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중 누군가 죽는다

<비거 스플래쉬>. 제목만 들어서는 어떤 영화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거대한 물보라? 괴물 인어 이야기? 계통 없는 추측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그리고 영화를 본다. 아뿔싸. 혹여 영화 스틸컷만 보고 멜로드라마가 아닐까 예상했던 관객들을 철저히 배반하는 영화라는 걸 깨닫게 되리라.

그렇다. 이 영화는 '수영장 살인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주인공들의 미스터리한 감정 상태를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영화다. 살인사건과 미스터리, 욕망 따위의 단어를 써야만 설명 가능한 영화인데 또 사건 중심의 영화가 아니라서 의미를 유추해야 한다. 내가 혹시 놓치고 지나간 장면은 없었을까. 생략 혹은 비약으로 뒤덮여 있는 영화다.

이쯤에서 다시 영화의 제목을 상기해본다. '비거 스플래쉬'는 어쩌면 영화의 주인공인 4명의 가슴속을 뒤흔들고 지나간 어느 여름날의 잔혹한 사건을 일컫는 정도의 말이 아닐까.

사건 개요 1: 사건 발생 직전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록스타 마리안(틸다 스윈튼)이 그녀의 연인인 폴(마티아스 쇼에나에츠)과 함께 이탈리아의 어느 섬에서 휴가를 즐기는 중이다.

얼마 전까지 투어 공연을 돌던 마리안은 성대가 결절됐는지 아예 목소리가 한 마디도 안 나올 정도로 목 상태가 악화되어 요양 중이다. 그녀는 당장 말을 할 수가 없다. 허나 쉴 수 있는 주변 환경은 너무나 좋다. 한적한 섬마을 주민들은 친절하며 사소하게나마 신경 쓸 일이 전혀 없다.

그런데 사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날 마리안과 예전에 사귀었던 동료 프로듀서 해리(랄프 파인즈)가 자신의 딸 페넬로페(다코타 존슨)를 마리안의 휴양 빌라에 데리고 들어온 게 아닌가. 이후부터 네 사람의 관계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사건 개요 2: 누가 시작했나

마리안의 옛 연인이자 그녀의 음악적 동료인 프로듀서 해리는 그녀와 영혼의 동반자인 양 서로 긴밀하게 교류하며 뮤지션과 프로듀서의 관계를 유지해왔다.

두 사람이 결별한 이유에 대해 영화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대개의 연인 사이가 그러하듯 둘은 자연스럽게 헤어졌을 것이고, 타이밍 좋게 해리와 업무 관계에 있던 영상 아티스트 폴이 마리안과 친분을 쌓게 된다. (의도적으로 해리가 마리안과 폴을 만나게 해준 면도 있다.) 당시에는 해리 역시 폴과 마리안의 앞날을 축복해줬으리라 짐작되는 장면이 영화 초반에 플래시백으로 펼쳐진다.

그런데 마리안과 폴의 휴양지로 느닷없이 찾아온 해리의 태도가 좀 이상하다. 그는 어떻게든 마리안과 단둘이서만 있을 기회를 엿보려 하는 듯하다. 마리안과 폴에게 의중도 묻지 않고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모은다거나 시끄럽게 춤추고 노래하고 논다든가. 계속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행동을 한다. 애초 성격이 이기적이라서 그렇다는 듯 마리안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폴은 그가 껄끄럽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해리가 데리고 온 그의 딸 페넬로페는 폴에게 자꾸만 추파를 던진다. 아직 20대 초반의 당돌한 이 아가씨는 자신의 욕정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녀의 행동은 폴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 위협으로 다가온다.

사건 개요 3: 누가 죽었나

그날은 네 사람 모두 이상했다. 해리와 함께 장을 보던 마리안은 자꾸만 다가오는 해리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옛정도 있고 오랜 세월 함께했던 친구이기에 그녀 입장에서는 해리를 함부로 대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의 마음을 무작정 받아 줄 수도 없는 노릇. 어쨌든 그녀는 예의를 다한다.

