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영화의 결말부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새는 두 개의 날개로 난다라는 말이 있죠. 여러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말이지만 특히 정치사상을 이야기할 때 많이 쓰입니다. 좌익/우익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시면 무슨 뜻인지 바로 아실 수 있을 텐데요. 진보와 보수 모두 인간 사회를 떠받치는 훌륭한 가치이고 이 두 사상이 조화를 이뤄야 이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진보나 보수라고 흔히 통칭되는 이런 정치적, 사회적인 생각들은 직업군과도 꽤나 관련이 깊어서 어느 분야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사람들이 많고, 어느 분야는 또 반대로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죠. 영화계 쪽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영화도 예술의 한 부분이고 그러다 보니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는 예술 종사자들은 얼핏 생각해 봐도 진보 쪽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것 같네요.

이렇게 진보가 다수를 차지하는 영화계, 특히 미국 영화계지만 그 안에서 보수를 자처하는 유명인들도 몇 명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죠. 배우이자 감독으로서 역사에 남을 빛나는 캐리어를 쌓아 왔고 정치적 활동도 영화만큼이나 활발하게 해 왔던 그의 많은 영화들 중 그가 생각하는 보수이자 미국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그랜 토리노>.

<그랜 토리노>는 영화 속 등장하는 자동차 모델명이기도 하다.

영화 제목인 ‘그랜 토리노’는 원래 차 이름입니다. 1960~70년대쯤에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소위 ‘머슬카’죠. 연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생산된, 악셀을 조금만 밟으면 차 앞부분이 훌쩍 들려버리는 그런 느낌의 무겁고 튼튼한 그런 차입니다. 영화속 주인공인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 역시 이런 차를 생산했던 포드(Ford) 사에서 평생 일을 했고요. 그야말로 예전 ‘좋았던 시절’의 미국을 상징하는 차입니다. 이런 차를 애지중지하는 주인공, 벌써 이미지가 딱 잡히죠?

주인공인 월트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였습니다. 아내를 먼저 보낸 그는 개 한 마리와 둘이서 외롭게 살고 있죠. 성격도 성격이다 보니 주위 사람과 살갑게 정을 나누지도 못합니다. 그러던 중 옆집에 아시아계 사람들이 이사를 오자 짜증을 내기까지 합니다. 인종차별적인 모습이죠.

그러다 옆집에 이사 온 아시아계 청년 타오(비 방)가 갱단의 협박에 못 이겨 월트가 애지중지하던 자동차 그랜 토리노를 훔치러 옵니다. 나이 들면 잠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죠? 낌새를 눈치챈 월트는 소총으로 갱단을 위협하고 갱단은 달아납니다.

이후 타오의 누나인 수(어니 허)의 초대로 수와 타오의 집에 초대된 월트는 타오의 친척들과 어울리며 차츰 호감을 갖게 됩니다. 아직 어리버리한 타오를 데리고 일을 시키고 공사판에 소개도 시켜주면서 경험을 쌓게 해주고 타오 역시 월트를 따르며 우정을 쌓게 되죠.

하지만 또 갱단이 타오를 괴롭히더니 결국 타오의 누나인 수까지 폭행하게 되죠. 월트는 당장 복수하러 가자는 타오에게 몇 시간만 있다 같이 가자고 말한 뒤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양복을 새로 마련하고, 이발과 면도를 한 뒤, 평생 안 갈 것 같던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까지 하죠. 그리고 시간 맞춰 찾아온 타오에게 앞날이 창창한 너의 인생을 이런 일로 망쳐버릴 수는 없다라는 말을 한 뒤 타오를 집에 가둬버립니다. 그리고 혼자서 갱단의 아지트를 찾아가죠.

혼자서 온 월트를 본 갱단은 어이없어 하다가 총을 빼려는 몸짓을 취하는 월트를 총으로 쏴버립니다. 하지만 월트가 실제로 꺼내려던 물건은 총이 아니고 라이터였죠. 갱단 전원은 살인 혐의로 체포되고 그렇게 갱은 동네에서 사라집니다. 끝까지 꼿꼿한 모습을 보이는 늙은 사내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합니다.

이렇게 끝까지 고집 세고 끝까지 보수적인 그가 성당에 나오기를 종용하는 어린 신부와 이야기하며 마시는 술이 있습니다. 영화에 술 이름이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영화 속 바 술장에 있는 술병들 중 이렇게 보수적인 미국 마초 할배가 마실 것 같은 위스키가 과연 뭘까를 생각해봤죠.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습니다. 바로 ‘메이커스 마크’(Maker’s Mark).

스카치위스키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버번위스키 역시 시초는 비슷합니다. 바로 밀주. 미국으로 이주한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 사람들 중 양조와 증류 기술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새롭게 발효된 주세법을 피해 켄터키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이 최초의 미국 위스키, 즉 버번을 만들어 내게 되죠. 이들 중 특히 맛 좋은 버번을 만들었던 가문이 바로 ‘사무엘스’ 가문인데요. 1840년대 가문의 대를 잇던 T.W 사무엘스라는 사람이 짐 빔 증류소 바로 동쪽에 새로 증류소를 세웠고 이것이 메이커스 마크 증류소의 시초입니다.

