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 영화’, ‘외국 영화’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시대이다. 지금도 제작비를 투자하는 국가로 영화의 국적을 구분하고 있어서 ‘미국 영화’로 진출하는 감독들이 많지만, 감독이 갖는 권한에 따라 전혀 새로운 느낌의 영화가 탄생하기도 한다. 영어권 국가로 진출해 좋은 성과를 거둔 감독은 누가 있을까. 미국 영화 전문 매체 ‘테이스트 오브 시네마’(Taste Of Cinema)에서 공개한 비영어권 감독의 영어 영화 10편(링크)을 소개한다.


10
설국열차
봉준호
한국 영화 / 한국인 감독

<설국열차>만큼 다국적 영화가 있을까. 프랑스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국 기업이 한국인 감독을 기용해 할리우드 배우들을 출연시켰다. 여기까지만 해도 세 국가가 언급됐는데, 배우들의 국적까지 구구절절 설명하면 최소 다섯 국가는 넘을 것이다. 극중 빙하기가 도래한 지구의 종말론적 풍경을 생각하면 다국적을 넘어 무국적이란 단어가 더 어울릴 정도다.

봉준호 감독은 한국 영화에서 성취한 감성과 리듬을 SF적 디스토피아에 접목시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그리고 크리스 에반스, 틸다 스윈튼, 존 허트와 송강호, 고아성 등 다양한 배우들을 끌어들여 보는 관객들이 눈을 뗄 수 없는 재미를 선사했다. 물론 계층 간의 갈등을 적절하게 은유한 스토리도 이 영화의 장점이다.

설국열차

감독 봉준호

출연 크리스 에반스, 송강호, 에드 해리스, 존 허트, 틸다 스윈튼, 제이미 벨, 옥타비아 스펜서, 이완 브렘너, 알리슨 필, 고아성

개봉 2013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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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더 랍스터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그리스, 영국, 아일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영화 / 그리스 감독

말 그대로 솔로 지옥, 커플 천국. <더 랍스터>의 세계는 ‘호텔’에서 짝을 만나지 못하면 동물로 변해야 하는 근미래 사회를 그린다. <송곳니>와 <알프스>로 그리스 영화의 신예로 등장한 요르고스 감독이 각국의 지원을 받아 만든 작품으로 콜린 파웰이 아내와 이혼하며 ‘호텔’에 들어간 데이비드 역을 맡았다. 레아 세이두가 호텔에서 탈출한 집단 ‘외톨이’의 리더로, 레이첼 와이즈가 외톨이의 일원으로 출연한다. 이외에도 벤 위쇼, 존 C. 라일리, 제시카 바든, 올리비아 콜맨 등 배우 구경만 해도 흡족한 영화다.

요르고스 감독 특유의 서슬 퍼런 농담들이 살아있는 <더 랍스터>는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각자 이어폰으로 EDM을 들으며 춤추는 장면, 호텔의 사람들의 외톨이를 사냥하는 장면 등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으로 관객들을 이끈다. 감성적인 러브스토리에 냉소적인 블랙 코미디를 뒤섞은 이 영화는 동시대 영화의 모호하고 폭넓은 장르 소화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라 할 수 있다.

더 랍스터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출연 레이첼 와이즈, 콜린 파렐, 레아 세이두

개봉 2015 그리스, 영국, 아일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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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세상 끝과의 조우
베르너 헤어조크
미국 영화 / 독일 감독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은 <아귀레, 신의 분노>, <피츠카랄도> 등 자연의 웅장함과 인간의 광기를 대비시키는 연출로 유명하다. 영화의 배경으로 정글과 오지를 자주 선택한 감독답게, 실제로 자신이 그런 현장으로 간 다큐멘터리도 다수 제작했다. <하얀 다이아몬드>, <그리즐리 맨>, <잊혀진 꿈의 동굴>, <해피 피플: 타이가에서 보낸 1년> 등이 있다. 그중 <세상 끝과의 조우>는 미국국립과학재단의 도움을 받아 남극 맥머도 기지에서 6개월간 머무른 여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남극에서 만날 수 있는 풍광은 아름답다. 거기에 헤어조크 감독은 그곳에 거주하는 수많은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 자연에 매혹되는 인간의 정서까지 포착한다. 현재 남극 기지부터 초기 남극을 탐험한 스콧, 아문센, 섀클턴의 시대까지, 거대한 빙산에서 심해까지 아우르는 <세상 끝과의 조우>는 모든 생명체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경이를 재조명한다. 잘 만든 다큐멘터리가 그렇듯,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세상 끝과의 조우

감독 베르너 헤어조크

출연 베르너 헤어조크

개봉 200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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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스토커
박찬욱
미국, 영국 영화 / 한국 감독