폴 역시 무턱대고 달려드는 페넬로페를 애써 외면하려고 무진장 애를 쓴다. 마리안과의 관계가 식은 것도 아니고 자기는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데 해리와 페넬로페의 접근이 맘에 들지 않는다. 어쨌든 폴도 페넬로페의 접근을 의식적으로 거부한다. 아니, 거부했는지 안 했는지 영화에서는 자세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날 밤, 누군가 수영장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

사건 개요 4: 의심과 숨김

경찰은 살인사건의 가능성도 열어둔 채 수사를 진행한다. 주인공들은 수사가 진행되면서 휴양 당시에는 전혀 몰랐던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 작은 섬에 정체 모를 난민들이 산다는 것이다.

위협적인 존재가 그들을 둘러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로 휴양을 즐기던 그들에겐 깜짝 놀랄 소식. 용의자가 세 사람에서 불특정 다수로 늘어나게 된다. 영화는 이때부터 짐작할 수 없는 방향으로 매섭게 돌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수사를 진행하는 경찰서장이 마리안의 광팬이라는 점이다. 그는 마리안을 사심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그저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바라보고 있나. 관객들은 헷갈리기 시작할 것이다.

사건 정리 1: 누군가는 안다

이들 네 사람 중 누군가는 사건의 진실을 눈치챘을 수도 있다. 혹은 의심은 하지만 덮어두자고 마음먹을 수도 있다. 누구는 자동차 열쇠를 숨겼고 누구는 나이를 속였고 누구는 범행사실을 숨겼다.

이들은 각자 자신들의 속마음에서 몰아치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좌절하거나 안도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왜 이들은 느닷없는 살인사건에 연루된 것일까. 한가하게 요양이나 할 셈으로 찾은 휴양지에서 이들은 왜 '비거 스플래쉬'를 만난 것일까.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삶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이들이 범죄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가 치밀어오르는 걸 참지 못하는 성격도 아닐텐데. 너무나 고상한 예술가들이면서 삶의 여유도 마음껏 부릴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인데. 과연 누가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을까.

사건 정리 2: 잘못은 없다?

그렇다면 누구의 잘못일까. 사건의 전말을 알고도 숨기는 이가 잘못일까. 어떤 이유에서건 살인을 저지르게 된 당사자의 잘못일까. 사건은 오리무중이다. 수많은 궁금증을 뒤로 한 채 영화는 (별다른 설명 없이) 문을 닫아버린다. (그럼 감독이 잘못한 걸까.)

다만 머릿속을 떠도는 이미지는 하나 있다. 수많은 의문점을 풀어줄 열쇠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바로 유려한 카메라워크다. 사람들의 제각각 뻗어 있는 욕망의 크기나 형태를 몽땅 빨아들이기라도 하려는 듯 카메라는 사방팔방을 비추면서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한다.

뭔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계속 보여주고 싶어 안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찍히는 어떤 사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고 있는 시선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고나 할까.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대표작, <비거 스플래쉬>(1967)
그렇다면, 도대체 <비거 스플래쉬>는 무슨 영화란 말인가. 답답한 마음에 감독의 인터뷰를 구글링해서 찾아 읽어본다. 그런데 대뜸 화가 이름 하나가 등장한다. 데이비드 호크니. 영국의 팝아트 화가다. 루카 구아다그노 감독은 이 화가의 그림 중 '비거 스플래쉬'라는 그림을 보면서 제목을 떠올렸다고 한다.
이 그림 한 장에서 루카 감독은 고급빌라 내 수영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살인사건과 인물의 미스터리 한 관계의 탐구, 그러니까 자크 드레이 감독의 1969년작 <수영장>과 그것을 리메이크한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스위밍풀>을 또다시 리메이크하는 작업의 전체 구상도를 발견한 것이다.

또한, 루카 감독은 폭발하는 욕망의 힘이 우리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평소에 많은 생각을 갖고 있었고, 또 그것이야말로 영화적인 매력이 담긴 소재라고 생각했다고 밝힌다.

텅빈 수영장 한가운데 몰아치는 물결을 만든 이는 누구일까. 저 물 속에 누가 들어가 있을까. 그러니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영화인 것일까. 아니면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말하는 영화인 것일까.

추신: 감독이 <비거 스플래쉬>의 연출 의도를 직접 밝힌 인터뷰에서 또 언급한 이름은 바로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이다. <비거 스플래쉬>는 감독 스스로가 밝혔듯이 "그 자체로 '영화'인 히치콕 감독"의 영화가 주는 감흥에 도달해보려던 시도가 아닐지. 거기에 도달했는지 판단하는 건 관객의 몫이리라.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차기작은 <서스페리아>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가로등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