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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예진이 허진호 감독의 <덕혜옹주> 주연을 맡았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야말로 데뷔 때부터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잡았던 그 처연한 눈빛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청년부터 노년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손예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니, 기대는 한껏 부풀 수밖에 없었다.

결과물은 높았던 기대치마저도 훌쩍 웃돈다. 손예진은 덕혜옹주의 비극적인 삶은 물론, 일제의 압박에도 꼿꼿하게 자기 뜻을 드러내는 우직함, 마음 둘 사람 앞에선 특유의 반달 같은 눈으로 짓는 포근한 웃음까지도 덕혜옹주의 모습으로 재현해냈다. 자신의 장기인 멜로보다는 한 여자의 기구한 삶에 초점을 맞춘 허진호 감독의 연출은, 천천하고 묵직하게 '손예진의 덕혜'가 보여주는 모든 제스처를 선명하게 담았다.

영화 <덕혜옹주>가 첫 선을 보인 7월 26일, 손예진을 만나 그녀가 오랫동안 마음에 품은 여인 '덕혜'에 대해 물었다. 


오늘 영화 처음 보셨죠?
시사회 때 눈물을 흘려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제 영화는 보통 객관적으로 보지 못해요. 관객으로서 즐기지 못하고, “저 장면이 저렇게 나왔네”, “내가 왜 저렇게 연기했지?” 생각하며 되게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에서 보는데, 이번에는 그냥 하나의 관객이 된 것처럼 봤어요. 상영 끝나고 기자간담회가 있어서 이성을 차리고 있어야 하는데, 조금 울었어요. 제가 연기한 사람이지만, 덕혜옹주라는 역사적인 인물의 비극성을 그린 영화이기 때문인지, 저로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 이상한 기분은 처음 느꼈어요.
근 15년간 영화에 출연했는데,
자기 영화 보면서 운 건
처음이라고 하셔서 좀 신기했어요.
그동안 슬픈 영화도
많이 하셨기 때문에 더더욱.
<클래식>(2003),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많은 분들이 울고 마음 아파하는, 절절한 작품들이 있었죠. 근데 저는 그런 영화들을 볼 때도 한번도 안 울었어요. 배우들은 자기가 한 연기를 보면서 울기가 쉽지 않거든요. 하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달라서 적잖이 당황했어요.
방송 인터뷰에서
“배역을 제안 받았을 때 고민 않고
바로 흔쾌히 수락했다”고 말했죠.
당시에도 이미 덕혜옹주라는 인물을
알고 있었던 건가요?
권비영 작가의 원작소설이 한창 베스트셀러였을 때,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읽었어요. 덕혜옹주의 삶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더라고요. 사실 여성이 중심으로 된 일대기가 영화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드물어서, 그저 영화화됐으면 좋겠다고 생각만 했죠. 그리고 몇 년 후에 허진호 감독님이 <덕혜옹주>를 영화화한다는 걸 기사로 봤어요. 그때 “과연 누가 덕혜옹주 역을 하게 될까” 궁금해하다가도 “내가 하고 싶다” 내심 욕심도 났어요.
(왼쪽부터) 어린시절 덕혜옹주 / 일본 소학교 시절 덕혜옹주 / 남편 소 다케유키과 덕혜옹주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
덕혜옹주에 대해 알아가며
받았던 인상이 궁금합니다.
덕혜옹주의 사진은 아주 단편적인, 중요한 순간만 남아 있어요. 아기였을 때 고종황제, 영친왕과 같이 찍었던 사진부터 기모노를 입고 강제로 유학 가던 때, 소 다케유키와 결혼했을 때, 37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을 때 정도요.

항상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고, 손은 다소곳 했어요. 일본 소학교 시절 사진도 되게 우울해 보였어요. 기본적으로 비극적인 시대였지만, 너무 비극만을 강조해서 덕혜옹주를 그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당차고 똑똑한 덕혜옹주가 현실에 부딪히고, 좌절하고, 그래서 점점 미쳐가는 변화에 집중했어요. 제가 얼마만큼 덕혜옹주의 삶을 녹여냈는지 모르지만, 그 아픔과 비극성만큼은 관객 분들이 보고 공감하실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본군 장교가 된
김장한(박해일)과
만나는 순간이
‘손예진의' 덕혜옹주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신이죠.
그 순간, 그녀의 모습을
어떻게 상정하셨어요?
김소현 씨가 연기했던, 일본 유학 전의 덕혜옹주는 어머니 양귀인(박주미)에게 일본에 다녀오겠다고 당당히 얘기하고, 변절자 한택수(윤제문)를 기세등등하게 꾸짖는 대한제국의 황녀로서 모습을 보여줘요. 하지만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는 일본 생활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혈혈단신이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을 것 같아요. 일본 유학생들과 지내면서도 소외감이 얼마나 컸겠어요.

실제로 소학교 시절에 (어머니가 독살을 피하기 위해 늘 지니고 다니라고 당부한) 보온병만 품에 안고 다니고, 누군가와 말도 잘 섞지 않았다고 해요. 제가 연기한 덕혜옹주는 그런 시기를 지난 후이기 때문에, 그때 이미 충분히 외롭고 슬퍼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후에 오히려 장한을 만나고부터는 행복한 순간들이 있지 않았을까, 싶었죠.

