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썸머'와 사귄 적이 있다
vs
사랑은 그렇게 다시 기억된다
인생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것. 놓칠 수 없는 기회입니다. 지난 7월 19일, 로맨스 영화의 레전드 오브 레전드 <500일의 썸머>가 재개봉 20일 만에 13만 9000명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개봉 당시 관객 기록(13만 7500)을 돌파했죠. 개봉 당시의 관객 수를 넘어선 건 지난 해 11월 재개봉한 <이터널 선샤인> 이후 두 번째 기록입니다. 이로써 <500일의 썸머>는 역대 재개봉영화 흥행 2위로 올라섰죠.
재미있는 점은 두 영화 모두 개봉 당시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극장에서 내려온 후,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의 인생영화로 선정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죠. 재개봉 흥행으로 만인의 인생영화 강제 인증한 <500일의 썸머>와 <이터널 선샤인>. 연인이 만나고 헤어지는 수많은 로맨스 영화들 중 이 두 영화가 독보적으로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번 보고 두 번 봐도 또 보고 싶은 두 영화의 매력,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자고요.
500일의 썸머(2009)
<500일의 썸머>는 우리에게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로 친근한 마크 웹 감독의 작품입니다. 마크 웹 감독이 뮤직비디오 감독이었던 사실, 알고 계신가요? 이 영화는 그의 데뷔작입니다. 자신만의 색을 살려 독특한 연출을 선보였죠. 연애 처음 해보세요? 무한공감 이끌어내는 톰 역에는 우리들의 조토끼, 조셉 고든 래빗이 열연했고요. 보면 볼수록 빠져든다! 볼매녀 썸머는 주디 디샤넬이 연기했습니다. 두 배우는 오래 전부터 친구 사이였다고 하네요. 어쩐지 장난이라곤 1도 없었던 두 사람의 케미!
이터널 선샤인(2004)
<이터널 선샤인>은 58회 아카데미 시상식, 77회 오스카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받았습니다. 영화 좀 본 사람이라면 이름만으로도 익숙한 미셸 공드리와 찰리 카우프만이 손을 잡았죠. 대중에게 코믹한 이미지로 익숙하지만, 이 영화 한 편에 진지한 매력남으로 거듭난 짐 캐리가 기억을 삭제하는 남자 조엘을 연기합니다. 영화 속 머리색만큼이나 오묘한 매력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클레멘타인은 케이트 윈슬렛이 연기했죠.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
<500일의 썸머>에서 톰의 깨방정을 보고 있자면 박수 짝짝 공감을 안 할 수 없습니다. 썸머와의 나홀로연애를 시작한 톰. 22일째 되던 날,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합니다. “깨졌어”. ‘읭...?’, ‘왓....?’ 표정으로 톰을 바라보는 친구들. “너 도대체 왜 그래?” 묻지만 톰은 이미 영혼 탈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습니다. 세상에마상에, 영화 보신 분들, ‘나도 저런 적 있었지!’ 톰한테 완전 공감했으면서 공감 1도 안한 척 한 거 다 알아요. 사무실에서 스미스 노래를 크게 틀어놓는다거나, 밑도 끝도 없는 이상한 멘트를 던진다거나. <500일의 썸머>는 연애를 시작하는(시작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동 고개 끄덕끄덕할 영화입니다. 짝사랑 마니아에게도 추천해요. 누가 내 모습 보고 있는 거 아니지? 자동으로 주위를 둘러보게 되거든요(제가 그랬다는 건 아닙니다).
사랑을 끝내고 싶은 연인
<이터널 선샤인>은 다른 성격의 공감을 불러냅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에게 완전히 질려버린 커플입니다. 두 사람은 이별 후, 홧김에 서로의 기억을 지워버리기에 이르죠. 영화는 조엘이 기억하는 클레멘타인의 모습을 나열하며 두 사람의 관계를 그려냅니다. 서로에게 희미해져 가는 두 사람. 결국 조엘은 기억을 지우는 과정에서 “이 기억만은 남겨주세요”라고 외치며 절규하게 되죠. 누군가와의 ‘이 기억’이 있다면 괜히 마음이 찡해지는 영화입니다. 모든 것을 소진했다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이끌리는 마음. 연애해본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감정이죠?
현실적인 연애
<500일의 썸머>는 여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 쿨하고 쿨해도 이렇게 쿨할 수 있을까요? ‘순간을 즐기며 살아야죠’, ‘상처 입는데 왜 굳이 연애를 해야 해?’, 구속 엑스 엑스 외치는 확고한 썸머의 연애관. 그에 비해 톰은 '운명'의 상대만 고이고이 기다리는, ‘운명론적 연애관’을 지닌 남자입니다. 이 소스만 가지고도 열정 토론! 가능하죠. 두 시간은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주변에 이런 사람 너무 많거든요! 나는 썸머, 나는 톰, 영화가 전개되는 내내 관객은 주인공들에게 푹 이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연애 끝판왕’이란 영예로운 수식어를 지닐 자격이 충분한 영화죠.
조금은 환상적인
겨울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그에 비해 ‘현실’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영화입니다. 기억을 지워준다는 ‘라쿠나 사’의 설정이 이들의 연애에 판타지적 프레임을 씌우죠. 이들의 재회 또한 아주 현실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헤어진 커플들이 한번쯤은 떠올릴 운명적 만남에 가깝죠.
포스터만 봐도 시원한 영화 <500일의 썸머>와 떠올리기만 해도 애잔해지는 <이터널 선샤인>의 공통점이 있다면 남주인공의 기억을 쫓아 영화가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도 차이는 존재하죠. <500일의 썸머>의 톰은 불쑥불쑥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썸머의 모습을 쫓아가며 자신의 연애를 되돌아봅니다. <이터널 선샤인> 속 조엘은 차근차근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을 지워나가며 지난 시간을 되새기고요.
'썸머'를 쌓아가는 '톰'
<500일의 썸머>에서 톰이 늘 지니고 다니던 책을 기억하시나요? 알랭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이란 책입니다. 톰은 '건축'이 꿈인 사람입니다. 썸머가 톰에게 건축이 꿈인 사람이 왜 카드 회사에 다니고 있냐고 묻자, 그는 건물을 쌓고 부수는 건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말하죠. 평생 마음에 남는 카드를 만드는 게 낫다고요. 그러나 그는 결국 카드 회사를 그만 두고 자신만의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톰은 썸머에게 느낀 날것의 감정들을 차곡차곡 쌓아 제 안의 썸머를 만들어내고 사랑의 의미를 찾아내죠.
'클레멘타인'을 해체하는 '조엘'
<이터널 선샤인>의 명장면 중 하나는, 지워져가는 조엘의 기억 속에서 마지막으로 안녕을 나누던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모습이죠. 그 장면 뒤로는 두 사람의 시작이었던 몬톡 해변의 집이 천천히 무너져내리기 시작합니다.
서로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두 사람의 추억이 묻은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보던 조엘과 클레멘타인. 두 사람은 자신들이 쌓아올린 그들만의 공간을 스스로 해체하며, 서로의 의미를 더 세세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서로의 기억만을 지우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던 둘.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기억을 지움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서로의 추억을 한꺼번에 떠올리게 됩니다. 사랑했던 연인과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릴 수 있다면 어떨까?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설정이었기에 더 많은 관객의 공감을 불러낼 수 있었죠.
씨네플레이 에디터 코헤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