니엘 플레인뷰 역이다. 데이 루이스가 출연하지 않으면 제작 자체가 무산됐을 정도로 그의 캐스팅 여부는 절대적인 것이었는데, 평소 앤더슨의 <펀치 드렁크 러브> 팬이었던 그는 흔쾌히 역할을 받아들였다. 데이 루이스와 앤더슨은, 돈을 위해서라면 아들의 목숨까지도 눈 감을 수 있는 자본주의의 괴물 다니엘 플레인뷰를 창조했다. 러닝타임 158분의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데이 루이스는 단 두 대목을 제외한 모든 신에 등장한다.

<데어 윌 비 블러드>에 관련해선 데이 루이스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지독함이 더 많이 회자된다. 앤더슨은 촬영 전날 매일 밤 존 휴스턴의 <시에라 마드레의 황금>을 돌려봤고, 1년 꼬박 캐릭터를 준비하던 데이 루이스에게 존 휴스턴에 관한 다큐멘터리들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편집을 진행하던 시기에는 매일 수요일 저녁 식사로 스테이크와 희석시키지 않은 보드카만 먹으면서 다니엘 플레인뷰의 멘탈을 유지했다고 한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데이 루이스에게 두 번째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안겼다. 그는 전해에 엘리자베스 2세를 연기한 <더 퀸>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헬렌 미렌에게 오스카 트로피를 받으며 기사 작위 수여 흉내를 냈다. 2014년, 데이 루이스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미국의 상징을 연기하다

링컨

마리옹 꼬띠아르, 니콜 키드먼, 페넬로페 크루즈 등 여성 배우들이 대거 포진된 뮤지컬 영화 <나인> 이후, 데이 루이스는 스필버그와 <링컨>을 차기작으로 택했다. 미국 대중영화의 상징이라 할 만한 스티븐 스필버그는 링컨의 삶을 영화로 옮기는 작업을 일생의 야심작으로 여겼고, 일찌감치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링컨을 연기해주길 바랐다. 그가 역할을 수락하지 않으면 영화화를 포기하려 했었다. 2003년, 남북전쟁 시절에 집중한 시나리오를 읽은 데이 루이스는 제안을 고사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자 19세기 가장 훌륭한 위인에 대한 기억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너무도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일이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스필버그는 물론 (<갱스 오브 뉴욕>을 같이 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까지 설득에 나섰다. 데이 루이스는 <권력의 조건>을 부분 원작으로 한 <링컨>의 시나리오를 읽고서 비로소 링컨 역을 받아들였다.

데이 루이스는 100여 권의 링컨 관련 서적들을 읽고, 링컨의 집과 사무실을 방문해 그의 삶에 몰입해갔다. 그가 미국 일리노이, 인디애나, 켄터키 지역의 억양이 뒤섞인 링컨의 목소리에 집중하게끔 <링컨> 현장의 영국 출신 배우들은 영국 악센트로 말하는 걸 금지당했다. 스필버그를 비롯한 모든 스태프들은 촬영 내내 말쑥한 수트 차림을 유지한 데이 루이스를 "Mr. President"라고 불렀다. 그렇게 75만명이 목숨을 잃은 남북전쟁의 말미, 더한 죽음을 감수하고서라도 노예제 폐지를 고집했던 말년의 링컨이 품었던 고뇌가 데이 루이스의 육체를 통해 재현됐다. 영화 속 링컨은, 뛰어난 정치인이자 가족에겐 한없이 약한 남편/아버지였던 '인간' 링컨 그 자체처럼 보였다. 이 위대한 경지에 갈채가 쏟아지는 건 당연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단골손님 메릴 스트립에게서 생애 세 번째 오스카를 건네받았다. 그는 아카데미 역사상 남우주연상을 세 번 받은 유일한 배우다.

메릴 스트립과 다니엘 데이 루이스

아마도, 마지막 작품
<팬텀 스레드>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폴 토마스 앤더슨이 <팬텀 스레드>로 다시 만났다. <데어 윌 비 블러드> 이후 10년 만이다. 1950년대 런던, 명성이 자자한 드레스 디자이너 레이놀즈 우드콕을 연기했다. 전 세계 영화 팬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사이, 데이 루이스가 은퇴를 선언했다. 세상에 영화 21편만을 남긴 60세 명배우의 돌연한 퇴장은 미처 상상치 못한 것이었다. 발표 당시엔 이유를 밝히지 않았지만, 나중 인터뷰에서 "살아오면서, 어떻게 연기를 끝내야 할지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지금은 다른 것인가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연기를 그만두겠다는 충동은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렸다. 해야만 하는 것이 됐다"고 말했다. 모호하게 들리지만 그로선 최선의 해명일 터. 조금 늦게 완벽한 뮤즈를 만나 사랑과 자신을 되새기며 변모하는 한 예술가의 기묘한 로맨스 <팬텀 스레드>를 뜯어보며 그에게 찾아온 '충동'이 무엇이었는지 가만히 상상해볼 수밖에.


마지막으로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제안했지만 결국 성사되지 않은 캐릭터들을 모아봤다. 스스로 배역을 원했던 <펄프픽션>을 제외하고, 모두 그가 거절한 작품들이다. 그것들이 해당 배우의 최고 캐릭터로 손꼽힌다는 게 또 흥미롭다.

<시드와 낸시> 게리 올드만 / <필라델피아> 톰 행크스 / <펄프 픽션> 존 트라볼타
<세인트> 발 킬머 / <잉글리쉬 페이션트> 레이프 파인스 / <메리 라일리> 존 말코비치
<반지의 제왕> 비고 모텐슨 / <솔라리스> 조지 클루니 /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 샘 워싱턴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