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우의 A room] 오후 4시, 하정우의 공간에 가다 ②
‘A room’은 Actor's room 즉, 배우의 방을 뜻합니다. (캐릭터에 빠져 사는) 배우가 나로 돌아가는 시간을 묻고자 하는 게 이 인터뷰 기획의 핵심입니다. 배우의 얼굴 대신 그의 공간을 담습니다. 작품 이야기보다는 배우의 생각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 하정우, 20년 단골 포차.(feat 윤종빈)
PM 07:40. 하정우의 단골 포장마차는 그의 집에서 걸어서 5분이면 닿는 거리에 있었다. 아파트 상가에 조촐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 더 정겨운 공간이었다. 테이블 5개 남짓 차려진 좁은 공간이라 신분을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곳이었는데, 하정우는 주위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들어가 주인 아주머니와 살갑게 인사하고, 술을 냉장고에서 직접 가져다 나르고, 안주도 착착 골라내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이 공간에서 하정우는 그러니까… 더도 덜도 말고, 딱 지역주민? 편해 보였다.

하정우: 20년 단골집이에요. 주인 아주머니 혼자 일하시는데, 처음 만났을 때와 지금 변하신 게 전혀 없어요. 마녀세요, 마녀. 수많은 얘기들을 이곳에서 했어요. 윤 감독하고도 여기서 많이 먹었죠. 윤 감독, 기억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이하 <범죄와의 전쟁>) 캐스팅 이야기도 여기서 했잖아.
윤종빈: 역사가 깊은 곳이지, 이 포차.
정시우: 두 분 자주 만나세요?
윤종빈: 자주 보죠.
하정우: 사무실도 가깝고 하니까.
정시우: 그러고 보니 함께 살았던 적도 있죠?
하정우: 그때 정신 없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죠. 매일 놀고, 술 마시고, 오락 하고…. 우리 둘 다 백수일 때.(웃음)
정시우: 지금의 서로를 보면 어때요?
함께: 기적이죠! 하하하.

윤종빈 감독 연출작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하정우
용서받지 못한 자

감독 윤종빈

출연 하정우, 서장원

개봉 2005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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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와 윤종빈을 이어준 건 싸이월드쪽지였다. 하정우가 출연한 연극을 인상 깊게 본 중앙대학교 후배 윤종빈은 하정우에게 선배와 작품을 함께 하고 싶다 쪽지를 보냈고, 이를 인연으로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그 작품이 바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뜨거운 환대를 받고,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도 초청된 <용서받지 못한 자>. 유명 감독/배우의 작품을 통해 발견되기보다는, 신인 감독/배우와의 작업을 통해 함께 성장하며 충무로에 또 하나의 토양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하정우와 윤종빈의 파트너십은 그 뿌리가 견고하다. 그리고 하정우와 윤종빈은 이제 엄연한 충무로의 허리다. “<용서받지 못한 자> 때 저는 윤 감독을 믿고 따랐어요. 그리고 1년 동안 말도 안 되는 (고난의) 시간을 보냈고, 그 시간을 우린 확인받았죠. 이후 <비스티 보이즈>를 찍고, <범죄와의 전쟁><군도:민란의 시대>를 함께 하고…. 저에겐 참 감사한 여정입니다. 제가 배우로 성장하게 한 시간이죠.” 하정우가 윤종빈과 함께 밟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본다.

하정우: 저희가 20대 중반에 만나서 이제 40대가 됐는데, 참 감사한 관계에요. 영화 이야기가 아니라도, 나눌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게 행운이죠.
윤종빈: 형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좀 더 노련해진 건 있지만.
정시우: 한 사람만 일이 잘 풀렸다면 이렇게 꾸준히 만나기 쉽지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들어요.
하정우: 그것 또한 이젠 넘어서지 않았나 싶어요. 윤 감독이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지만, 중견 감독 이상으로 작품을 많이 했어요. 저 역시 작품이 많이 쌓였고요. 이젠 인기를 얻거나 흥행을 시키고 안 시키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자기 이름을 걸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그 작품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게 되는 것 같아요.
정시우: 두 분을 롤모델로 여기는 후배들을 자주 목격합니다.
하정우: 쑥스러워요. <용서받지 못한 자> 나오고 그해 중앙대 연극 영화과에서 장편 영화 찍기 열풍이 불었어요. 윤종빈 키드들이 많이 생겼죠.
정시우: 안 그래도 인터뷰 전에 <용서받지 못한 자><비스티 보이즈>를 다시 봤어요. 지금 봐도 여전히 뜨거운 작품이더군요.
하정우: 재미있는 추억이죠. 정말 겁 없이, 거침없이 찍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노련해진 만큼 조심성도 많이 생겼거든요. 관객들을 너무 많이 의식하는 부분도 생겼고요. , 올해 4월이 <비스티 보이즈> 10주년이에요. 10주년 기획 행사도 하는 것 같던데.
윤종빈: 진짜? 왜 감독이 모르는 거야?(웃음)

