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우: <범죄와의 전쟁>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아끼는 작품이에요.
하정우: 그게 6년 전이니까…. 30대 중반 감독이 그런 영화 만들기 쉽지 않죠.
정시우: <범죄와의 전쟁>은 후속편이 나오면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말씀을 어딘가에서 하신 기억이 나요.
하정우: 정말이에요. 윤 감독과 <대부> <좋은 친구들> <카지노>를 얘기하면서 늘 그렸던 어떤 남성상들이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해왔던 걸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만난 거죠. 사투리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나중에 스크린으로 봤을 때 너무 짜릿하고 좋았어요. 횟집에서 술 취해서 (최)민식이 형에게 이야기하는 장면, 노래방에서 (김)성균이 마이크로 딱 때리고 쳐다보는 장면…. 배우 입장에서 봤을 때 명장면들이 참 많죠.
윤종빈: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그런 걸 찍고 나면 대중이 또 그런 걸 원한다는 거예요.
하정우: 스콜세지한테도 그랬잖아.
윤종빈: 맞아. 스콜세지에게 계속 갱스터를 원했지. 그런데 만든 사람 입장에서는 새로운 걸 하고 싶거든요. 물론 이해는 돼요. 음반도 그렇잖아요? 가령 오아시스의 어떤 앨범을 좋아했다면, 계속 그 앨범 같은 걸 듣고 싶은 마음이 있잖아요? 문제는 대중은 ‘스탠 바이 미’(Stand by Me) 같은 명반을 계속 듣고 싶은데, 정작 오아시스는 다른 걸 해. 그럼 대중은 실망을 하고…. 그런데 재미있는 게, 대중이 원하는 걸 만든다고 해서 그게 꼭 좋지도 않다는 거예요.
하정우: 아이러니한 부분이지.
윤종빈: 그리고 우리는 라디오헤드를 이야기할 때 매번 ‘크립’(Creep)을 이야기하는데….
하정우: 그걸 제일 싫어한다며?
윤종빈: 그러니까. 창작자로서 고민이 되는 부분이죠.
하정우: 그런데 윤 감독의 또 다른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 10~20년 후엔, 아마 지금 만드는 영화를 가지고 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거야.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 스콜세지도 정점을 찍었던 영화가 다 그들이 40~50대 때 만든 거였잖아.
정시우: 두 분은 이제 시작인 셈이군요.
하정우: 그럼요!
윤종빈: 연기를 더 열심히 해야지.
하정우: (장난스럽게) 내 연기가 좀 늘었어!(웃음)
윤종빈: 또 늘었어요↗?(일동 웃음)
하정우: (술잔 들이켜며) 아우~ 소주가 쑥쑥 들어가네.
정시우: 온몸에, 열이 오르세요?
하정우: 네. 땀 흘리려고 재킷을 일부러 안 벗고 있어요. 좋은 찬스예요. 바로 뒤에 난로까지 있어서.
정시우: 크크크. 땀 빼고 계시는구나. 감기와 싸우려는 의지가 느껴지네요. 술 마시며 사우나라니.
윤종빈: 형, 감기 걸렸어? 이 형, 진짜 안 걸리는데.
하정우: 이제 나이가 든 거지. (대뜸) 영화 안 하면 뭐 하며 살까? 넌 뭐 할 것 같아?
윤종빈: 난 지금도 진지하게 고민을 많이 해요. 당장 그만둔다면 외국 가서 바닷가에서 카페 같은 걸 하지 않을까….
정시우: 왜 그런 고민을 하세요?
윤종빈: 제겐 이 일이 스트레스가 너무 크니까요. 제가 많이 예민한 편이거든요.
하정우: 윤 감독은 영화에 대해 진짜 순수해요. 남들보다 통점이 낮아서 예민하죠. 저 역시 예민한 부분이 있고요.
정시우: 그 예민함이 또 창작 에너지로 이어지잖아요?
하정우 거실에 놓여 있던 책 <센서티브>를 빌어 말하자면, 윤종빈과 하정우는 ‘고통의 임계점’이 낮은 사람들일 것이다. 외부 환경에 자극을 크게 받고, 책임감을 크게 느끼는 사람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은 뛰어난 감정 이입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남을 돌보는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경우가 많다”고 책은 말한다. 예민함은 그러니까, ‘성능이 뛰어난 안테나’의 다른 말. 책을 보며 하정우와 윤종빈을 떠올렸다.
하정우: 저는 영화를 안 하면, 농사지을 것 같아요. 공기 맑은 곳에서. 재미있을 것 같아.
윤종빈: 형은 식물 키우는 거 좋아하잖아. 나는 그런 것도 귀찮아하니까.
정시우: 갑자기 ‘하와이 농부 하정우’를 상상하게 되네요.(웃음)
하정우: 그럴 수도 있죠. 우리나라에서의 마지막 보루라면 제주도? 제주도와 하와이는 공통점이 있어요. 제주도가 폴리네시아인의 루트 중 하나였대요. 폴리네시아인들이 아시아 본토에서 인도네시아 섬들을 거쳐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빠지고 제주도도 들렸다가, 최종 하와이에 닿았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제주도 사투리를 보면 폴리네시아인의 어감과 비슷한 게 많다고요.
