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기 전, 관객은 ‘타이틀 시퀀스’를 보면서 영화에 대한 인상을 다진다. 제작자, 배우, 감독 등 영화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을 훑는 이 시퀀스는 각자 다른 스타일을 내세움으로써 작품의 개성을 드러내는 기능도 해낸다. 100개의 영화가 있다면, 100가지 다른 타이틀 시퀀스가 존재한다. 인상적인 오프닝 시퀀스를 소개한 아래 기사에 이어, 기자의 취향을 담아 인상적인 타이틀 시퀀스들을 소개한다.


엔터 더 보이드Enter the Void, 2009

가스파 노에 감독이 <돌이킬 수 없는>(2002) 이후 7년 만에 내놓은 신작. 만드는 작품마다 파격을 거듭하던 그는 눈과 귀를 완전히 사로잡는 오프닝 시퀀스로 신작의 야심을 드러냈다. 전작부터 즐겨 쓰던 플리커 효과를 빼면 특별할 것도 없이 빠르게 크레딧을 넘기다가 음악 파트부터 슬슬 폰트의 변화를 주더니만, 곧 ‘진짜’ 오프닝 크레딧을 시작한다. 다프트 펑크의 토마스 벙겔테어(<돌이킬 수 없는>의 음악을 맡기도 했다)의 정신 쏙 빼놓는 일렉트로니카 비트와 함께, 심지어 제작사 이름부터 참여진 하나하나가 다른 폰트로 나타난다. 특히, 주연 배우 파즈 데 라 우에르타부터 이름 하나가 다섯 개의 변주로 드러나는 마지막 20초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빠르고 현란한 오프닝과 달리 160분간 이어지는 본편은 약에 취한 듯 아주 느릿느릿하게 펼쳐진다. <엔터 더 보이드> 타이틀 시퀀스를 만든 아티스트 톰 칸은 사프디 형제의 <굿 타임>(2017)의 타이틀 디자인도 담당한 바 있다.

엔터 더 보이드

감독 가스파 노에

출연 나다니엘 브라운, 파즈 드 라 휴에타

개봉 2009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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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브라운 Jackie Brown, 1997

<펄프 픽션>으로 단숨에 젊은 거장의 위치에 오른 쿠엔틴 타란티노는 197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흑인 중심의 장르영화 블랙스플로테이션에 대한 존경을 담아 <재키 브라운>을 만들었다. 블랙스플로테이션의 최고 스타였던 중년의 팜 그리어를 주인공으로 초대했고, 영화 전반이 6,70년대 소울/훵크 명곡들로 채워져 있다. 파랑 유니폼을 갖춰입은 승무원 재키 브라운이 무빙 워크 위에 선 옆모습을 바비 워맥의 ‘어크로스 원 헌드레드 텐스 스트리트’(Across 110th Street)가 수식하고, 그녀가 다급하게 비행기를 향해가는 모습을 따라간다. 흠모하는 대상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면서, 이 영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실히 각인시킨다. 더스틴 호프만의 1967년작 <졸업>의 오프닝 크레딧을 차용했(고 심지어 그 편이 폰트도 더 예쁘)지만, <재키 브라운>의 것이 훨씬 강력한 인상을 남긴다. <재키 브라운>의 타이틀 시퀀스는 ‘어크로스 원 헌드레드 텐스 스트리트'를 따라부르는 팜 그리어의 마지막 클로즈업과 대구를 이룬다는 점에서 더더욱 감동적이다.

재키 브라운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출연 팜 그리어, 사무엘 L. 잭슨, 로버트 포스터, 브리짓 폰다, 마이클 키튼, 로버트 드 니로

개봉 199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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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 Fargo, 1996

새까만 화면 위로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단명히 밝힌 후, 눈과 안개가 가득한 노스다코타주 파고의 풍경을 보여준다. 무엇 하나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새하얀 풍경 위로 조그맣게 크레딧이 차례차례 뜨고, 저 멀리서 차 한 대가 마을로 들어서는 모습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 차의 모습이 확연히 보이기 시작하면, 데뷔작 <블러드 심플>(1984)부터 줄곧 코엔 형제의 음악을 맡아온 카터 버웰이 작곡한 ‘파고, 노스 다코타’(Fargo, North Dakota)가 장엄하게 클라이맥스로 향해 간다. 차가 빠져나온 휑한 프레임 위로 영화 제목 ‘F A R G O’가 뜬다. 간결.

