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장소가 볼링장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대학생 시절 친구들과 볼링장에 다녔던 기억부터 떠오르더라고요. 요즘이야 콘솔 게임, 캠핑, 서핑 등 여가 거리가 다양하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스타크래프트, 볼링장, 당구장, 극장 아니면 놀만한 게 거의 없었어요(뭐, 그때도 놀거리야 많았겠지만 대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을만한 게 거의 없었던 것도 있겠죠). 에헴, 어쨌거나 즐겁게 다녀온 촬영 현장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신인 최국희 감독이 연출하고, 유지태, 이정현, 이다윗, 정성화가 출연하는 <스플릿>(제작 오퍼스픽쳐스)이라는 영화입니다.
6월2일 자정, 영업이 막 끝나 손님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수원 시내의 한 볼링장이 영화 촬영 준비 때문에 스탭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합니다. "당구장 영업시간이 밤 12시까지인데, 영업시간을 피해 촬영하기 위해 제작진과 출연진은 새벽에 집합했다"는 게 남성호 피디의 얘기입니다. 볼링장에 들어서자마자 오랜만에 만난 배우 권해효가 “레인 숫자만 총 34개에 이른다.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볼링장”이라고 귀띔해주지 않았더라면 어마어마한 규모가 눈에 확 들어오진 않았을 거예요. 밝은 조명 때문인지 레인이 반짝반짝 빛나더라고요. 평소 에디터와 친분이 있어 현장 가이드를 자처(?)한 권해효는 출연진, 제작진과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볼링 영화 <스플릿> 42회차 촬영 현장의 관전 포인트를 안내해주기까지 합니다. “볼링 중계방송의 전형적인 장면이 있지 않나요. 선수가 레인에 오르기 전에 수건으로 볼을 닦고, 볼을 든 뒤 레인에 서서 핀들을 바라보고, 스텝을 밟아 볼을 미끄러지듯 굴리는 장면들 말이죠. 이 영화는 그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새로운 그림들로 가득해 볼링 영화의 레퍼런스가 될 만할 거예요. 또, 최국희 감독이 신인답지 않게 굉장히 노련하게 현장을 진행하니 유심히 지켜봐주세요.” 영화에서 그는 “도박볼링의 판을 설계하는 백사장”을 맡았다고 하니 캐릭터에 어울리는 현장 가이드답네요.
화려하게 준비된 무대(볼링장)를 보니 대단한 대결이 펼쳐지려나 봅니다. 현장 한구석에선 미술팀이 가짜 돈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5만원권 지폐로 1억원이라고 하네요. “판돈이 1억원짜리 시합인가 보다”라는 에디터의 질문이 귀찮다는 듯 미술팀은 “아뇨, 1억원에서 시작해 판돈을 점점 키워나가는 시합”이라며 콧방귀를 뀝니다. 판돈 규모를 보니 이야기에서 꽤 중요한 대목임을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레인 뒤에 마련된 테이블에는 슈트와 드레스 차림의 남녀 10명이 자리 잡고 점잖게 앉아있고요.
마침 유지태, 이다윗이 각각 연기하는 철종과 영훈 두 선수가 현장에 도착해 레인 앞에서 몸을 슬슬 풉니다. 유지태는 한때 잘 나갔지만, 어떤 일을 겪은 뒤 밑바닥으로 추락한 철종을 맡았습니다. 그가 출연을 결정한 뒤 3개월 동안 볼링만 집중적으로 연습한 것도 철종의 화려했던 과거 때문이었어요. 유지태는 "평소에 볼링을 즐기진 않았다. 캐릭터 때문에 연습한 덕분에 지금은 애버리지가 180점 정도 나온다"고 알려줬습니다. 3개월 바짝 연습해서 180점 나올 정도면 운동 신경이 남다른 것 같아요. 이다윗은 (아직까지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어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자폐 성향의 영훈을 연기합니다. 영훈은 호불호가 확실한 친구입니다. 가령, 자장면, 밀키스를 좋아하는 반면, 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건 되게 싫어해요. 사람들을 신경쓰지 않을뿐더러 사람들과 친해지기 어려운 성격인 이 친구의 재능은 볼링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친다는 사실입니다.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엉뚱한 폼으로 전부 스트라이크를 기록할 정도니 말 다 했죠. 밑바닥 삶을 살고 있는 철종과 영훈이 위험한 내기 볼링에 도전장을 내민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도 둘의 표정이 무척 결연해 보입니다.