정시우: 정우씨는 ‘서울 사람’이죠? 서울에 순수 서울 토박이 비율이 그리 높지는 않은데.
윤종빈: 맞아, 30~40% 정도였나? 나머지를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채우고 있고.
하정우: 그런데 제 피는 이북이에요. 친가와 외가 모두 이북 출신이시거든요. 그래서 작품 할 때 이북 사투리 지도해주신 선생님이 계신데, 어느 날 그러시더라고요. “혹시 하 선생님, 이북이 고향 아닙네까↗?” 너무 놀라서 “어떻게 아셨어요?” 했더니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북 느낌이 팍 오더래요.
정시우: <황해> 구남, <베를린> 표종성이 괜히 나온 게 아니군요.(웃음)
윤종빈: 형이 그 얘기도 했어. 연변에 가면 마음이 그렇게 편했다고.
하정우: 맞아. <황해> 찍으러 만주 갔는데, 너무 편한 거예요. 부모님이 그쪽 성향을 받고 자라서 음식도 그런 느낌이 있거든요. 가령 이북식은 깍두기를 무말랭이처럼 완전히 건조하는 게 아니라 살짝만 건조해요. 그걸 무치는데, 너무 맛있어요. 저희 어머니 음식 솜씨가 그래요. 그래서 저는 연변이나 하얼빈에서 음식으로 고생한 적이 없어요. 너무 잘 맞거든요.
정시우: 그렇다면 하와이에는 왜 그렇게 끌리는 걸까요?
하정우: 하, 그러니까요. ‘조상 중 한 분이 하와이에 독립운동 하러 가셨나?’ 싶기도 해요.(일동 웃음) 왜 이승만 대통령도 하와이에 계셨잖아요. 도산 안창호 선생님도 하와이 들렸다가, LA로 가서 ‘파이팅’ 하셨고요. 하와이가 독립운동의 거점 지역인데, 뭔가 피가 있으니 끌리는 게 아닌가 싶은 거죠. 혹시 애니메이션 <코코> 보셨어요? 거기 주인공 미구엘도 그 뭐냐… great-great-grandfather! 자기 고조할아버지 피에 끌리니까 그렇게 찾아 나서는 거잖아요~.(일동 폭소)
정시우: <코코>는 이승에서 망자를 기억하는 이가 사라지면, 저승에서도 존재할 수 없다는 멕시코적 내세관을 설정으로 한 영화잖아요? 마지막까지 기억해주는 이가 있다면 누구일까요?
하정우: 안 그래도 저를 대입해서 생각했죠. 처음으로 ‘아, 결혼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깊게 훅 오더라고요. 몇 대에 걸친 가족을 보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어요.
정시우: 결혼 선배로서, 정우씨에게 결혼을 추천하나요?
윤종빈: 처음에는 ‘하지 마라’ 했어요.(웃음) 다른 게 아니라,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장시간 집을 비울 일이 많잖아요. 집중이 필요한 일이라, 몸이 두 개가 아닌 이상 둘 다 잘하기 힘들어요. 그런데, 또 애를 보면 너무 귀엽기도 해서.
대화는 결혼을 시작으로 ‘사랑의 유효기간’에 대한 잡담으로 이어졌다. “사랑은 변형되는 게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다!” 두 남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정시우: 윤 감독님은 ‘감독 하정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마흔다섯이 넘으면 감독 비중이 많아질 것 같다고 아까 정우씨가 얘기했거든요.
윤종빈: 그 이야기는 이전에 했어요. “형, 연출하는 것도 좋지만 그건 쉬엄쉬엄하고 지금은 작품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얼굴이 한참 예쁠 때 연기를 더 많이 해라. 놓치면 아깝다.” 배우에겐 절정의 시기가 있는 것 같아요. 형은 지금 한창 좋을 때죠. 남자 배우는 40대부터 50대 중반까지가 그래요.
하정우: 형들도 다 그 이야기하더라. 실제로 (송)강호 형, (최)민식이 형, (김)윤석이 형도 40~50에 전성기를 달리고 계시고.
윤종빈: 그리고 연출을 하면 늙거든요. 감독은 후반 작업까지 시간도 많이 뺏기기에 스트레스가 많아요. 그래서 그 말을 했죠. “지금은 연기 열심히 하다가, 화력이 떨어지면 그때 연출해도 된다. 100세 인생이니까.”
하정우: 선배들, 제작자들, 다른 감독님들도 비슷한 얘기를 하세요. 제가 연출하는 걸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아요. 한편이라도 더 상업영화에 출연해주길 바라죠. “(배우 하정우를) 셰어 좀 하자!” 그러면서요.(웃음)
정시우: 서운하지 않아요? 감독 하정우를 달가워하지 않는 게.
하정우: 하나도 서운하지 않아요. 굉장히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관객들 역시 지금은 저를 스크린 밖에서보다 안에서 더 보고 싶어 하실 테고요.
정시우: 그렇다면 감독 하정우를 가장 지지하는 사람은 누구인 것 같아요?
하정우: 그러게요~? <롤러코스터>에 나왔던 배우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