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정리하다가 책장 구석에서 우연히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발견했다. 정리를 잠시 뒤로 미루고 열어본 앨범 속에는 치기 어린 나와 옛 친구들의 앳된 모습들이 있었다. 펑퍼짐한 바지통에 뽕이 많이 들어간 어깨, 거기에 마치 맞춘 듯 모두들 입고 있는 롱 코트들. 아직 사내라기보다는 소년이란 말이 더 어울릴만한, 뽀얀 얼굴의 나와 내 친구, 그리고 그 롱 코트들은 뭐랄까 마치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는 뭔가 사내가 되고 싶었고, 어른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다들 롱 코트들을 구해 입고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그땐 왜 그렇게 롱 코트를 좋아했을까? 아마도 이 영화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멍청할 정도로 순진하게 의리를 찾았던, 손해 따위 상관하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 사내들의 이야기.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판타지. 바로 <영웅본색>이다.
 
줄거리를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강호의 도의를 저버린 배신자에 대한 응징과 가족애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이는 배경이 현대 홍콩임을 제외하면 클래식한 스타일의 중국 무협소설과도, 그리고 <영웅본색> 바로 이전의 홍콩 무협영화 플롯과도 매우 유사하다. 실제로 <영웅본색>의 감독인 오우삼 역시 <영웅본색> 전에는 무협영화를 연출했던 사람이었고 <영웅본색>의 주인공인 적룡 역시 <영웅본색> 이전에는 무협영화의 주인공으로 유명했던 배우이기도 했다.

영화 초반에서 위조지폐를 만드는 범죄조직의 높은 자리에 있는 송자호(적룡)와 마크(주윤발)는 배신자인 담성(이자웅) 클럽 같은 곳에서 술을 마신다. 이 술이 바로 헤네시 XO.

헤네시는 까뮤, 레미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꼬냑 메이커 중 하나이다. 보리를 발효시켜 증류, 숙성해 만드는 것이 위스키라면 포도를 발효시켜 증류, 숙성해 만드는 것이 꼬냑인데 헤네시는 1765년 아일랜드의 귀족이었던 리처드 헤네시가 꼬냑 지방에 만든 증류소가 기원이다.

리처드 헤네시

루이 15세의 신하였던 리쳐드 헤네시는 전쟁 때문에 프랑스에 들어왔다가 프랑스 꼬냑 지방의 풍광에 매료되어 자리를 잡고 술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프랑스 귀족의 입맛을 사로잡는데 성공한 헤네시는 이후 꾸준히 생산량을 늘리다가 1794년 처음으로 꼬냑을 미국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후 1817년 영국의 조지 4세 왕이 헤네시사에 “Very superior old pale cognac"을 만들기를 요구했고 이것이 바로 꼬냑의 등급 중 하나인 VSOP의 기원이 되었다.

1800년대에 생산되었던 헤네시 꼬냑

이후 샴페인을 생산하는 모엣샹동 사와 합병되어 모엣 헤네시가 되었다가 이후 명품 브랜드인 루이비통과 합병되어 현재는 LVMH 그룹에 속해있다. 참고로 유명한 귀부와인(세미용 품종의 포도 수확을 일부러 늦춰 특수한 회색곰팡이를 포도에 생기게 만든 후 수분을 날려 과즙을 응축시킨 포도를 사용해 만든 와인. 꿀처럼 달콤한 대표적인 디저트 와인이다. 귀부란 고귀한 썩음이라는 뜻) 브랜드인 샤또 디캠 역시 LVMH 소속이다.

꼬냑은 크게 보면 브랜디의 한 종류로 샴페인처럼 프랑스 꼬냑지방에서 만들어지는 브랜디만을 꼬냑이라고 부른다. 스카치 위스키와 다르게 숙성 연수를 숫자로 표기하기보다 등급으로 나눠 붙이는데 이는 증류소의 숙성 연도가 다른 원액들을 섞어서 출하하기 때문이다. VO는 최소 2년에서 11~15, VSOP는 최소 4년에서 21~30, XO는 최소 6년에서 보통 45년 이상 숙성된 원액을 섞어서 만든다.

