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봐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감독이 있습니다. 늘 뛰어난 걸작을 만드는 감독이 아닌데도, 이 이름이 작품에 따라붙을 때면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될 거 같거든요. 황금종려상의 주인공에서 할리우드의 총아로, 그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할리우드에 저항한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입니다.


천재 감독 → 블록버스터 연출 → 은퇴

314일 개봉한 <로건 럭키> 소더버그 감독의 은퇴 번복작입니다. 몰랐던 분들도 있겠죠? 2013<사이드 이펙트>를 연출한 소더버그 감독은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2011년에 두 작품만 마치고 은퇴할 것이라고 선언한 대로(정작 세 작품을 연출했지만)였죠. 1989년에 데뷔한 지 24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로건 럭키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

출연 채닝 테이텀, 다니엘 크레이그, 아담 드라이버, 라일리 코프, 힐러리 스웽크, 세스 맥팔레인, 케이티 홈즈, 세바스찬 스탠

개봉 201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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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종려상 수상 당시 장면.

소더버그 감독은 영화 사상 가장 화려하게 데뷔한 감독 중 하나일 겁니다. 첫 장편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1989년 제42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으니까요. 그의 나이는 26. 황금종려상 최연소 수상자란 기록은 여전히 깨지지 않았습니다. 이 수상을 가지고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스티븐 소더버그란 이름을 영화계에 각인시키기엔 충분했습니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

출연 제임스 스페이더, 앤디 맥도웰, 피터 갤러거, 로라 산 지아코모, 론 바우터

개봉 1989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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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데뷔 직후 초기에는 과대평가 논란에도 자주 올랐습니다. 하지만 후속작 <리틀 킹>, <표적>, <영국인> 등이 호평을 받으면서 조금씩 여론을 변화시켜나갔습니다 그러다 2000, 할리우드에서 두 작품을 공개합니다. 하나는 기업 PG&E를 상대로 승소한 싱글맘을 다룬 <에린 브로코비치>, 다른 하나는 미국-멕시코 국경의 마약 문제를 그린 <트래픽>.

트래픽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

출연 스티븐 바우어, 벤자민 브랫, 제임스 브롤린, 돈 치들, 에리카 크리스틴슨, 클리프톤 콜린스 주니어, 베니시오 델 토로, 마이클 더글라스, 미겔 페레, 알버트 피니, 토퍼 그레이스, 루이스 구즈만, 에이미 어빙, 토마스 밀리안, D.W. 모펫, 데니스 퀘이드, 피터 리거트, 제이콥 바가스, 캐서린 제타 존스

개봉 2000 미국,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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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린 브로코비치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

출연 줄리아 로버츠

개봉 2000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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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에린 브로코비치> / (아래) <트래픽>

이 두 작품은 2001년 제73회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등 주요 부문 후보로 올라갔고, <트래픽>이 감독상을 수상하며 소더버그의 비상을 보여줬습니다.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직후.
<컨테이젼>(2011) 촬영 현장

아카데미 수상 이후 소더버그 감독은 <오션스 일레븐>으로 블록버스터까지 이끌 수 있음을 입증합니다. 이와 함께 러시아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솔라리스>를 리메이크하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왕가위와 함께 옴니버스 영화 <에로스>를 연출하는 등 다재다능함을 과시합니다.
   

<쇼를 사랑한 남자> 촬영장의 소더버그 감독과 마이클 더글라스.

2013, <사이드 이펙트><쇼를 사랑한 남자>를 내놓고 갑자기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더니 2017 <로건 럭키> 복귀했고, <언세인>, <하이 플라잉 버드>, <파나마 페이퍼>(가제)를 줄줄이 준비하고 있으니 ‘스티븐 소더버그 제3장’을 연 셈입니다.


다작에 필요한 건 다재다능?
<로건 럭키> 촬영 현장.

필모그래피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소더버그 감독은 작업 속도가 엄청납니다. IMDB 기준으로 연출만 42 작품, 단편이나 다큐멘터리를 덜어내도 20 작품은 족히 넘습니다. 소더버그 감독이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이후 한 인터뷰들을 보면 몇 가지 그의 철칙이 보입니다.

▶(영화 작업 시작 뒤) 9개월 이내 크랭크업을 목표로 할 것.

▶함께한 스태프들과 최대한 길게 가면서 현장에서 다음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눌 것.

▶흔히 말하는 ‘사교계’에 발을 들이지 않고 작업 시간을 확보할 것.

소더버그의 감독에 이런 방식은 작품을 논의하는 시간을 단축시키고, 자신의 비전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특효약인 셈입니다. 거기에 소더버그 감독만의 특별한 비법이 또 있는데요, ‘피터 앤드루스 메리 앤 버나드입니다.
 
