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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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스티븐 쉬블
출연 류이치 사카모토
개봉 2017 일본
2001년 9월 11일. 뉴욕에 있는 세계 국제무역 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질 때 류이치 사카모토는 현장에 있었다. 눈앞에서 그 거대한 빌딩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며 큰 충격을 받은 그의 머릿속에 음악은 없었다. 류이치 사카모토뿐이 아니었다. 그 엄청난 사고 속에서 음악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 뒤에 그가 ‘음악’이란 걸 들은 건 일주일 뒤 한 청년이 거리에서 비틀스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걸 보면서였다. 그때 그는 ‘세상이 평화롭지 않으면 음악이나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2014년 인두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밝힌 류이치 사카모토는 음악 활동을 중단했다. 2015년 야마다 요지 감독의 영화 <어머니와 살면>의 사운드트랙을 만들며 복귀한 그는 건강 문제에 조심스러웠다.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양치질도 무척 열심히 한다. 삶의 중대한 고비를 넘긴 그는 언제까지 살지 모르겠지만 음악에 대한 간절함은 더 커졌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부끄럽지 않을 걸 남기고 싶어 한다.
모든 것이 음악을 위한 길
류이치 사카모토를 다룬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거칠게 나누자면 이 두 가지 큰 전환점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가 반핵 집회에 계속 나서는 것도, 환경 운동에 관심을 갖는 것도, 남북 화해에 축하를 보내는 것도 ‘세상이 평화롭지 않으면 음악이나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암과 맞닥뜨렸던 그는 이제 더 새로우면서도 자연스러운 소리를 찾아다닌다.
‘자연스러움’이 그에겐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발자국 소리 등 그 모든 소리가 그에겐 이제 음악이 된다. 쓰나미에도 부서지지 않은 피아노 얘기를 듣고 직접 현장에 찾아간 그는 그 피아노를 피아노 송장이라 부른다. 조율되지 않아 이상한 소리를 내지만 그는 그 피아노를 인간이 억지로 조율한 게 아니라 자연이 조율해준 거라 말한다. 컵으로, 또 활로 심벌을 긁어서 소리를 내고, 플라스틱 통을 뒤집어쓴 채 비를 맞으며 새로운 소리를 들어보려 한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새로운 소리를 찾는 여정 그 자체다. 그 새로운 소리로 음악을 완성하려 한다. 바꿔 말하면 그가 환경 운동을 하고 반핵 운동을 하는 것은 결국 음악을 위한 길이다.
단순한 듯 우주만큼 넓은 세계
영화에선 1984년의 류이치 사카모토 모습도 나온다. 그가 몸담고 있던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YMO)의 음악은 당시로선 최첨단이었다. 시대 흐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당시 그의 음악은 지금 들어도 신선한 사운드지만 그는 이제 많이 변했다. 그가 지금 원하는 소리는 자연적이면서 또 영화적인 것이다. 그는 영화에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를 계속해서 거론하며 영화 그 자체가 음악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준비하고 있는 앨범을 가상의 타르코프스키 감독 영화의 영화음악이라 생각하며 만들 거라 덧붙인다. 그 앨범은 2017년 나온 <에이싱크(Async)>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의 사운드트랙은 존재하지 않지만 결국 류이치 사카모토가 영화에서 얘기하는 것들은 <에이싱크>에 집약돼있다. 아름다운 선율도 있고 이를 감싸는 다양한 소리들이 있다. 영화에서 류이치 사카모토가 혼자 피아노로 연주하는 <에이싱크>의 수록곡 ‘솔라리(Solari)’의 멜로디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의 트리오 버전을 비롯한 그의 연주가 영화 안에서 더 감동적으로 들린다. 영화음악을 만들게 된 배경을 듣는 것 역시 영화의 한 재미다.
그는 이제 집에 있을 때 피아노에 앉아 바흐의 곡을 연주한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나 평균율 같은 곡들이다. 그에게 바흐는 늘 새로운 발견을 하게 해주는 끝없는 깊이를 가진 바다이다. ‘코다(coda)’는 악곡의 끝에 붙는 종결 부분을 뜻한다. 그의 음악 인생의 코다는 어떤 음악일까. 바흐에서 발견하는 단순한 듯하지만 우주만큼이나 넓은 세계, 그리고 자연과 사물에서 얻는 소리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를 보며 그에게 또 하나의 기대를 품게 됐다. 언젠가 그가 이 두 가지가 충족되는 멋진 앰비언트 음악을 만들어줬으면 하는 기대를.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