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nted by Margaret Ellis

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 두 갈래 길이 있었다.
두 길을 다 걸을 순 없었다.
한 사람의 여행자로서
한 길을 바라보았다.
구부러진 그 길의 끝까지
 
그리고 나는 다른 길로 걸었다.
아마도 더 나은 길이었을 것이다.
풀이 더 무성했고, 나를 부르는 듯했으니까.
사람이 지나간 흔적은
아까 그 길과 비슷했지만 말이다.
 
아침은 두 길 위에 똑같이 드리웠고
낙엽 위엔 아무 발자국도 없었다.
길은 계속되고
이곳에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아마도 나는 한숨 쉬며 이야기할 것 같다.
나무들 사이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발자국이 적은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게 그 모든 차이를 만들었다고.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란 시를 번역해봤다. 이 시는 누구나 일상적으로 겪어야 하는 매 순간의 선택을 이야기한다. 사람은 모두 인생이란 길을 걷는 한 사람의 여행자이고 누구든 두 길을 한꺼번에 걸을 수는 없다고, 그리고 가지 않은 길이기에 아쉽게 느껴진다고 말이다.
 
선택이라는 건 그 주체가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하지만 그 주체를 살짝 비틀어보면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는 것 역시 선택에 포함된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종교적인 관점의 조물주가 있다면 아마 그 존재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가 우리 개개인일 것이다. 우리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 태어날 것인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문제지만 인생에서 이것만큼 삶의 형태와 질을 결정하는 문제는 찾기 힘들다. 1920년대에 태어난 사람과 현대에 태어난 사람이 똑같이 살 수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다 보니 누구든 가끔은 자기를 둘러싼 시대와 환경에 불만을 갖게 된다. 이런 감정들은 정말 보편적이어서 어떤 예술에서건 현재이자 현실은 늘 불만족스럽고 불안한 시공간으로 정의되곤 하고 그건 결국 우리가 현재 걷고 있는 길이기 때문일 텐데, 그래서 예술 속에서나마 나를 둘러싼 시공간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가깝게는 전래 동화로, 영화에서는 SF타임워프 물로,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무협지에 판타지 소설에, 요새 10대들이 좋아하는 소위 이 세계 물도 그 분류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무엇을 이야기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결국은 거기에 얼마나 인생을 녹여 놓을 수 있는지가 그 작품의 품격을 결정할 텐데, 문득 어디선가 비슷한 대사를 들은 기억이 났다. 바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미드나잇 인 파리

감독 우디 앨런

출연 오웬 윌슨, 마리옹 꼬띠아르, 레이첼 맥아담스, 애드리언 브로디, 카를라 브루니, 캐시 베이츠, 마이클 쉰

개봉 2011 미국,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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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둔 예비부부 길 펜더(오웬 윌슨)와 이네즈(레이첼 맥아담스)는 이네즈의 부모와 함께 파리 여행을 온다. 약혼한 사이지만 둘은 다양한 문제로 사사건건 충돌한다. 길은 시나리오 작가를 그만두고 소설가가 되고 싶어 하지만 금전적인 문제를 생각하는 이네즈는 이를 반대한다. 살고 싶은 곳 역시 길은 파리지만 이네즈는 말리부. 같이 여행 간 예비 장인과도 정치적 성향이 달라 사이가 껄끄럽다. 이네즈의 친구 커플과 넷이 다니는 자리에서도 딱히 재미를 찾지 못하던 길은 혼자 파리의 밤거리를 걷다가 오래된 스타일의 차를 얻어타며 시간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1920년대로 타임워프를 해 그가 좋아하던 예전 작가들인 스콧 피츠제럴드, 어네스트 헤밍웨이에 음악가인 콜 포터까지 만난 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좋아한다. 헤밍웨이와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자기가 쓴 소설을 보여주기로 한 길은 다음날 밤 다시 1920년대로 돌아가 소설을 보여주고 피카소와 그의 연인인 아드리아나(마리옹 꼬띠아르)를 만나게 된다.

이후 현재와 1920년대를 왕복하던 길은 길이 1920년대로 가는 차를 탔듯 아드리아나를 태우기 위해 벨 에포크(Belle Époque, 직역하면 아름다운 시대’. 1870~1910년대 초까지의 시기로 파리를 중심으로 각종 문화가 번성했던 화려한 시대, 혹은 그 시절의 문화를 표현하는 말.) 시대로부터 온 마차를 아드리아나와 같이 타고 간다. 그곳에서 길이 1920년도를 동경해왔듯 벨 에포크 시대를 동경해왔던 아드리아나와, 벨 에포크 시대를 살며 르네상스 시대를 동경해왔던 드가와 고갱을 만나게 된다.

