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범식의 영화에서 공간은 언제나 중요했다. 그의 공간에 대한 감각은 옴니버스영화 <무서운 이야기2>(2013)의 한 에피소드인 <탈출>에 도착할 즈음 드디어 성공했는데, 그의 공간 애착은 <곤지암>에 와 그야말로 폭발했다. <곤지암>이 공간을 보여주는 방식은 대략 3단계로 나뉘어져 있다. 첫 번째는 병원, 숲, 텐트 중 주 공간인 병원에서 드러나는 ‘남겨진 기억의 퇴적’이다. ‘미술을 잘했다’로 표현하면 될 것에 굳이 멋을 부린 이유는 다른 작품과 비교해보면 알게 된다. 보통 페이크 다큐는 무서운 공간을 찾을 줄만 알지 그것을 어떻게 꾸밀지 모른다. <그레이브 인카운터>는 외딴 데 위치한 거대한 건물을 정신병원으로 설정한 뒤 내부 미술에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방마다 병원 집기류 등을 몇 던져놓는 것으로 저예산영화의 한계를 들키고 만다. 듣기로 폐교를 무대로 활용했다는 <곤지암>은 그곳을 치밀하게 변신시켰다. 공간 곳곳에서 어떤 것은 겹친 데 겹치고 또 어떤 것은 비집고 돌출한 형태로 자리잡으면서, 박정희 시대의 종식과 함께 문을 닫은 병원의 기억을 재현한다. 병원의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려진 것들과 대면할 때 정범식은 그 기억과 접하기를 원한다. 행여 그것이 실패할까봐 그는 독재 시대와 육영수를 떠올리게 할 사진들을 수시로 들이민다.
두 번째는 ‘유령의 터치’다. 호러영화에서 유령이나 귀신은 점을 찍는 일이다. 자주 보여줬다간 클라이맥스에서 흥이 깨진다. 당연히 유령의 손길이 거쳐간, 유령이 침묵으로 숨어있는 공간이 그 역할을 한동안 수행해야 한다. <혼숨>이나 여타 페이크 다큐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잘 이끌다 여지없이 실패하는 자리가 여기다. <곤지암>에서는 4분할된 스크린 위로 네 인물이 배치됐던 자리를 병원 곳곳의 풍경으로 대체한 순간부터가 거기에 해당한다. 거칠게 호흡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문득 지워지고, 병원 여기저기 설치된 카메라가 아무도 없는 공간을 응시한다. 단색조의 카메라에 비친, 물기를 머금은 흐릿한 공간들을 바라보면서 난 궁금했다. 유령들은 저 귀퉁이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저 공간 자체가 유령일까. 정범식은 내 질문을 비웃기라도 하듯 갑자기 샤워실의 꼭지 하나를 틀어준다. 싸늘한 날씨이기에 물줄기를 차갑게 느껴야 정상일 텐데, 나는 뜨뜻하고 습한 김이 몸에 와닿는 기운을 받았다. 정범식은 유령에 물성을 부여해 시각적으로 느끼도록, 또는 공감각을 일으키도록 만든다. 유령은 그렇게 몸으로 방문한다. 그 지점에서 유령의 손길은 병원 밖으로 비집고 나가 영역을 확장해 숲과 텐트를 잡아먹는다. 병원 안에 있던 수상한 것들이 숲에서 발견되고, 기지로 쓰이는 텐트에서 유령이 불과 전기를 가지고 논다. 병원 밖으로 나간다 한들 유령의 손길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세 번째는 ‘공간과 시간의 흡수’다. <곤지암>의 정신병원에는 절대 문을 열면 안 되는 공간인 ‘402호’가 있다. 그 안에 들어갔을 때 앞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이미지가 반복되면 곤란하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정범식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공간과 싸워 급기야 유령성의 입구로 안내한다. 그는 미리 보았던 것들을 압축해 터뜨리기보다 거꾸로 제거하기를 시도한다. 인물이 귀신을 눈앞에 마주했을 때, 모노의 공간은 현실의 의미를 상실하고 시간은 자기 자리를 망각하기에 이른다. 정체불명의 낯선 공간과 재회한 것 같을 때의 절망감, 영원의 아득함과 눈앞의 충격이 공존할 때의 무력감. <곤지암>의 402호는 그것을 보여준다. 공간과 시간을 빨아 거두어들인 자리에서 오로지 나와 귀신이 서로를 바라본다는 사실 하나. 음악을 제거해 유령의 드라마화를 차단한 자리에 앰비언트에 휩싸인 유령적 공간만이 끝없이 펼쳐진 것 같은 착각. 여기에서의 효과는 거의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공간에서 유령성을 뽑아내는 게 가능한 몇 안 되는 대가가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