파고

감독 조엘 코엔

출연 프란시스 맥도맨드, 윌리암 H. 머시, 스티브 부세미, 하브 프레스넬, 피터 스토메어

개봉 1996 미국,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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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 The Player, 1992

<플레이어>의 크레딧은 첫 신과 동시에 나온다. 맨처음에 슬레이트를 내리치는 모습까지 그대로 노출시키면서, 온갖 부정부패가 엉킨 할리우드를 향한 뾰족한 시선을 펼쳐보일 거라고 선언하는 것 같다. 놀라운 건 이 신이 7분 47초짜리고, 편집 없이 단 한 테이크로 찍었다는 점이다. 화려한 기교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영화 산업을 둘러싼 현실적인 모습들을 보여줌과 동시에 <플레이어> 자체의 서사를 위한 단서들을 하나하나 드러낸다. 로버트 알트만 감독은 이 신으로써 오손 웰스의 걸작 누아르 <악의 손길>(1958)의 오프닝 롱테이크에 대한 오마주를 바쳤다. 그나저나 이 지독한 롱테이크를 얼마 만에 찍었냐고? 총 15번 찍었고, 그 중 10번째 테이크를 선택했다.

플레이어

감독 로버트 알트만

출연 팀 로빈스, 그레타 스카치

개봉 1992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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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소녀백서 Ghost World, 2000

<판타스틱 소녀 백서>의 오프닝은 아주 평범하다. 세상 많은 것들이 싫어죽겠는 열여덟 살 이니드(도라 버치)를 따라가는 영화는, 한밤 중에 인도영화 <굼나암>(1965)을 틀어놓고 정신 없이 몸을 흔드는 이니드와 그 시각 동네 사람들의 일상을 건조하게 보여주면서 문을 연다. 혼자 사는 이도, 가족과 함께 TV를 보는 이도 어쩐지 외로워 보인다. 시뻘건 잠옷을 입고 ‘잔 페헤찬 호’(Jaan Pehechaan Ho)의 경쾌한 리듬에 맞춰 영화 속 배우들의 동작을 따라하는 이니드에게도 별다른 기쁨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 헛헛한 무드가 계속 이어진다. 그래서 좋다.

판타스틱 소녀 백서

감독 테리 즈위고프

출연 도라 버치, 스칼렛 요한슨, 브래드 렌프로, 밥 발라반, 일레나 더글라스, 스티브 부세미

개봉 2000 영국, 미국,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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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Batman, 1989

단출하기로는 <배트맨>(1989)도 뒤지지 않는다. 음산하게 시작하고 경쾌하게 이어지는 대니 엘프먼의 스코어를 배경으로, 오래된 유물 같은 시커먼 물체를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큼직하게 훑는 화면 위로 노란 글씨의 크레딧이 차례차례 지나간다. 군더더기 없이 2분이 지나면 그 물체의 정체가 떡하니 나타난다. 바로 배트맨의 로고. 그게 프레임 한가운데 놓이는 순간, ‘DIRECTED BY TIM BURTON’(감독 팀 버튼)이라는 글자가 뜬다. 영화에 대한 팀 버튼의 자신감이 스크린을 뚫고 나올 것 같다.

배트맨

감독 팀 버튼

출연 마이클 키튼, 잭 니콜슨, 킴 베이싱어

개봉 1989 미국,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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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 프리 Grand Prix, 1966

솔 바스라는 전설적인 그래픽 디자이너가 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걸작 <현기증>(1958),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싸이코>(1960), 오토 프레밍거 감독의 <살인의 해부>(1959) 등의 오프닝 크레딧은 60여년이 흐른 지금도 전혀 손색 없는 감각으로 꾸준히 타이틀 시퀀스의 전설로 회자된다. 종으로 횡으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선들과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글자들, 인물 이미지에 약간의 변화를 가해 거대한 임팩트를 남기는 방식은 바스의 독보적인 인장이다. 그가 만든 타이틀 시퀀스 가운데 <그랑프리>는 예외적인 케이스에 속한다. 글자에 기교를 가하는 대신, 레이싱 경기를 준비하는 풍경에 요리조리 이펙트를 더해 이목을 붙든다. 프레임 안에 50개가 넘는 이미지가 줄지어 나타나는 효과는 물론, 사물을 더욱 거대하게 포착하는 구도와 편집까지, 솔 바스의 넘치는 감각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다.

그랑 프리

감독 존 프랑켄하이머

출연 제임스 가너, 에바 마리 세인트

개봉 1966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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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황소 Raging Bull, 1980

권투 영화의 영원한 고전 <성난 황소>는 주인공 제이크 라 모타(로버트 드 니로)가 홀로 몸을 푸는 모습을 느릿하게 잡는 신으로 시작한다.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라 루스티카나> 간주곡이 우아하게 흐르고 크레딧이 차례차례 뜨는 가운데, 라 모타의 모습의 평범한 동작들은 여전히 느리게 이어진다. 치열하게 치고받는 장면 하나 없어도, 어마어마한 복싱 영화를 만나게 될 거라는 기대를 심어준다. 첫 경기 신을 보자마자 기대는 확신이 된다.

