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자신의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가 있다. 다소 한심한 가장이 되어버린 동생을 은근히 구박하는 누나가 있고, 어디에나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며 다 큰 아들을 토닥이는 어머니가 있다. 엄마가 아빠를 싫어해서 떠났기 때문에, 아빠를 닮고 싶지 않다는 어린 아들이 있고, 더 이상 남편을 이해할 마음의 자리가 없어 새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부인도 있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11번째 극영화다. 이번에는 이혼에 의해 헤어진 가족의 이야기를 다뤘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본 채 각자의 자리에만 우두커니 서 있던 이들. 헤어진 가족은 태풍에 의해 발이 묶여 한 공간에서 예기치 못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태풍이 지나간 후, 이들은 다시 ‘가족’이 될 수 있을까?
색다른 가족영화
난 말야. 대기만성형이야. ‘대기만성’을 입에 달고 사는 료타. 그는 과거 문학상 수상의 영광을 잊지 못한 채 유명 작가가 되기를 꿈꾼다. 현재는 ‘소설을 쓰기 위한 취재’를 목표로 흥신소 사설탐정으로 일하고 있다. 헤어진 아내를 멀리서 몰래 지켜보는 일도 사설탐정의 업무 중 하나다. 지갑도 가벼우면서 어머니에게 용돈을 주고 누나에게 돈을 꾼다거나, 도박으로 돈을 날리고서 일이 늦게 끝나 양육비를 마련하지 못했단 핑계를 댄다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뿐인 아들 싱고에게는 좋은 브랜드 운동화를 사주고 싶어 하는 아버지 료타. '순간은 살겠는데 내일은 잘 모르겠다' 식의, 철없는 어른의 삶을 열심히 실현 중이시다.
그는 극중에서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을 반복한다.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아하는 아들의 이야기는 가족영화의 뚜렷한 플롯들 중 하나. 이 영화가 수많은 가족영화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건,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은 아버지의 모습에서 교훈을 얻고 성장해나가는' 기존의 가족영화 공식과는 다른 포맷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내 인생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인 건지'라 말하는 료타에게 멋대로 답 없는 희망을 던지지 않는다. 그저 그가 앞으로도 담담히 걸어나갈 수 있는, 태풍이 지나간 후 맑게 개인 풍경을 내줄 뿐이다.
당신은 당신이 꿈꾸던 어른이 되었나요?
태풍이 휘몰아치는 저녁, 료타는 아들 싱고의 손을 잡고 자신의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는 놀이터로 향한다. “아빠는 뭐가 되고 싶었어? 되고 싶었던 사람이 된 거야?”라 묻는 싱고. 료타는 잠시 망설이며 싱고의 눈을 지긋이 바라본다.
<태풍이 지나가고>에서는 꿈꾸던 미래와는 다른 현재를 살아가는 누군가가 공감할 대사들이 꽤 여러 번 반복된다. 대사들이 반복되어 피로하냐고? 아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뽑아내는 명대사 명장면은 매번 다른 의미로 다가와 관객들의 마음을 두드리는 힘을 지녔다.
"미안해, 능력 없는 아들이라."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전 아내 쿄코와 아들 싱고 앞에서 떳떳하지 못한 료타가 자괴감에 빠지자, 그의 어머니 요시코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한 채 말한다. "바다보다 더 깊이 누군가를 사랑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거야." 성장이 더뎌도, 과거가 후회되어도, 현재에 충실할 것. 꿈꾸던 미래에 닿지 못한 인물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더듬더듬 자신만의 길을 계속 걸어나가는 모습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만이 관객에게 전할 수 있는 따뜻하고 담담한 위로를 담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이름
가족의 부재 또는 상실로부터 시작해 진정한 가족이 되기까지. '가족'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새 작품을 선보일 때마다 관객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그는 이번 영화를 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을 껴안고 꿈을 포기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현재의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가장 먼저 보여드리고 싶은 영화로 <태풍이 지나가고>를 꼽았는데, <태풍이 지나가고>는 실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19년간 살았던 연립 아파트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이번 작품엔 특히 감독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반영되어, 기존의 작품들보다 친절하고 따스한 시선을 더 짙게 담고 있기도 하다.
이 배우들, 어디서 많이 봤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좀 봤다, 하는 관객이라면 출연하는 배우들 또한 놓칠 수 없는 포인트다. 먼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에서 유카리 역으로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인 마키 요코는 철없는 료타를 떠나 새로운 삶을 꿈꾸는 쿄코를 연기한다. <걸어도 걸어도>(2008),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에 이어 모자로 호흡을 맞추는 키키 키린과 아베 히로시의 연기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료타' 역에 아베 히로시를 생각하며 썼다"면서 그에 대한 애정을 밝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 드라마를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보고, 함께 호흡한 이들이 끌어낼 또 하나의 가족 이야기는 어떤 색을 지니고 있을지, 미리 예상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될 수 있겠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코헤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