헤네시에서 생산되는 꼬냑들

위스키와 마찬가지로 제조 후 출시할 때 물, 캐러멜 색소 등을 추가하는 것이 허용되는데 이색적인 것은 설탕 시럽을 추가하는 것도 허용된다. 위스키와 마찬가지로 급격한 수요 증가로 인해 증류소마다 고숙성 원액들이 모자라 최근 품질이 많이 떨어졌고 따라서 올드 보틀의 가치가 나날이 올라가고 있다. 이전 글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혹시 집 술장에 오래된 꼬냑이 있다면 꼭 열어서 맛을 보시길 권유 드린다.

<영웅본색>도 그렇고, <영웅본색> 클리셰의 기원이라고 말하도 될 무협소설과 영화도 그렇고, 일견 뻔한 스토리가 조금씩 형태를 바꾸어 가며 세대를 넘어 사랑받는 이유는 그만큼 그 스토리가 인간이 바라는 바를 정확히 꿰뚫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10대 소녀들의 할리퀸, 아이돌이라는 존재, 무협지 속의 영웅들, 다 이 사회에서 소비 계층들이 원하는 것을 대리만족시켜주는 존재가 아닐까. 상상은 돈이 들지 않으니 말이다. 헤네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술로서도 물론 가치가 있는 좋은 술이지만 LVMH라는 모회사의 이름이 상징하듯 꼬냑에게는, 헤네시에게는 사람의 무언가 조금은 사치스럽고 싶은 정신적인 측면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런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영화에서 굳이 다른 술이 아닌 헤네시 XO를 등장시킨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영웅본색>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건 이런 영화가 필요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거나, 혹은 이 영화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들일 거”라고 말했다 한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10대의 어리고 풋풋했던 판타지를 만족시켜줬던 나의 영웅들을 지금 나이에 만났더라면 그냥 재미있네 이상의 느낌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글을 쓰려고 다시 본 <영웅본색>은 여전히 감동적이었지만 그건 아마 추억 버프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치 내가 이제 무협지를 잘 읽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나이 마흔이 넘어야 갈색 술(위스키나 꼬냑 등의 숙성된 증류주를 이렇게 표현함. 참고로 Brown for men이란 유명한 주류회사가 있죠.)의 진가를 알게 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난다. 글쎄, 꼭 마흔이 넘어야 알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나이가 어느 정도는 들어야 갈색 술의 맛을 알게 되는 것 같기는 하다. 숙성하지 않은 투명한 스피릿(증류주를 지칭합니다)이 그 이름만큼이나 투명한 어린 영혼에게 잘 어울리는 것처럼 진한 갈색의 숙성주들은 그 숙성된 시간만큼 어른으로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준다

10년도 더 전 세상을 등진 장국영은 영화 속에서 지금 나보다 훨씬 더 어린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는 내 머릿속엔 어느새 그때 그 시절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바보짓 했던 기억, 처음 소개팅을 한 친구와 피카디리극장 앞에서 볶음밥을 사 먹었던 기억, 친구들과 처음 나이트를 갔던 기억, 그런 기억들 말이다.
 
졸업앨범을 다시 치우고 정리를 마치고 나니 살짝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은 늙고 변하지만 추억은 시간 속에 사진처럼 남아 이렇게 종종 사람을 지치게 하곤 한다. 간단하게 나이트캡이라도 한 잔 해야 잘 수 있을 것 같아 평소엔 잘 마시지 않는 꼬냑 보틀들에게 눈길을 돌리다 유리병에 언뜻 아들의 얼굴이 비치는걸 보았다. 아빠보다 훨씬 더 좋은 추억을, 헤네시 XO의 향기 같은 격조 있는 추억을 많이 쌓기를.

영웅본색

감독 오우삼

출연 적룡, 장국영, 주윤발

개봉 1986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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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렉 / 술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