성난 황소

감독 마틴 스콜세지

출연 로버트 드 니로

개봉 1980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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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당신 สุดเสน่ห, 2002

위 영상을 보면 저게 뭐가 특별한데?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이번 리스트에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친애하는 당신>을 넣은 이유는, 2시간 남짓한 이 작품의 오프닝 크레딧이 영화 시작 45분이 지나서야 뜨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버마인 불법체류자 민이 애인 룽과 함께 사랑을 나누러 숲속으로 떠나는 시점이다. 이제서야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겠다는, 낯설지만 당연한 결정이다. 3분간 이어지는 이 대목에서 남자인 민의 얼굴은 한시도 제대로 비춰지지 않는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친애하는 당신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출연

개봉 2001 태국,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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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광이 피에로 Pierrot le Fou, 1965

장 뤽 고다르의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 오프닝 크레딧을 비롯한 영화 곳곳에서 글자를 활용하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즐기는 것이다. 1965년 발표된 걸작 <미치광이 피에로>가 그 대표격이다. 화면 곳곳에 ‘A’들이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고, 몇 초 지나면 그보다 적은 ‘B’들이 저마다 자리를 차지한다. 눈치 빠른 이들이라면 고다르가 A부터 Z까지 알파벳을 일정한 간격으로 노출시키며 서서히 크레딧을 완성하리라는 걸 알아챈다. 채 1분이 지나지 않아 다 완성된 모양새가 상당히 예쁘다. 맘에 든다면 고다르의 60년대 중반 영화들도 찾아보길 권한다.

미치광이 피에로

감독 장 뤽 고다르

출연 쟝 뽈 벨몽도, 안나 카리나, 헨리 아탈

개봉 1965 프랑스,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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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살인번호 Dr. No, 1962

<007> 시리즈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 천천히 걸어오던 제임스 본드가 몸을 휙 돌려 관객을 향해 총을 쏘면 화면이 붉게 물드는 건 배럴(gun barrel) 오프닝 신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모리스 바인더는 첫 <007> 영화 <007 살인번호>의 타이틀 디자인을 담당했다. 본드를 노리고 있는 나선의 총신 끝 총구의 동그라미가 비틀비틀 내려와 프레임 아래에 놓이고, 거기서 형형색색의 동그라미들이 변주되면서 눈부신 그래픽의 향연이 시작된다. 몬티 노먼의 저 유명한 ‘007 테마’와 동그라미 변주가 끝난 후에도 퍼커션 리듬에 사람들이 춤을 추는 실루엣을 다양한 색깔로 드러내는 형상까지 야심차게 준비된 결과물이다. <007 살인번호>는 오프닝 크레딧부터 화려한 <007> 시리즈의 전통의 초석을 닦아놓은 셈이다.

007 살인번호

감독 테렌스 영

출연 숀 코네리

개봉 1962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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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들 2005

사실적인 터치로 한국 사회의 폐부를 찔러왔던 임상수 감독은 2005년 초 문제작 <그때 그사람들>을 내놓았다.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살 당한 날을 블랙코미디의 정서로 재현한 작품이다. 여자들을 대동해 술판을 벌이다가 살해 당한 박정희를 정조준하는 영화를 만든다는 건 그 자체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그의 아들 박지만은 명예훼손을 이유로 손해배상과 상영금지를 청구했다. 법원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삭제하라고 판결했고 그게 잘려나간 채 개봉됐다. 본래 프롤로그에는 부마항쟁 당시의 푸티지들과 크레딧이 떠다니는 가운데 (영화 속 가수로 출연한) 김윤아의 오묘한 내레이션이 흘렀고(“…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게도 박정희는 총에 맞습니다”), 에필로그는 박정희의 장례식에 사람들이 울부짖는 모습이 담긴 영상으로 채워져 있었다. 극장 상영은 물론 VHS, DVD도 삭제된 채 나왔다. 당연히 부조리한 결정이었지만, 박정희가 죽고 25년이 흐른 뒤 나온 작품이 온전한 채 공개될 수 없는 현실이 영화에 고스란히 드러난 꼴이야말로 한국 그 자체였던 것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때 그사람들

감독 임상수

출연 한석규, 백윤식

개봉 2004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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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문동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