<범죄와의 전쟁> 촬영 현장. 윤종빈 감독과 하정우.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

감독 윤종빈

출연 최민식, 하정우

개봉 2011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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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우: <범죄와의 전쟁>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아끼는 작품이에요.
하정우: 그게 6년 전이니까…. 30대 중반 감독이 그런 영화 만들기 쉽지 않죠.
정시우: <범죄와의 전쟁>은 후속편이 나오면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말씀을 어딘가에서 하신 기억이 나요.
하정우: 정말이에요. 윤 감독과 <대부> <좋은 친구들> <카지노>를 얘기하면서 늘 그렸던 어떤 남성상들이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해왔던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만난 거죠. 사투리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나중에 스크린으로 봤을 때 너무 짜릿하고 좋았어요. 횟집에서 술 취해서 ()민식이 형에게 이야기하는 장면, 노래방에서 ()성균이 마이크로 딱 때리고 쳐다보는 장면…. 배우 입장에서 봤을 때 명장면들이 참 많죠.
윤종빈: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그런 걸 찍고 나면 대중이 또 그런 걸 원한다는 거예요.
하정우: 스콜세지한테도 그랬잖아.
윤종빈: 맞아. 스콜세지에게 계속 갱스터를 원했지. 그런데 만든 사람 입장에서는 새로운 걸 하고 싶거든요. 물론 이해는 돼요. 음반도 그렇잖아요? 가령 오아시스의 어떤 앨범을 좋아했다면, 계속 그 앨범 같은 걸 듣고 싶은 마음이 있잖아요? 문제는 대중은 스탠 바이 미’(Stand by Me) 같은 명반을 계속 듣고 싶은데, 정작 오아시스는 다른 걸 해. 그럼 대중은 실망을 하고…. 그런데 재미있는 게, 대중이 원하는 걸 만든다고 해서 그게 꼭 좋지도 않다는 거예요.
하정우: 아이러니한 부분이지.
윤종빈: 그리고 우리는 라디오헤드를 이야기할 때 매번 크립’(Creep)이야기하는데….
하정우: 그걸 제일 싫어한다며?
윤종빈: 그러니까. 창작자로서 고민이 되는 부분이죠.
하정우: 그런데 윤 감독의 또 다른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 10~20년 후엔, 아마 지금 만드는 영화를 가지고 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거야.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 스콜세지도 정점을 찍었던 영화가 다 그들이 40~50대 때 만든 거였잖아.
정시우: 두 분은 이제 시작인 셈이군요.
하정우: 그럼요!
윤종빈: 연기를 더 열심히 해야지.
하정우: (장난스럽게) 내 연기가 좀 늘었어!(웃음)
윤종빈: 또 늘었어요?(일동 웃음)
하정우: (잔 들이켜며) 아우~ 소주가 쑥쑥 들어가네.
정시우: 온몸에, 열이 오르세요?
하정우: . 땀 흘리려고 재킷을 일부러 안 벗고 있어요. 좋은 찬스. 바로 뒤에 난로까지 있어서.
정시우: 크크크. 땀 빼고 계시는구나. 감기와 싸우려는 의지가 느껴지네요. 술 마시며 사우나라니.
윤종빈: , 감기 걸렸어? 이 형, 진짜 안 걸리는데.
하정우: 이제 나이가 든 거지. (대뜸) 영화 안 하면 뭐 하며 살까? 넌 뭐 할 것 같아?
윤종빈: 난 지금도 진지하게 고민을 많이 해요. 당장 그만둔다면 외국 가서 바닷가에서 카페 같은 걸 하지 않을까….
정시우: 왜 그런 고민을 하세요?
윤종빈: 제겐 이 일이 스트레스가 너무 크니까요. 제가 많이 예민한 편이거든요.
하정우: 윤 감독은 영화에 대해 진짜 순수해요. 남들보다 통점이 낮아서 예민하죠. 저 역시 예민한 부분이 있고요.
정시우: 그 예민함이 또 창작 에너지로 이어지잖아요?