복수 3부작과 <박쥐>를 마치고 박찬욱 감독은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석호필’(스코필드)로 유명한 배우 웬트워스 밀러가 쓴 <스토커>를 위해 할리우드로 향했다. 10대 인디아(미아 와시코브스카)와 어머니 이블린(니콜 키드먼),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삼촌 찰리(매튜 구드). 마치 가족 드라마처럼 시작하는 이 영화는 섹슈얼한 분위기의 스릴러라는 본색을 드러내면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배우들의 호흡도 거침없다. 미아 와시코브스카는 소녀에서 여성으로 거듭나는 이 기묘한 성장영화에서 특유의 모호한 기운을 한껏 내뿜었고, 매튜 구드는 찰리 역을 완벽하게 해내며 인디아와 이블린뿐만 아니라 관객들까지 사로잡았다. 니콜 키드먼 역시 한동안 시대극에 소비되던 자신의 이미지를 쇄신하는데 성공했다.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로 거둔 성취라면 할리우드에 정정훈 촬영감독의 자리를 마련해줬다는 것. <스토커> 이후 <블러바드>,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를 거쳐 <그것>, <커런트 워>, <호텔 아르테미스> 같은 메이저 영화에도 정정훈 촬영감독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게 됐다.

스토커

감독 박찬욱

출연 미아 와시코브스카, 매튜 구드, 니콜 키드먼

개봉 2013 미국,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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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유스
파울로 소렌티노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영화 / 이탈리아 감독 

은퇴한 지휘자 프레드 벨린저(마이클 케인)와 자신의 유작이 될 영화를 준비 중인 믹 보일(하비 케이틀). 고급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을 그린 이 영화는 ‘유스’(Youth, 젊음)라는 역설적인 제목이 눈에 띈다.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은 이 두 예술가의 노년기를 묘사하면서 삶의 내부에서 경계 없이 뒤섞인 예술과 감정, 시간과 고독을 아름답고 처연한 경치로 완성시켰다.

소렌티노 감독은 2011년 <아버지를 위한 노래>로 이미 영어권 영화를 만든 바 있다.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그레이티 뷰티> 직후 작품인 <유스>로 한층 더 노련해졌다. 마이클 케인과 하비 케이틀의 명연기는 물론이거니와 미학적인 배치의 장면들, 고요한 삶과 충돌하는 욕망, 예술이란 매체로 기억되는 인간의 삶 등을 다뤄 관객들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유스

감독 파올로 소렌티노

출연 마이클 케인, 하비 케이틀, 레이첼 와이즈, 폴 다노, 제인 폰다

개봉 2015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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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도그빌
라스 폰 트리에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독일, 노르웨이, 핀란드 영화 / 덴마크 감독

만드는 작품마다 조용히 넘어간 적 없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어둠 속의 댄서>를 본 몇몇 관객들이 “미국 땅을 밟은 적도 없으면서 무슨 미국 배경 영화냐”라고 불평하자 “미국인들이 모로코를 잘 알아서 <카사블랑카>를 만든 게 아니지 않나”라고 반박하기 위해 <도그빌>을 만들었다. 그의 ‘반박’이 유효한지는 모르겠지만 <도그빌>은 꽤 성공적으로 새로운 형식을 완성했고, 공동체의 이기심과 부조리를 정확히 관통한 영화 중 하나가 됐다.

록키 산매에 자리한 마을 ‘도그빌’은 별다른 세트 없이 바닥에 그려진 선과 몇몇 오브제로만 꾸며졌다. 관객은 연극 무대를 보는 듯한 시선을 가지게 된다. 또 도그빌 안에서 사건을 목격하는 듯 현실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레이스 역의 니콜 키드만은 <디 아워스>로 여우주연상을 휩쓴 이듬해에, <도그빌>로 환경에 종속당하며 무너져내리는 인간의 모습을 세심하게 표현해 명배우라는 이름표를 확실히 했다. 니콜 키드먼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가 <만덜레이>로 ‘미국 3부작’을 이어갔으나 아쉽게도 마지막 편은 지금도 나오지 않았다.

도그빌

감독 라스 폰 트리에

출연 니콜 키드먼

개봉 2003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독일, 노르웨이, 핀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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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차이나타운
로만 폴란스키
미국 영화 / 폴란드 감독

이제는 아동 성범죄자로 영화계에서도 제명당한 수준인 로만 폴란스키 감독. 하지만 과거 그는 일가족이 살해당한 비극(찰스 맨슨의 폴란스키 가 살인사건)에도 영화계를 지킨 거장이었다. <차이나타운>은 그가 그 비극을 겪은 후에 완성시킨 명작 중 하나다. 지독하게 비극적인 사건을 겪고 비윤리적인 사건을 저지른 유태계 폴란드인 감독이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타운과 함께 영화 사상 가장 완벽한 시나리오, 가장 미국적인 영화를 만들었다는 건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사립 탐정 제이크(잭 니콜슨)는 의뢰를 받아 사건을 조사하던 중, 의뢰인이 가짜고 감시 대상이 죽는 등 심상치 않은 일에 말려들어 점차 더 거대한 배후 세력을 마주하게 된다. <차이나타운>은 필름 누아르의 형식(주인공이 헤어날 수 없는 사건에 발을 들이는 것)과 물음(비윤리적인 것을 용인할 수 있는가)을 훌륭하게 계승했다. 더불어 잭 니콜슨과 페이 더너웨이의 열연, 냉소적인 대사들, 명백하게 대비되는 사막과 도시의 밤 등 세심하게 설계돼 유기적으로 화학 작용을 일으키는 것들은 <차이나타운>이 지금까지도 명작이라 추앙받는 이유를 절감하게 한다.