T.W. 사무엘스가 세운 메이커스 마크의 첫 증류소

이후 전통을 지켜가며 위스키를 만들어오다 1950년대 가문의 후손인 빌 사무엘스라는 사람이 위스키 제조 전 공정을 새로 설계하고 만들어 1958년 최초의 메이커스 마크 위스키를 만들어냅니다. 현재는 빌 사무엘스 2세가 메이커스 마크의 수장으로서 증류소를 이끌고 있죠.

기본 90Proof, 즉 도수 45도짜리 제품이 가장 유명하고 또 많이 팔리고 있지만 그밖에 메이커스 마크 46, CS, 프라이빗 셀렉트(Private Select) 등의 제품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도수가 높은 버번을 좋아해서 CS(Cask Strength, 도수를 맞추기 위해 물을 섞지 않고 오크통에서 숙성을 마친 위스키 원액을 바로 병에 담은 것)를 제일 선호하지만 기본품과 다른 제품들도 인기가 많습니다. 공통적으로 부드러우면서도 향이 좋은 고급 버번이죠.

처음 시음하고 반해서 2병이나 구입했었네요.

사진을 보시면 바로 특이한 점을 발견하실 수 있으셨을 텐데요. 바로 밀봉 방법입니다. 빨간 플라스틱 비슷한 재질로 마개를 막아버리죠. 대개는 빨간색으로 밀봉하지만 특별품의 경우 검정색, 은색, 파란색의 다른 색으로 밀봉하기도 합니다. 최초의 메이커스 마크가 왁스로 밀봉되어 판매되었기 때문에 이 전통을 지키려고 여태까지 수작업으로 직원들이 직접 밀봉을 하고 있죠. 이런 전통을 지키려는 고집스러움이 마치 월트같다는 생각 안 드시나요?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런 밀봉 방법 자체가 증류소의 상징이 되었고 그러다보니 관광상품화까지 되어 증류소 투어를 가면 직접 밀봉을 해 볼 수도 있고요. 심지어 오래 근무한 직원들이 계속 밀봉 작업을 하기 때문에 메이커스 마크 매니아들은 왁스 밀봉된 모양을 보고 어느 직원이 밀봉했는지를 알아맞히는 내기를 하기도 한다고 하네요.

평생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미국의 전통을 지키며 살아온 월트는 애지중지하던 그랜 토리노를 이민자인 타오에게 넘겨줍니다. 넘겨주면서도 특유의 걸걸한 멘트는 빠지지 않죠. 차 지붕 뜯어내지 말고, 새로 도장하지 말고, 스포일러 달지 말라고요. 그러면서 깨알같이 히스패닉에 레드넥(미국 남부 하위계층 백인 노동자를 부르는 말), 아시안들을 욕하구요. 타오가 이 그랜 토리노를 운전하는 모습으로 영화는 끝이 나죠.

결국 백인인 월트가 미국을 이민자인 타오에게 물려준다는 식으로도 영화해석이 가능할 것 같은데요, 재미있는건 월트 역시 미국 토박이는 아니라는겁니다. 이발소 주인이 장난삼아 월트에게 욕하는 단어가 바로 ‘폴랙’(Polack)인데요. 이 단어는 바로 폴란드놈이라는 뜻이거든요. 입으로는 인종차별을 밥먹듯이 한 월트지만 결국 영화에서는 인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미국적인 가치가 중요하다는 말을 하는 것 같네요.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습니다. 그러다 보면 지킬 것도 많아지고, 약해지는 육체 때문인지 겁도 많아집니다. 그러다 보면 필연적으로 보수적으로 바뀌죠. 보수의 기저에는 공포가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말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기저에 뭐가 있든지 간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욕할 수는 없겠죠. 두 번 세 번 생각해보고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도 그렇다면 말입니다.

월트라는 사람은 딱 봐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도 무조건 좋다는 말은 못할 것 같구요. 하지만 필자도 늙으면 저렇게 늙게 되지 않을까 싶고, 저 나이가 되어 저런 일을 겪게 된다면 비슷하게 행동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특히나 요새는 저런 고집스러움과 자기 자신에게 떳떳하려는, 공정함을 지키려는 노력이 참 소중하게 느껴져서 더 그렇습니다.

술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스카치 위스키가 스코틀랜드, 영국을 대표하듯 버번 위스키는 미국을 대표하는 술입니다. 하지만 최근 스카치 위스키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품질이 영 예전만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드네요. 그러다 보니 고집스럽게 전통을 지키는, 비교적 옛 맛을 잘 지켜오고 있는 이런 버번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전통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또 항상 틀린 것도 아닐 겁니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전통과 개혁 역시 균형을 이뤄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사회로 발전했으면 좋겠네요.

그랜 토리노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출연 클린트 이스트우드, 크리스토퍼 칼리, 비 방, 어니 허

개봉 2008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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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렉 / 술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