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만에 <제이슨 본>이 돌아왔습니다. 2002년 개봉한 <본 아이덴티티>를 시작으로 2004년 <본 슈프리머시>, 2007년 <본 얼티메이텀>까지 이어진 3부작은 스파이 첩보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그 반대 지점에는 제임스 본드가 있습니다. (요즘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007 살인면허를 지닌 영국 MI6 요원인 제임스 본드는 최고급 스포츠카를 타고, 최고급 슈트를 입고, 최고급 시계를 차고, 최고급 호텔에서 (젓지 말고 흔들어서 만든 보드카) 마티니를 마시며 늘씬한 금발 미녀와 밀회를 나눕니다. 제이슨 본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 차나 문 따서 타고, 아무 옷이나 보이는 걸 입고, 시계가 있었던가요? 술을 먹는 장면이 기억이 나지 않지만 먹었다면 맥주 정도일 겁니다. 그리고 두 시리즈가 가장 다른 지점이 있습니다. 제이슨 본은 자기가 누군지 모릅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스파이는 고뇌하는 인간입니다.
<본> 3부작이 스파이영화의 변곡점으로 인정받는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긴장감 넘치는 액션이 첫째입니다. <본> 3부작의 액션과 카메라 연출은 혁신이었습니다. 현실적인 스파이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둘째입니다. 이번주 ‘수요명화’는 이 두번째 항목에 집중해보려 합니다. 스파이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 영화가 뭐가 있었을까요.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입니다. 게리 올드만, 톰 하디, 콜린 퍼스 등이 출연한 이 영화의 내용을 한 줄로 줄이면 ‘냉전 시대, 영국 정보부 내 소련 스파이를 색출하는 내용’입니다. 실제 영국에서 있었던 ‘케임브리지 5인방 사건’의 실화가 모티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 상류층 5명이 소련의 이중간첩 노릇을 하다가 발각된 사건입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은 동·서 냉전 시대를 산 스파이의 ‘진짜 모습’을 어둡고 진중하고 유려한 화면으로 담아냈습니다. 이를 테면 영국 정보부 전원이 모인 성탄절 파티에서 소련 국가를 부르는 모습은 기괴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장면입니다.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 같은 영화는 첩보영화, 스파이영화와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에스피오나지 (espionage)영화(▶더 자세한 내용)입니다. 스파이의 첩보활동을 사실적으로 담은 영화를 말합니다. 이 에스피오나지 영화의 아버지 같은 영화가 있습니다. 마틴 리트 감독의 1965년작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네이버 영화에는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지만 정식 개봉 제목은 아니기에 편의상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로 적습니다)입니다.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2012)에도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국내 출시 도서의 제목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정말 살짝 등장합니다. 국정원 요원 정진수(한석규)가 CIA 친구에게 북한 요원 표종성(하정우)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하면서 그의 사진을 책에 끼워서 전달합니다. 그 책이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입니다. 맞습니다.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는 원작이 있습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본 관객이라면 왜 아직까지 이 이름이 안 나오나 싶었을 겁니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존 르 카레가 1963년에 발표한 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스파이 소설이라는 장르를 넘어서 <타임>지에서 선정한 100대 영문 소설의 하나로 선정(2005년)되기도 한 스파이 소설의 걸작입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역시 존 르 카레 소설이 원작입니다. 존 르 카레는 특이한 이력이 있습니다. 영국 외무부에서 일을 했습니다. MI6 요원으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첫 소설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가 나왔을 때 그는 요원 신분이었습니다. 당연히 존 르 카레는 필명입니다. 그런 와중에 킴 필비(케임브리지 5인방 중 한 명) 사건이 일어납니다. 소련의 이중 스파이인 필비가 영국 요원들의 신분을 공개했는데 존 르 카레의 본명도 포함됐다고 합니다. 스파이 경력은 끝난 거죠.
이번주 ‘수요명화’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전까지 서론이 엄청 길었습니다. 존 르 카레는 자신의 세번째 소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는 인세가 들어오는 은행 계좌를 만들어놓고 ‘일정 금액을 넘어가면 꼭 연락해달라’고 말해놨다고 합니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그 금액을 넘어버렸습니다. 은행에서 연락이 오자마자 그는 즉시 사표를 냈다는 얘기도 전해집니다. 소설이 이 정도로 유명해지니 2년 만에 영화가 만들어집니다. 마틴 리트 감독이 연출을 맡았습니다. 주인공 리머스 역은 리처드 버튼이 맡았습니다. 버튼은 영국 출신의 배우로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1958), <클레오파트라>(1963) 등으로 유명합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7번 지명되기도 했습니다만 그것보다 더 유명한 건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두번 결혼하고 두번 이혼한 경력입니다.
본격적으로 영화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의 배경은 독일 베를린입니다. 리머스(리처드 버튼)는 베를린 지부를 담당했습니다. 리머스가 관리하던 동독 정보원이 사살되면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리머스는 이 문제로 본국(영국)으로 송환됩니다. 스파이에서 은퇴한 그는 직업소개소를 통해 도서관 사서 일을 하게 됩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 앤과 연인 사이로 발전하기도 하는데 스파이 일을 하던 그는 일상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결국 술에 의존하면서 폐인처럼 지내게 되죠. 사실 그는 서커스(MI6)의 수장 컨트롤의 지시로 위장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리머스의 작전을 망친 동독측 정보부 간부 문트를 제거하기 위한 첫 단계였죠. 동독쪽에서는 폐인이 된 리머스를 포섭하려고 합니다. 리머스는 이를 수락하고 이중간첩이 됐습니다. 그는 공작의 일환으로 동독 재판정에 서게 됩니다.
기존에 익히 봐 왔던 <007>, <미션 임파서블> 등의 스파이영화와는 뭔가 느낌이 다른 시놉시스라고 생각될 겁니다. 재판이라니요.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는 이 재판 부분이 가장 긴박감이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액션이요? 액션은 없습니다. 대신 스파이의 고뇌가 있습니다. 리머스는 충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음모가 있습니다. 스파이는 한마디로 인간 대접 받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쓸모가 없어지면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제이슨 본이 그런 것처럼요. 영화 속 재판에는 뜻밖에도 사서 낸이 등장합니다. 낸은 리머스에게 묻습니다. “내 역할은 뭐였어요?” 리머스는 “체스판의 졸”이라고 대답합니다.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는 스파이 세계의 비정함을 담아냈습니다. 이 영화의 관람 포인트는 누아르와 같은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 각 인물들의 심리 묘사 등입니다. 1965년 영화이기도 하고 원작 자체가 매우 건조한 톤이기도 해서 영화를 실제로 보면 지루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건 이겁니다. <본> 3부작이 기존 스파이영화와 차별화된 그 지점에는 에스피오나지 영화의 색채가 있습니다. <007> 시리즈 같은 판타지가 아니라는 거죠. 그런 에스피오나지 영화의 고전이 바로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입니다. 존 르 카레 원작의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나 이제 고인이 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출연한 <모스트 원티드 맨>이나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에서 한석규가 연기한 정진수가 베를린 시내 한인식당에서 홀로 소주를 들이키는 장면의 분위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는 꼭 봐야 할 영화입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두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