이정현이 맡은 희진은 두 남자의 매니저 역할을 합니다. 희진은 철종과 인연이 있고, 철종을 통해 영훈을 알게 되는 설정이라는 것만 알려드릴게요. 볼링 시합이 열기가 더해가는 가운데, 한 남자가 볼링장에 도착했습니다. 요란한 차림 때문인지 멀리서 봐도 정성화인지 알겠더라고요.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 이름이 두꺼비라는 사실을 듣고, 작명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어요. 두꺼비가 나타나자 희진의 표정이 굳어집니다. 그 모습을 보니 두꺼비는 철종과 영훈의 편은 아닌 듯합니다. 아직 자세하게 공개하긴 어렵지만, 두꺼비는 철종의 선수 시절 라이벌로, 철종, 영훈, 희진 세 사람에게 긴장감을 불어넣는 캐릭터라는 것 정도만 말씀드리죠.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두 선수 손을 떠난 볼링 볼 모두 스트라이크, 핀이 나가떨어지는 소리가 무척 경쾌합니다. 철종과 영훈, 두 볼링 천재와 두 남자와 함께 위험한 모험을 하는 매니저 희진이 자신의 인생을 바꿀 마지막 한 판을 그린 <스플릿>은 지난 6월 13일 촬영을 마치고, 현재 후반작업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하반기 개봉 예정입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를 졸업한 신인 최국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
최국희 감독 인터뷰
평소에 볼링을 즐겨 하나.
애버리지가 몇 점인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볼링 공부를 많이 해 이론적으로는 빠삭하다.
반면 실전은 그리 높지 않다.
며칠 전, 볼링장에 갔는데 150점 정도 나오더라.
잘 친다고 하기에도, 못 친다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이야기를 구상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초등학생 아들과 집 앞 시립체육관 볼링장에 피서를 가곤 했다.
어느 날, 아이가 볼링을 치다가 내 뒤로 자꾸 숨기에 옆 레인을 봤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떤 아저씨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우스꽝스러운 폼으로 볼링을 치고 있더라. 그는 볼을 레인에 굴린 뒤 아무도 없는 의자에 하이파이브를 하더라.
그 모습을 본 아들이 겁을 먹은 것이다.
흥미로운 건 말도 안 되는 폼으로 수준급의 점수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상하게도 그 남자의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이미지에 영감을 받아 써 내려간 시나리오 초고는 <허슬러>(1961, 감독 로버트 로즌)의 주인공 폴 뉴먼 같은 루저가 자폐성향의 볼링 천재를 이용해 볼링 도박을 하다가 개과천선하는 누아르였다. 여러 차례의 각색을 거치면서 어두웠던 이야기는 두 천재가 성장하는 이야기가 되면서 지금의 따뜻한 시나리오로 바뀌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참고한 볼링 영화가 있나.
볼링을 소재로 한 영화는 <킹핀>(1996, 감독 피터 패럴리, 바비 패럴리), 구할 수 없는 프랑스 영화 <볼링>(2012, 감독 마리 카스틸 멘션-샤르)밖에 없었다.
코미디 영화 <킹핀>에서 레퍼런스로 삼을 만한 지점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오히려 당구를 소재로 한 누아르 영화 <허슬러>와 그 영화의 속편 격인 <컬러 오브 머니>(1986, 감독 마틴 스콜세지)를 훨씬 많이 돌려봤다.
볼링 중계방송과 다르게 보여주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이야기 내내 볼링 장면이 등장하는 까닭에
볼링 장면을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볼링을 지루하지 않고, 새롭게 보여줄 수 있을까.
볼링공과 핀들의 충돌을 카 액션신으로 비유해 생각하기도 했다.
촬영팀과 고심한 끝에 달리나 슈팅 카를 활용해
볼링공을 따라가며 찍을 수 있는 그립 장비들도 만들었다.