<외출>(2005) / <덕혜옹주>(2016)
<외출>(2005) 이후,
허진호 감독님과 두 번째 작업입니다.
<외출>과 <덕혜옹주>의 작업
어떤 점이 달랐나요?
<외출>은 오랜 시간, 다양한 시도를 하며 찍었어요. 하루에 한 신을 찍을 때도 있었을 정도로, 삼척에서 4개월 동안 넉넉하게 작업했어요. 그때는 현장이 편했어요. 근데 <덕혜옹주>는 실제 우리나라 역사와 실존 인물울 토대로 하고 있어서 사실에 입각해야 했고, 드라마가 주는 무거움도 유독 컸어요. 더군다나 비용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빨리빨리 찍어야 했고요.

그리고 <외출>이 관객들이 모두 각자 다른 방향으로 볼 수 있다면, <덕혜옹주>는 보다 명확한 영화죠. 역사적인 사실과 원작소설을 기반으로 해 덕혜옹주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정확하게 그려내는 데에 초점을 맞췄어요. 볼거리도 훨씬 많은 영화고요. 거의 모든 게 달랐던 거 같아요.
영화 속에서 손예진 씨는
'덕혜옹주'보다는 '덕혜'라고
부르고 싶은 여자였어요.
비극적인 이야기 가운데서도
드문드문 가볍고 인간적인 면모가
엿보이기 때문일 거예요.
그럼에도 모든 신의 덕혜를
황녀라고 의식하셨나요?
매 장면마다 했죠. 이 영화는 어쨌든 덕혜옹주의 이야기기 때문에, 가벼운 장면에서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라는 타이틀이 갖는 무게감은 충분히 가지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복순(라미란)과의 일상이나 장한과 복동(정상훈)이랑 카페에서 술 마시는 장면 같은 우스운 대목도 있지만, 그래도 옹주의 위엄을 잃지 않는 선에서의 감정의 진폭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끝까지 놓치지 않아야 했기 때문에 연기하기 더욱 쉽지 않았던 거 같아요.
<덕혜옹주>는
장한의 플래시백으로
진행되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심리적인 비중이
막대한 데에 비해
물리적인 비중은 예상보다
크진 않았던 거 같아요.
<덕혜옹주>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덕혜옹주를 찾아가는 방식으로 진행되다보니까,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 역시 관객 입장에서 볼 수 있었던 거 같기도 해요.

다른 배우들한테 미안할 정도로, 그 분들이 고생 정말 많이 하셨어요. 덕혜옹주라는 인물이 중심에 있긴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에 등장하는 장한과 복동처럼,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거든요. 모든 배우들한테 크게 박수쳐주고 싶어요.
해안가 신 현장 사진. 손예진은 "힘들고 아파했던 그 시간이 그립습니다. 그 치열했던 시간의 끝에 활짝 웃을 수 있었던 그 순간이 그립습니다."는 코멘트를 남겼다. 작품에 대한 애정이 팍팍!
모든 장면마다 확연히 결이 다른
열연을 선보이셨어요.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은
장면은 무엇인가요?
광복 이후 일본항에서 입국을 불허 당했다는 사실을 듣는 신이요. 새벽까지 창고에서 찍으면서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되게 힘들었어요.

그리고 배우들이 함께한 마지막 촬영이었던, 망명 작전의 해안가 신. 바닷바람 맞으면서 뛰어가고, 쓰러지고, 끌려가고, 며칠씩 찍으면서 정말 힘들었고요.
<덕혜옹주>를 보는 내내
뒷모습이 참 많이 나오는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성인 덕혜의 첫 등장부터,
정신병원에 앉아 있는 노년의 덕혜,
마지막 장면 역시 뒷모습으로 끝나죠.
뒷모습의 연기는 더 어려울 것 같은데,
세 장면 모두 어떻게 임하셨나요?
배우는 앞 옆 뒤 다 연기를 하고 있죠. (웃음) 단지 카메라가 앞을 비추느냐 뒤를 비추느냐가 다를 뿐이지, 배우가 연기를 하는 건 모두 마찬가지예요.

첫 등장의 뒷모습은 외로운 느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혼자 고요하게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누구를 위한 연주가 아니라, 그저 홀로 가만히 치고 있는 느낌으로 연기를 했던 거 같아요.

정신병원에서의 뒷모습을 찍을 때는 혼자 아주 오랫동안 앉아 있었어요. 뒷모습이지만 감정을 아주 많이 담았어요. 덕혜는 어떤 마음으로 여기에 앉아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되게 많이 했어요. 끝나고 진이 빠질 정도로 힘들게 찍었어요.

마지막 장면은 덕혜가 상상으로나마 한번쯤 위로 받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으로 임했어요.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엄마 아빠와 있던 곳에서 잠시라도 평온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덕혜옹주> 촬영현장
'<덕혜옹주>를 찍는'
허진호 감독님의 연기 디렉션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배우들이 허진호 감독님이랑 대화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표현해야 하는 것이 시나리오에 정확하게 적혀 있지만, 그 시나리오 안에서도 여유롭고 유연하게 움직이려고 서로서로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래서 어디에 앉을까, 감자를 어떻게 먹을까, 여기서 어떤 행동을 할까 등 리허설을 많이 했죠. 그러면서 대사와 상황이 바뀌기도 하고요.
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
손예진 씨의 연기경력에서
<덕혜옹주>는
앞으로 어떤 작품으로 남을까요?
<덕혜옹주>는 정말 많은 분들이 봐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커요.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비극, 그 역사 속을 살다간 처연한 여인 등 제가 표현해야 하고 관객분들에게 보여드려야 하는 지점들이 많은 영화예요. 물론 연기적으로도 성숙한 모습을 많이 보여드려야 했고요. 앞으로 시간이 지나도 정말 저한테는 소중한, 정말 많이 소중한 작품이 될 것 같아요.
<덕혜옹주> 메인 예고편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