하정우 거실에 놓여 있던 책 <센서티브>를 빌어 말하자면, 윤종빈과 하정우는 고통의 임계점이 낮은 사람들일 것이다. 외부 환경에 자극을 크게 받고, 책임감을 크게 느끼는 사람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은 뛰어난 감정 이입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남을 돌보는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경우가 많다 책은 말한다. 예민함은 그러니까, ‘성능이 뛰어난 안테나의 다른 말. 책을 보며 하정우와 윤종빈을 떠올렸다.

하정우: 저는 영화를 안 하면, 농사지을 것 같아요. 공기 맑은 곳에서. 재미있을 것 같아.
윤종빈: 형은 식물 키우는 거 좋아하잖아. 나는 그런 것도 귀찮아하니까.
정시우: 갑자기 하와이 농부 하정우를 상상하게 되네요.(웃음)
하정우: 그럴 수도 있죠. 우리나라에서의 마지막 보루라면 제주도? 제주도와 하와이는 공통점이 있어요. 제주도가 폴리네시아인의 루트 중 하나였대요. 폴리네시아인들이 아시아 본토에서 인도네시아 섬들을 거쳐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빠지고 제주도도 들렸다가, 최종 하와이에 닿았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제주도 사투리를 보면 폴리네시아인의 어감과 비슷한 게 많다고요.
정시우: 정우씨는 서울 사람이죠? 서울에 순수 서울 토박이 비율이 그리 높지는 않은데.
윤종빈: 맞아, 30~40% 정도였나? 나머지를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채우고 있고.
하정우: 그런데 제 피는 이북이에요. 친가와 외가 모두 이북 출신이시거든요. 그래서 작품 할 때 이북 사투리 지도해주신 선생님이 계신데, 어느 날 그러시더라고요. “혹시 하 선생님, 이북이 고향 아닙네까↗?너무 놀라서 어떻게 아셨어요?” 했더니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북 느낌이 팍 오더래요.
정시우: <황해> 구남, <베를린> 표종성이 괜히 나온 게 아니군요.(웃음)
윤종빈: 형이 그 얘기도 했어. 연변에 가면 마음이 그렇게 편했다고.
하정우: 맞아. <황해> 찍으러 만주 갔는데, 너무 편한 거예요. 부모님이 그쪽 성향을 받고 자라서 음식도 그런 느낌이 있거든요. 가령 이북식은 깍두기를 무말랭이처럼 완전히 건조하는 게 아니라 살짝만 건조해요. 그걸 무치는데, 너무 맛있어요. 저희 어머니 음식 솜씨가 그래요. 그래서 저는 연변이나 하얼빈에서 음식으로 고생한 적이 없어요. 너무 잘 맞거든요.
정시우: 그렇다면 하와이에는 왜 그렇게 끌리는 걸까요?
하정우: , 그러니까요. ‘조상 중 한 분이 하와이에 독립운동 하러 가셨나?’ 싶기도 해요.(일동 웃음) 왜 이승만 대통령도 하와이에 계셨잖아요. 도산 안창호 선생님도 하와이 들렸다가, LA로 가서 파이팅하셨고요. 하와이가 독립운동의 거점 지역인데, 뭔가 피가 있으니 끌리는 게 아닌가 싶은 거죠. 혹시 애니메이션 <코코> 보셨어요? 거기 주인공 미구엘도 그 뭐냐… great-great-grandfather! 자기 고조할아버지 피에 끌리니까 그렇게 찾아 나서는 거잖아요~.(일동 폭소)
정시우: <코코>는 이승에서 망자를 기억하는 이가 사라지, 저승에서도 존재할 수 없다는 멕시코적 내세관을 설정으로 한 영화잖아요? 마지막까지 기억해주는 이가 있다면 누구일까요?
하정우: 안 그래도 저를 대입해서 생각했죠. 처음으로 , 결혼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깊게 훅 오더라고요. 몇 대에 걸친 가족을 보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어요.
정시우: 결혼 선배로서, 정우씨에게 결혼을 추천하나요?
윤종빈: 처음에는 하지 마라했어요.(웃음) 다른 게 아니라,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장시간 집을 비울 일이 많잖아요. 집중이 필요한 일이라, 몸이 두 개가 아닌 이상 둘 다 잘하기 힘들어요. 그런데, 또 애를 보면 너무 귀엽기도 해서.

