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사랑을 원한다
<사랑의 단상>은 수많은 짧은 생각들로 이루어진 긴 에세이집이다. 소제목으로 치면 80개에 이른다. 그 단상들을 꼭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영화로 옮겼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을 거다(심지어 크레딧에도 <사랑의 단상>이 영화의 바탕이라고 기록되지 않았다). <렛 더 선샤인 인>은 드니의 영화로서는 드물게 여러 개의 에피소드로 나뉠 수 있는 영화다. 주인공 이자벨(줄리엣 비노쉬)을 중심으로, 그녀가 여러 남자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어떤 지점들을 담은 작품이다. 그 에피소드들이 바르트로부터 필사적으로 구하고자 하는 것은 언어들이다. 여기서 ‘필사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드니가 바르트의 원작을 옮길 공동 각본가로 크리스틴 앙고트를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앙고트는 각본가가 아니라 소설가다. 바르트의 언어로도 모자라 또 한명의 소설가까지 데려오면서 드니는 언어에 목말라한다. 여기서 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생각들이 있다. 드니의 영화로 치면 몸과 경계에 대한 생각들이다. 그녀는 그것을 이미지로 표현하기 위해 미치도록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미지로 표현하면서 그녀가 뭔가 부족해 애타게 찾았던 것, 그것은 말이 아니었을까. <렛 더 선샤인 인>의 첫 시퀀스는 장 뤽 고다르의 <경멸>(1963)을 희화화한 것 같다. 중년의 이자벨과 뱅상은 <금요일 밤>의 긴 인트로가 필요 없다는 듯이 곧바로 침대에서 육체적 관계를 나누는 중이다. 두 사람의 성기가 결합되어 있음에도 그녀는 무언가 불편하다. 그녀는 대화를 시도하지만 그는 끙끙거리기만 반복한다. 마침내 그녀가 “제발, 웃어”라고 말하자, 그는 “앞서 관계했던 남자들과는 금방 느꼈냐?”고 반응한다. 그녀는 그의 뺨을 때리고 돌아누워 흐느낀다. 그들 몸의 거짓 관계는 시작처럼 급박하게 끝나버린다. 우리에게 감독으로 익숙한 자비에 보부아가 연기한 뱅상은 이후에도 그녀에게 육체적 관계를 요구하지만, 그녀는 다시 그와 몸을 나누지 않는다. 진짜 언어로 인해 거짓 관계는 드러나고 만다. 은행가인 뱅상은 그녀의 특별함을 존경한다면서도 자기 아내와 이혼할 마음은 없다고 말하는 속물이다.
바르트는 다수의 예술 작품들이 ‘부재를 버려짐의 시선으로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썼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부재의 담론은 여자가 담당해왔다’고 했다. <렛 더 선샤인 인>은 어떤가. 바르트의 말은 극중 이자벨과 (이혼한 남편) 프랑수아와의 관계 정도에만 해당한다. 그녀는 집에 머물고, 그는 간혹 들러 육체적 관계를 나눈다(하지만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 쫓겨난다). 이 영화에서 남성의 전통적인 역할, 즉 사냥꾼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이자벨이다. 그녀는 사랑을 원한다. “나도 사랑을 하고 싶어, 진짜 사랑을. 어차피 실패할 줄 알아. 하지만 한번쯤은 다를 수도 있잖아.” 극중 그녀의 대사다. 그녀는 은행가 뱅상과 만나다 부르주아의 개 같은 속성을 버리지 못하는 그를 내치고, 매력적인 배우와 재회했다가 하룻밤 관계를 후회하는 겁쟁이에 불과한 그를 떠나보낸다. 현재는 하층민 계급인 실뱅과 미술관에서 근무하는 마르크 사이에서 저울질 중이다. 어쩌면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녀의 욕망뿐이며, 그들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욕망을 채울 도구에 불과한 것 같다. 그녀가 간혹 우는 것도 그들 중 누군가를 잃어서가 아니라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이다. 혹자는 ‘중심에 있는 게 무어 중요한가, 어차피 돌고 도는 관계 속에서 허우적댈 뿐 아닌가’라고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틀린 말은 아니다. 바르트는 ‘사랑의 담론은 항상 동일 층위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어떤 초월도, 구원도, 소설도 존재하지 않는 수평적인 담론이다’라고 쓰지 않았던가. 언제나 사랑의 끝을 단정하는 남자들 사이에서, 사랑을 찾는 그녀는 끊임없이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