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머리가 복잡해질 때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어떤 관심도 에너지도 쏟지 말자고 생각하곤 한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신경을 써봤자 에너지만 고갈되고 스트레스만 쌓인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 조절이 영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작게는 사람과의 관계일 수도, 크게는 내가 속한 조직이나 사회와의 관계일 수도 있을 텐데 어떤 일이든 결국은 비슷하다. 짝사랑이 슬픈 건 상대방과 내가 교류하며 서로 변화할 수 없기 때문이고, 조직 속의 사람이 슬픈 것 역시 개인이 조직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을 하고 싶어하고 권력을 갖고 싶어 한다. 결국은 가능한 한 내 맘대로하고 싶은 것이다.
 
거창하게 사랑까지 가지 않더라도 현대 사회의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사회에 섞여 살아가야 하는 게 인간이고 그런 관계 속에서 개인은 그 개인 의사와 상관없이 밀고 밀려야 그날그날 먹을거리를 벌어먹고 살 수 있다. 그렇게 내 삶을 내 맘대로 제어하지 못할 때마다 드는 생각들은 종종 괴물처럼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런 생각들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 때로는 잠을 청하고, 때로는 술을 마시지만 결국 시간만이 약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일탈을 꿈꾸는 것 아닐까. 나를 묶고 있는 온갖 사회적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관계만을 갖고 싶다는 마음, 내 삶을 오롯이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그런 이상향으로의 탈출을.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이상향은 이뤄질 수 없어 이상향이겠지만 현실에선 이루기 힘든 그런 일탈에의 욕구를,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무작정 억제하며 살 수도 없으니 나에게 허락된 범위 안에서 어떻게든 욕구를 충족하려 시도하게 된다. 아무래도 가장 손쉬운 것이 간접경험일 텐데, 소위 먹방이나 힐링 콘텐츠들이 이런 욕구 충족을 돕는 대표적인 콘텐츠일 것이고, 불과 몇 년 전에 비해서도 이런 콘텐츠의 분량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바로 얼마 전만 해도 예능의 대세는 <무한도전>과 <1박2일>이었다. 야생에서 찬물에 뛰어들고, 서로 머리를 써서 속고 속여가며 웃음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시청자들은 점점 스토리에도, ‘갈등에도 지쳐가는 것 같다. 어느새 <윤식당>같이 자극적이지도, 과하게 웃기지도 않는 예능 프로그램이 시청률 1위를 찍고, 아무 스토리 없이 중년 아저씨가 밥을 먹는 내용을 보여주는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는 시즌 6 넘어 시즌 7이 제작 중이고 한국에도 많은 마니아를 양산하고 있다. 이런 소위 힐링계 콘텐츠들의 지분이 늘어나는 걸 보면 역으로 다들 참 힘들게 살고 있구나 싶어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사회적 사슬에서 벗어나 시골로 돌아온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김태리 분)을 보며 왠지 모를 해방감을 느꼈다.

<리틀 포레스트>는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만화가 원작이다. 만화가 인기를 끌며 일본에서도 두 편, 4계절의 에피소드로 영화가 개봉되었고, 이번에 우리나라의 임순례 감독이 다시 4계절을 한 영화에 담아 내놓았다.
 
영화 내용은 그다지 자극적이거나 복잡하지 않다. 임용고시에 떨어진 후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김태리 분)이 시골에서 살면서 음식을 해 먹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1년을 보내는, 템포가 빠르지도 않고 큰 사건이 스펙터클하게 벌어지지도 않는, <윤식당>이나 <삼시세끼>, <고독한 미식가>를 연상하게 하는 그런 잔잔한 영화다. 원작 만화나 일본의 동명 영화에 비하면 약간 템포가 빠른 느낌이 없지 않고 친구들과의 관계가 더 강조되는 느낌도 있는데 그런 것들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져 마음에 다가오는 영화다.

일본 <리틀 포레스트>에서도 우리나라 막걸리와 비슷한 모주를 먹는 장면이 나오고 우리나라 <리틀 포레스트>에서도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모주와 막걸리는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일반적인 막걸리를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막걸리는 쌀로 술을 빚어 먼저 청주를 분리해내고 남은 찌꺼기, 즉 술지게미를 사용해 만드는 술이다. 만드는 방법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원래는 청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부산물을 버리지 않기 위해 만드는 소박한 술이었다. 물론 현재 생산되는 막걸리를 청주를 만들고 남은 부산물로 만드는 경우는 드물고, 쌀이 아닌 밀로 만드는 막걸리도 많다.
 
동네 마트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막걸리들은 수입 쌀과 일본식 입국으로 만드는 막걸리가 대부분이지만 최근 뜻있는 전통주 장인들과 업체들을 중심으로 국산 쌀과 전통 누룩을 사용하는 등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마니아를 양산하는 막걸리인 송명섭 막걸리, 최고급 다이긴조 같은 달콤한 향을 내뿜는 프리미엄 막걸리 자희향 등이 유명하며 개인적으론 법전 양조장에서 만든 청량주라는 막걸리를 정말 좋아한다.

텁텁하지 않고 깔끔하면서 달지도 않아 취향에 딱 맞는데 가격까지 싸서 가끔 양조장에 전화해 택배로 주문해서 마시곤 한다. 마트에서 구하기는 쉽지 않고 필자처럼 양조장에 전화해서 택배로 받거나 서울 분들은 마포에 있는 ‘이박사의 신동 막걸리’에서 맛보셔도 좋을 듯하다.


얼마 전 한 일본 드라마를 봤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제목이 잊히지 않는다.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누구나 삶을 되돌아보면 잘한 것보다는 부끄러운 일이 먼저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이불킥할 일들만 한가득이고, 그래서 부끄럽다.
 
그래도 누구든 인생을 대충 살려고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든 이 악물고, 누구든 고생하면서, 누구든 고개 돌려 눈물을 닦아가며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세상의 흐름에 때로는 휩쓸리고 때로는 버티며 살아가는 게 사람일 텐데, 그러다 보니 때로는 주저앉게도, 영화 도입부의 혜원처럼 도망치게도 된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도망치는 것을, 환경을 바꾸는 것을 너무 많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조금 손해가 날 수도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자신을 학대했던 기억이 후회로 남는다. 인생은 길고, 누구든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번 주저앉는 게 당연한데 억지로 버티며 쓸데없이 고생하는 것보다 차라리 부끄러운 게 나았을 텐데.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막상 도망가보면 그다지 부끄럽지도 않다.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이 어디로 봐서 부끄러운 캐릭터란 말인가. 누구나 힘들고, 누구나 시원한 막걸리 한 잔에 시름을 덜고, 누구나 마음 맞는 사람과의 수다로 또 내일 하루 살아갈 힘을 얻는다. 마치 혜원처럼.

갑자기 대학 다닐 때 자주 가던 막걸릿집이 떠오른다. 큰 파전과 고추전을 팔던 제기시장 길 건너편 골목 안쪽의 그 막걸릿집. 거길 가면 학교 다닐 때의 내가, 지금보다는 아주 약간 더 자유로웠던 내가 눈앞에 나타날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먹었던, 해물과 대파가 많이 들어간 그 파전과 고추전을, 그때는 내 옆에 없었던 내 아이와 같이 먹고 싶어졌다.
 
, 물론 술은 막걸리로.

리틀 포레스트

감독 임순례

출연 김태리, 류준열, 문소리, 진기주

개봉 2018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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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렉 / 술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