대화는 결혼을 시작으로 사랑의 유효기간에 대한 잡담으로 이어졌다. “사랑은 변형되는 게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다!” 두 남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정시우: 윤 감독님은 감독 하정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마흔다섯이 넘으면 감독 비중이 많아질 것 같다고 아까 정우씨가 얘기했거든요.
윤종빈: 그 이야기는 이전에 했어요. “, 연출하는 것도 좋지만 그건 쉬엄쉬엄하고 지금은 작품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얼굴이 한참 예쁠 때 연기를 더 많이 해라. 놓치면 아깝다.” 배우에겐 절정의 시기가 있는 것 같아요. 형은 지금 한창 좋을 때죠. 남자 배우는 40대부터 50대 중반까지가 그래요.
하정우: 형들도 다 그 이야기하더라. 실제로 ()강호, ()민식이, ()윤석이 형도 40~50에 전성기를 달리고 계시고.
윤종빈: 그리고 연출을 하면 늙거든요. 감독은 후반 작업까지 시간도 많이 기기에 스트레스가 많아요. 그래서 그 말을 했죠. “지금은 연기 열심히 하다가, 화력이 떨어지면 그때 연출해도 된다. 100세 인생이니까.”
하정우: 선배들, 제작자들, 다른 감독님들도 비슷한 얘기를 하세요. 제가 연출하는 걸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아요. 한편이라도 더 상업영화에 출연해주길 바라죠. “(배우 하정우를) 셰어 좀 하자!” 그러면서요.(웃음)
정시우: 서운하지 않아요? 감독 하정우를 달가워하지 않는 게.
하정우: 하나도 서운하지 않아요. 굉장히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관객들 역시 지금은 저를 스크린 밖에서보다 안에서 더 보고 싶어 하실 테고요.
정시우: 그렇다면 감독 하정우를 가장 지지하는 사람은 누구인 것 같아요?
하정우: 그러게요~? <롤러코스터>에 나왔던 배우들?(웃음)

롤러코스터

감독 하정우

출연 정경호, 한성천

개봉 2013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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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하정우와 윤종빈은 스크린에서 경쟁자로 만난다. 하정우의 <신과 함께 2>와 윤종빈이 연출을 맡은 <공작>8월 출격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 처음 있는 일이다. 윤종빈의 작품엔 늘 하정우가 있었기에, 이번 그림은 뭔가 생경하다.

정시우: <공작>하정우 없는 윤종빈의 첫 장편입니다. 모든 작품을 함께 하는 모습을 기대했던 팬의 입장에서 아쉬움이 있어요.
윤종빈: 사실 <공작>에 형이 특별출연으로 나올 뻔했어요. 스케줄이 엇갈려서 성사가 안 됐지만요. 내부에서 그런 이야기도 있었어요. 정우 형이 나오면 안 된다는. 왜냐하면 하정우가 나오면 관객이 뭔가 엄청난 기대를 하잖아요? 그런데 한 신 나오고 말면…. 여러 이야기가 있었죠.
정시우: 언제 다시 볼 수 있는 건가요. 두 분이 함께 하는 작품을.
하정우: 감독님이 마음의 결정을 해주셔야죠, 전 일개 배우라~(일동 웃음)
윤종빈: , 왜 이러세요.(웃음) 사실 지금 형과 이야기하고 있는 게 있어요.
정시우: , 기대치가 확 올라가는군요!
하정우: , 질문 하나만 해주세요. 지금까지 만난 감독 중에 누가 가장 느낌 있냐고.
정시우: 하하하. 어떤 감독이 가장 느낌 있었나요?
하정우: 윤종빈이죠!(일동 웃음) 윤종빈이 저를 사용하는 법을 가장 잘 알고 있어요. 세상을 바라보고 작품을 바라보는 부피가 엄청 큰 친구이기도 하고요.
윤종빈: 아우, 너무 깔아주는 거 아닙니까.