드가의 ‘압생트’ 정말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현대로 돌아온 길은 약혼녀 이네즈와 파혼하고 비 오는 파리의 밤길을 걷다 벼룩시장에서 LP 판을 팔던 가브리엘(레아 세이두)과 마주친다. 그와 그녀는 파리의 밤길을 같이 걷고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영화 내내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을 교체해 보여주는 이 영화는 곳곳에 각 시대를, 그리고 그 사이를 이어주는 코드들을 보여준다.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 스콧 피츠제럴드, 장 콕토, ‘Let’s do it, Let’s fall in love’의 작곡가 콜 포터, 두 번 말하면 입 아픈 헤밍웨이에 피카소까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술 역시 코드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영화 초반 스콧 피츠제럴드의 아내 젤다(알리슨 필)는 길을 처음 만난 파티장에서 배쓰텁 진이 그립다는 말을 한다.

배쓰텁 진(Bathtub Gin)은 직역하면 욕조에서 만든 진이라는 뜻이다. 1920년대 미국은 소위 금주법 시대였고 술을 만들거나 판매한 사람, 심지어 마신 사람까지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고금을 통틀어 인간의 본능을 억압하려는 시도는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듯이 이 시대는 소위 갱들에 의한 밀주(보통 Moonshine이라 불렸다.)가 역대 최고로 많이 생산되었던 시대였고 이는 갱들의 든든한 자금줄이 되었다. 이 시절 문을 걸어 잠그고 몰래 술을 팔고 마시던 바는 현재 스피크이지스타일의 기원이 되었고 이런 바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밀주를 단속해야 할 경찰관과 갱들이 사이좋게 술을 마시곤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반면 이런 바에 갈 돈이 없었던 보통 사람들은 집에서 밀주를 만들어 마셨다. 술이 귀하니 적은 양으로 취할 수 있는 고도주를 만들고자 했고 그중 그 시절 인기 있으면서도 비교적 제조가 간단한 진을 집의 욕조를 사용해 만들어 배쓰텁 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시절 기원한 칵테일이 많은 이유 역시 품질이 조악했던 이 배쓰텁 진을 좀 더 맛있게 마시기 위해 사람들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참고로 옛날 배쓰텁 진 생각을 잊지 못한 술꾼들이 동일한 이름으로 진을 생산하고 있다. 필자는 프라하의 헤밍웨이 바에서 이 진을 맛보았었는데 쥬니퍼 향과 오렌지 향이 강했던, 예전 오리지널 배스텁 진 수준의 형편없는 물건은 전혀 아닌 평범하게 맛있는 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 글을 쓰면서 이 진을 다시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선 구하기 힘든 술이다 보니 더 마시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술꾼에 한정하면 그런 거다. 그러면 안 되지만 운동한 날에 술이 더 마시고 싶고, 차 포기하면 귀찮아지는 걸 알면서도 차 갖고 온 날엔 술이 더 마시고 싶은 그런 느낌.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도 결국 마찬가지다. 길은 1920년대를 그리워했고, 1920년대에 살던 아드리아나는 벨 에포크 시대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벨 에포크 시대에 살던 드가는 미켈란젤로가 살던 르네상스를 그리워했다. 결국 모두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원한다는 뜻이다.
 
영화 마지막의 길은 가브리엘을 만나며 진실로 행복한 표정을 보였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보였다. 누구나 가지 않은 길을 그리워하지만 또한 그 길로 갔더라도 딱히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것 역시 이제는 알기도 하고. 게다가 1920년대로 가 본들 저렇게 유명한 사람들이 한군데 모여 있을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설령 미래에서 현재로 누가 왔다고 해도 예를 들어 트와이스와 빅뱅을 한자리에서 볼 일이 과연 있겠냐고요.
 
그래도 역시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본다. 과거로 돌아가 빌리 홀리데이의 라이브를 들어보고 싶다고. 오래전 그 시절 술들을 마셔보고 싶다고. 현실의 고단함에 지칠 때쯤은 더더욱.
 
오래간만에 바에 가야겠다. 배쓰텁 진 덕분에 맛있게 된 진 베이스 칵테일들을 마시고 싶어진다. 다른 손님이 없다면 빌리 홀리데이를 틀어 달라고 부탁해야지. 1940년대 후반 미국으로 시간여행을 간 것처럼.
 
<영화 내내 나오는 콜 포터의 ‘Let’s do it, let’s fall in love’는 시대를 뛰어넘는 명곡으로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불렸다. 영화 속 노래도 좋지만 개인적으론 이광조님의 노래를 가장 좋아해서 이 기회를 통해 소개하고 싶다. ‘I’m Old Fashioned’란 앨범의 4번째 트랙. 꼭 한번 들어보시길.>


데렉 / 술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