차이나타운

감독 로만 폴란스키

출연 잭 니콜슨, 페이 더너웨이

개봉 1974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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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마데우스
밀로스 포만
미국 영화 / 체코 감독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음악가 모차르트와 그를 시기한 살리에르. <아마데우스>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연출한 밀로스 포만 감독이 체코인이란 건 다소 생경할 수 있다. <블랙 피터>, <소방수의 무도회> 등을 연출해 ‘체코 뉴웨이브’ 사조를 열었던 포먼은 할리우드에 와서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헤어>, <발몽>, <맨 온 더 문> 등 다양한 영화를 완성시켰다. 

그중 <아마데우스>는 원작자 피터 쉐퍼가 직접 각색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종잡을 수 없는 모차르트와 그를 바라보는 살리에리의 질투, 열등감을 정확하게 조명해냈다. 체코에서부터 함께 호흡을 맞춘 미로슬라브 온드리섹 촬영감독은 오페라 무대와 정신 병동을 탁월하게 대비했으며, 모차르트를 맡은 톰 헐스의 경박한 웃음소리와 살리에리의 F. 머레이 아브라함의 열등감에 사로잡힌 표정은 신과 인간과 재능을 다룬 이 드라마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었다.

아마데우스

감독 밀로스 포만

출연 F. 머레이 아브라함, 톰 헐스, 엘리자베스 베리지

개봉 1984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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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디 영 원
루이스 부뉴엘
멕시코, 미국 영화 / 스페인 감독 

조르주 멜리에스(<달나라 여행>)가 영화의 기술을 오락적으로 활용한 예라면, 루이스 부뉴엘은 그 기술을 예술적으로 사용한 1세대 감독이다. 그와 살바도르 달리가 공동작업한 <안달루시아의 개>는 인간의 무의식을 영화란 형식으로 승화시켰다. 이후 그는 멕시코로 건너가 <잊혀진 사람들>를 촬영, 1951년 제4회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스페인 내전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다음 최종적으로 멕시코 시민권을 얻었다.

사실 부뉴엘 감독은 <세브린느>,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등 비영어권 영화로 더 유명하다. 하지만 초현실주의를 내려놓고 인종차별이 만연한 미국 남부를 묘사한 <디 영 원>은 그의 또 다른 면모를 느낄 수 있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누명을 쓴 흑인 음악가와 백인 남자, 어린 소녀 사이의 일련의 사건이 해변가 마을의 목가적 풍경 속에서 펼쳐질 때, 관객들은 그 서늘한 광경에 루이스 부뉴엘이 왜 거장인지 알게 될 것이다.

디 영 원

감독 루이스 부뉴엘

출연 자카리 스콧, 버니 해밀턴

개봉 1960 멕시코,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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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욕망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영국, 이탈리아 영화 / 이탈리아 감독

세계 3대 영화제 최고상을 모두 석권한 최초의 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거장 중의 거장이라 칭송받는 이유는 영화를 자신의 언어로 재편해내는 능력 때문이다. 모국인 이탈리아에서 제작한 수많은 영화(이를테면 <외침>, <밤>, <붉은 사막> 등)도 좋지만 영어권에서 처음으로 연출한 <욕망> 역시 그의 위대한 작품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사진사 토마스는 공원을 산책하던 중 어느 커플의 키스 장면을 찍게 된다. 사진에 찍힌 여자는 토마스에게 필름을 돌려줄 걸 요구하지만, 토마스는 몰래 필름을 빼돌려 인화해본다. 사진 속엔, 커플 뒤 수풀에 권총을 든 의문의 남자가 찍혀있다.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질 법한 이 스토리에서 안토니오니 감독은 허구와 실재의 교묘한 경계선을 형상화해 관객들에게 물음표를 남겼다. 토마스가 사진으로 시간을 재구성하는 장면은 영화의 몽타주 형식을 연상시킨다. 영화를 해체하고 재구조화하는 형식이 돋보이고, 관객이 스크린으로 느낄 수 있는 오감을 분열시킨 마지막 엔딩 장면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욕망

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출연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사라 마일즈, 데이빗 헤밍스

개봉 1966 영국,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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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