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정리하다가 책장 구석에서 우연히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발견했다. 정리를 잠시 뒤로 미루고 열어본 앨범 속에는 치기 어린 나와 옛 친구들의 앳된 모습들이 있었다. 펑퍼짐한 바지통에 뽕이 많이 들어간 어깨, 거기에 마치 맞춘 듯 모두들 입고 있는 롱 코트들. 아직 사내라기보다는 소년이란 말이 더 어울릴만한, 뽀얀 얼굴의 나와 내 친구, 그리고 그 롱 코트들은 뭐랄까 마치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는 뭔가 사내가 되고 싶었고, 어른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다들 롱 코트들을 구해 입고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그땐 왜 그렇게 롱 코트를 좋아했을까? 아마도 이 영화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멍청할 정도로 순진하게 의리를 찾았던, 손해 따위 상관하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 사내들의 이야기.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판타지. 바로 <영웅본색>이다.
줄거리를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강호의 도의를 저버린 배신자에 대한 응징과 가족애’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이는 배경이 현대 홍콩임을 제외하면 클래식한 스타일의 중국 무협소설과도, 그리고 <영웅본색> 바로 이전의 홍콩 무협영화 플롯과도 매우 유사하다. 실제로 <영웅본색>의 감독인 오우삼 역시 <영웅본색> 전에는 무협영화를 연출했던 사람이었고 <영웅본색>의 주인공인 적룡 역시 <영웅본색> 이전에는 무협영화의 주인공으로 유명했던 배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