이후 두 남자 사이에 훈훈한 말과 말들이 다투듯 오고갔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래전 <용서받지 못한 자>로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을 때, 뤼미에르 극장에서 밤을 새우며 마틴 스콜세지와 로버트 드니로 같은 멋진 콤비가 되자 했던 그들의 다짐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임을 강하게 확인했고, 그 꿈의 달성을 확신했다. 하정우는 말했다. “10년 뒤에 오늘을 꺼내서 다시 이야기하면 되게 재미있을 것 같아요. 과거의 우리가 어땠는지.” 적당한 취기를 안고 신데렐라 하정우는 밤 1035분에 집으로 뚜벅뚜벅 향했다. 이때까지 하정우가 걸은 하루 걸음수는 1만4638. ‘파카+소주+난로’ 3콤보로 맞섰던 감기와의 사투가 완전한 실패로 끝났음을 알게 된 건, 얼마 후 그의 작업실에서였다.


#3. 하정우 작업실, 3월의 어느 (feat.한성천+주지훈)

하정우의 작업실은, 아마도, 그의 걸음 속도로 집에서 40~50분 거리인 압구정에 매복해 있었다. 그의 집 거실이 소리 없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 같았다면, 이날 만난 작업실은 에너지를 가득 머금고 자유분방하게 넘실대는 파도 같았다. 배우 하정우가, 화가 하정우로 변신하는 공간.

팔레트로 사용하는 맥주 박스, 최근 그린 그림들

작업실 중앙에 놓인 큰 테이블 위로 물감과 붓, 팔레트로 변신한 라면/맥주 박스가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다. 갈색 물을 머금은 물감 통과 라면박스 위를 물들인 형형색색 물감에서 작업의 미열이 느껴진다. 최근 하와이에서 그렸다는 그림들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는 이 공간은 흡사 개인전시전 현장 같기도 했다. 아직 주인의 손길이 가닿지 않은 텅 빈 캔버스에는 또 어떤 그림들이 그려질까 궁금해하던 찰나, 업소용 음료수 냉장고가 눈에 띄었다. 냉장고 안을 채우고 있는 각종 술과 음료들은 앞으로 하정우와 작업실을 방문할 그의 친구들의 밤을 책임져줄 즐거움이리라.

음료 냉장고, 손님들과 술 한잔 할 수 있는 공간

또 하나 눈길을 잡아 끈 건, 낙서 문구. 현관 옆벽에 생뚱맞게 쓰인 물아일체라는 글이 오히려 이 공간과 물아일체를 이루고 있었는데, “정우성 이사님이 낙서하고 간 흔적이란다. 인간과 자연은 결국 하나라는 장자의 사상을 낙서로 남기며 혼을 불어넣었을 정우성의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터졌다.

정우성이 남긴 낙서, 물아일체

이날 그의 작업실에는 배우 한성천과 주지훈이 방문해 있었다. 중앙대 동기인 한성천은 하정우의 비밀을 가장 많이 공유하고 있는 친구 중 한 명일 것이다. 한성천은 대학 시절 하정우의 집에서 2년간 동고동락한 룸메이트이기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두 사람이 눈빛만으로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자아냈다. ,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하정우가 연기한 태정에게 연신 눈칫밥 먹던 후임 심대석이 바로 한성천. 한성천은 하정우의 연출 데뷔작 <롤러코스터>에서 바비항공사 비행기 기장을 맡아 찰진 호흡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금껏 보여준 것보다, 보여줄 게 더 많은 배우. 이 남자, 앞으로 스크린에서 더 자주 만나게 될 배우가 확실하다.

왼쪽은 배우의 형상, 오른쪽은 하정우가 작업 중인 작품. <신과 함께>의 삼차사일 수도 있다는 설명

주지훈은 하정우와 <신과 함께>를 통해 급속도로 가까워진, 애정이 쌍방통행하는 사이다. 주지훈을 향한 하정우의 애정은 몇몇 자리에서 확인한 적이 있었는데, 이날은 주지훈이 많은 말들을 쏟는다. “내가 아는 하정우는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인데, 저럴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섬세하고, 작은 거 하나하나까지 지켜보며 신경 써주고, 어깨를 두드려줘요. 저 형은 진짜 미친 디테일이 있어요.” 이어지는 주지훈의 말. “정우 형이 굉장히 많은 일을 하잖아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볼 수도 있어요. ‘하정우는 잘나가니까!’ 그런데 반대로 이야기하면, 잘나가서 안 해도 되는 것을 형은 손수 만들어서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저는 그걸 너무 배우고 싶어요. 그런 마인드를. 형을 만나서 너무나 좋은 영향을 받고 있죠.”

