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 두 갈래 길이 있었다.
두 길을 다 걸을 순 없었다.
한 사람의 여행자로서
한 길을 바라보았다.
구부러진 그 길의 끝까지
그리고 나는 다른 길로 걸었다.
아마도 더 나은 길이었을 것이다.
풀이 더 무성했고, 나를 부르는 듯했으니까.
사람이 지나간 흔적은
아까 그 길과 비슷했지만 말이다.
아침은 두 길 위에 똑같이 드리웠고
낙엽 위엔 아무 발자국도 없었다.
길은 계속되고
이곳에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아마도 나는 한숨 쉬며 이야기할 것 같다.
나무들 사이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발자국이 적은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게 그 모든 차이를 만들었다고.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란 시를 번역해봤다. 이 시는 누구나 일상적으로 겪어야 하는 매 순간의 선택을 이야기한다. 사람은 모두 인생이란 길을 걷는 한 사람의 여행자이고 누구든 두 길을 한꺼번에 걸을 수는 없다고, 그리고 가지 않은 길이기에 아쉽게 느껴진다고 말이다.
선택이라는 건 그 주체가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하지만 그 주체를 살짝 비틀어보면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는 것 역시 선택에 포함된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종교적인 관점의 조물주가 있다면 아마 그 존재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가 우리 개개인일 것이다. 우리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 태어날 것인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문제지만 인생에서 이것만큼 삶의 형태와 질을 결정하는 문제는 찾기 힘들다. 1920년대에 태어난 사람과 현대에 태어난 사람이 똑같이 살 수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다 보니 누구든 가끔은 자기를 둘러싼 시대와 환경에 불만을 갖게 된다. 이런 감정들은 정말 보편적이어서 어떤 예술에서건 현재이자 현실은 늘 불만족스럽고 불안한 시공간으로 정의되곤 하고 그건 결국 우리가 현재 걷고 있는 길이기 때문일 텐데, 그래서 예술 속에서나마 나를 둘러싼 시공간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가깝게는 전래 동화로, 영화에서는 SF에 타임워프 물로,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무협지에 판타지 소설에, 요새 10대들이 좋아하는 소위 이 세계 물도 그 분류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무엇을 이야기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결국은 거기에 얼마나 인생을 녹여 놓을 수 있는지가 그 작품의 품격을 결정할 텐데, 문득 어디선가 비슷한 대사를 들은 기억이 났다. 바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