또, 콘티 작업하기 전에 VFX 팀과 함께 CG로 구현할 수 있는 그림도 미리 테스트해봤다.
현장에서 굉장히 여유가 넘쳐 보이더라.
장편 영화 데뷔하게 된 소감이 어떤가.
총 47회차, 2300컷을 찍어야 하는 일정이었다.
계산해보니 회차당 평균 50컷을 소화해야 되더라.
가뜩이나 급한 성격인데 촬영 초반에는 혼자서 용을 쓰며 서둘렀다.
장편 영화 연출 경험이 있는 유지태 씨가 좋은 조언들을 많이 해줬고, 그게 큰 도움이 됐다. 혼자서 용을 쓴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지금 한창 편집하고 있는데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게
정말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철종 역의 유지태 인터뷰
파마와 수염이 눈에 띈다.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17년 전 송지나 작가가 썼던 SBS 드라마 <러브스토리-유실물>에서
수염을 기른 적 있다.
철종이 마냥 어두운 역할은 아니다.
한때 잘 나갔던 볼링 선수였다가 어떤 일을 겪으면서 밑바닥까지 추락해
지금은 허허실실 하는 캐릭터다.
그런 사연을 부여하기 위해 파마며, 수염이며 외양에 변화를 줘야 했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철종은 어떤 남자였나.
원래 시나리오 속 모습은 지금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지금보다 훨씬 어둡고 세상에 삐딱한 남자였다.
시나리오를 읽고 난 뒤 최국희 감독에게 나사가 반쯤 풀린 느낌으로 가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을 했고, 감독님께서 흔쾌히 받아주셨다.
덕분에 괄약근이 풀린 모습이 될 수 있었다. (웃음)
신인 최국희 감독과의 호흡은 어떤가.
감독님께서 애드리브를 많이 주문하신다.
약속한 길이보다 컷 사인을 늦게 해 즉흥적으로 연기를 해야 했다.
감독님도 그걸 즐기시는 것 같고.
지금까지 했던 작품 중에서 가장 애드리브를 많이 한 영화가 될 것 같다.
나중에는 배우들이 카메라를 향해 컷 사인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호흡이 잘 맞고, 서로 편하게 찍고 있다. (웃음)
영훈 역의 이다윗 인터뷰
이야기의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기에 출연을 결정하게 됐나.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연기하기 어려운 역할이었던 까닭에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쉽지 않을 것 같다', '이대로 도망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계속하니
스스로에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다가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영훈은 어떤 캐릭터로 다가왔나.
물음표 투성이었다.
이 친구가 무엇을 원하고,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대목이 시나리오에 없었다.
자장면, 밀키스 등 영훈이 좋아하는 몇 가지만 나열되어 있었을 뿐이었던 까닭에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캐릭터를 준비하는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단순하게 출발했다. 이 친구는 딱 두 가지로 나뉜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스스로에게 왜?라고 많이 물어본 것도 그래서다.
영훈이가 왜 이것을 좋아할까? 왜 저것을 싫어할까?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고민했다.
음식이나 작은 행동부터 차근차근 정리해나갔고,
그렇게 하다 보니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영훈의 어떤 행동들이 어느 정도 추측이 되더라.
영훈의 볼링 폼이 특이하더라.
여러 폼을 두고 고민했다고 들었다.
'잘 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폼을 특이하게'가 폼의 기준이었다.
다양한 폼으로 연습했는데 어떤 폼으로는 도저히 핀을 맞출 수가 없었다.
감독님과 상의한 끝에 지금의 자세가 나올 수 있었다.
실제로 이 자세로 스트라이커를 칠 수 있다. (웃음)
이 영화는 볼링 영화이면서도
철종과 영훈의 버디무비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유지태와의 호흡이 중요했을 것 같은데.
현장에서 (유)지태 선배는 한없이 자상한 선배다. 항상 편하게 해주셨다.
캐릭터들이 서로 감정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었던 까닭에 고민이 많았다.
어느 날, 연기하다가 앞에 서 있던 지태 선배를 봤는데 눈물이 났다.
함께 연기했던 시간들이 쌓였던 거지.
씨네플레이 에디터 펩시, 사진 백종헌(<씨네21> 사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