주지훈이 구매 예매한 그림

이날 주지훈은 즉석에서 하정우의 그림, 그러니까 ‘FIRST HAWAIAN BANK’ 글씨가 새겨진 그림 한 점을 구매하겠다고 예약했다. 그 그림을 볼 때마다, 뭔지 모를 묘한 인력이 느껴진다는 게 이유였다. “형이, 그냥 선물로 줄게라는 하정우의 말에 주지훈은 손사래를 친다. “첫 작품인데, 그럴 수는 없죠. 이건 전시 후에 제가 사는 걸로 할게요. 나중에 형이 나에 대한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리게 된다면, 그때 주세요.” 섬세하면서도 날렵하게 흘러내리는 선으로 이뤄진 주지훈의 외양은 화가 하정우에게 이미 어떤 영감을 주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했다.

작품 소개하는 하정우 손

대화를 잠시 뒤로하고, 작업실을 꼼꼼히 둘러보다가 하정우에게 그림과 관련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작업 테이블, 작업의 미열이 느껴지는 물통

-컵라면 박스를 팔레트로 사용하시네요?
=. 유화가 기름이잖아요? 기름을 한 번 종이에다가 흡수시킨 다음에 하면 빨리 말라요. 그래서 박스가 보이는 족족 찢어서 사용합니다. 박스! 신문지! 최고죠.

초록색 여인

-2011년에 발간한 에세이 <하정우, 느낌 있다>에서 초록색을 쓰는 게 힘들다고 토로하셨는데, 근사한 초록색 얼굴의 여인을 저렇게 그리셨네요.
=색을 쓰는 건 여전히 어려워요. 색은 정복할 수 없으니까요. 상황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그림을 그릴 당시 저의 바이오리듬, 기분, 환경, 시간에 쫓겨서 그리느냐, 내가 좋아서 그리느냐…. 그런데 그림은 머리로 생각하고 접근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아요. 규정짓지 않고, 색을 하나하나 쓰다 보면 비로소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알게 되는 경우가 많죠.

하정우의 그림으로 만든 티셔츠(여기선, 강한 불빛을 가리는 용도로 쓰이는 중)

-색을 정복할 수 없다라….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건 연기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제가 어떤 작품에서 마음에 드는 연기를 했다고 해서, 그 연기를 다음 작품에서 똑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하정우의 최근 프사(프로필 사진)

-꽃 그림은 메신저 프로필로 한 그림이군요. 궁금했어요. 왜 이 그림을 대표 이미지로 넣었는지.
=이런 그림이 되고 싶은가 봐요, 제 자신이. 주황색과 녹색의 조합을 그리고 나서, 완벽한 컬러의 조합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도 이런 센스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걸 내세우고 싶은 마음에 프로필로 하지 않았나 싶군요.

-주황+녹색의 조합에 안정감을 느끼세요? 하정우의 어떤 마음이 반영된 건지요.
=주황색이 안정감을 주지는 않아요. 이건 그냥 앙상블이에요. 사실 이 그림의 붓 터치는 불안한 부분이 있어요. 그럼에도 그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나머지 요소들이 주는 밸런스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이 작품은 단점을 가리고 장점을 승화시키려 한 작품인데, 그래서 저는 더 매력을 느껴요. 매력이라는 건 절대 완벽한 힘이 아니거든요. 부족한 걸 메우기 위해 노력하는 게 매력이 아닐까란 생각을 늘 해요. 그 생각이 반영된 그림인 거죠.

-캠퍼스에 하정우를 그린 적이 있나요?
-아니요. 아직은 저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제 모든 그림은 저를 표현하는 하나의 조각, 하나의 퍼즐들입니다. 자화상은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나 자신을 그려보겠다는 마음이 차오르면 그릴 생각이에요.

-자화상을 집중적으로 그린 화가도 많은데요. 에곤 실레처럼요.
=내 모습을 보여주는 건 영화로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림의 경우, 제가 본 기억들과 일상의 한 단면들을 늘어놓은 것이죠. 사실 저는 사람들이 제 그림을 맞춰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굳이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당신의 모든 그림이 퀴즈인 셈이군요. 언제고 그려질 하정우의 자화상이 궁금하네요.
=. 저도 궁금해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요?

하정우가 그릴 하정우를 상상해본다. 흩뿌려진 그의 조각조각들이 여러 형태로 진화하고, 변화하고, 방황하다가 하나의 점과 선으로 수렴될 하정우라는 퍼즐. 상상의 끝에서 문득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내 몸에서 가장 먼 풍경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나는 내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없다.
-강정의 <한밤의 모터사이클>


정시우 /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