피터 앤드루스는 촬영 감독입니다. <트래픽>(2000)부터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작품을 전담해오다시피 했죠. 메리 앤 버나드는 편집 감독입니다. <솔라리스>(2002)부터 소더버그 감독과 손발을 맞춰왔죠. 세 사람이 협업한 지 오래됐다 해서 특별한 비법이라고 한 건 아닙니다. 사실 피터 앤드루스와 메리 앤 버나드는 모두 소더버그 감독의 예명입니다. 즉 본인이 촬영과 편집까지 한다는 겁니다.
 

<매직 마이크> 촬영 현장.

소더버그 감독의 촬영, 편집 능력은 할리우드에서도 인정받았습니다. 자신이 연출, 편집, 촬영을 도맡았던 <매직 마이크>의 속편 <매직 마이크 XXL>에서는 연출은 하지 않았지만 촬영, 편집으로 참여했고요, 다른 영화감독들도 그에게 편집 관련 조언을 구하기도 할 정도입니다.
 
한마디로 영화가 완성될 때까지의 세 단계(프리 프로덕션, 프로덕션, 포스트 프로덕션) 내내 촬영 감독과 편집 감독이 함께하는 셈이니, 자연스럽게 작품의 큰 그림을 구상하는 것도, 그걸 스크린으로 구현하는 것도 다른 감독보다 더 빠를 수 있겠죠?


왜 소더버그 감독은 할리우드의 변방으로 갔나


사실 소더버그 감독이 사람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건, 비단 작품 때문만은 아닙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걸 꼭 해내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죠. 가장 유명한 건 <버블>(2005)입니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도래하기 이전, 대여점이 영화의 주요 부가판권 시장이었던 시기에 소더버그 감독은 <버블>을 극장 개봉한 지 단지 나흘 만에 DVD와 유료 케이블 채널로 공개하겠다고 공표했습니다.

<버블> 포스터.


당연히 북미 영화계는 떠들썩했죠. 단순히 극장에서 개봉한다 안 한다의 문제를 떠나 이렇게 빨리 2차 시장에서 공개해도 되는지, 그것이 극장 산업에 영향을 미치진 않을지 의견들이 오갔습니다. <버블>은 초저예산 독립 영화였음에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파격적 시도는 관계자들을 고심하게 만들었죠.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이자 <오션스 일레븐>을 연출한 소더버그 감독이었으니까요. 결국 소더버그 감독은 애초 공언대로 개봉 나흘 만에 2차 시장에서 공개했습니다. 할리우드의 기존 질서체제에 나름의 반기를 든 셈입니다.

<메멘토>

지금이야 블록버스터 감독, 할리우드 감독이기도 하지만, 독립 영화(<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로 데뷔한 감독답게 그는 지속적으로 독립 영화 활동을 했습니다. 한 번은 지인에게 이 영화 대박인데, 아무도 배급하려 하지 않는다더라는 연락을 받고 그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였죠. <메멘토>를 본 소더버그 감독은 이 영화를 아무도 배급하지 않다니, 영화계가 끝났구나생각했다고 합니다. 결국 자신이 배급사를 설립해 <메멘토>를 배급하면서 놀란 감독을 주목받게 했습니다.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파 프롬 헤븐>, <인썸니아>, <스캐너 다클리>, <마이클 클레이튼>

2001, <오션스 일레븐> 제작을 위해 조지 클루니와 설립한 섹션 에잇 프로덕션으로 재능 있는 감독들의 차기작을 기획·제작했습니다. 토드 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썸니아, 스티븐 개건의 시리아나,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스캐너 다클리, 토니 길로이의 마이클 클레이튼, 롭 라이너의 <그녀가 모르는 그녀에 관한 소문>과 조지 클루니의 연출작 <컨페션><굿나잇굿럭> 제작했습니다. 어째 조지 클루니 출연작이 많은 건 넘어갑시다. 아쉽게도 2009년 소더버그의 <인포먼트>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지만, 이들이 남긴 작품은 할리우드 감독들에게 연출자의 비전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2013년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에서 연설 중인 스티븐 소더버그

은퇴를 앞둔 2013년경에도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에서 시네마의 현황이란 주제로 한 연설을 통해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비판했습니다. 현 영화계의 불균형과 이유를 지적하면서 연출자의 비전과 철학을 담은 시네마가 사라지고 있다고 경각심을 심어줬죠. 심지어 영화만이 시네마가 되는 게 아니다. TV 프로그램이나 광고에서도 시네마를 만날 수 있다는 폭넓은 시선을 드러내면서, 정작 시네마란 단어를 낳은 영화계에서 '시네마'(비전과 철학을 담은 영화)가 사라지고 있다는 걸 역설적으로 강조했습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성찬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