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밀은 레드 제플린 혹은 엠 워드(M. Ward)의 노래를 들으며 거리를 배회할 때, 언제나 에비앙 물통에 넣은 보드카를 홀짝거리며 익숙한 풍경에서 발현된 기억을 곱씹는다. 카메라는 카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비춘다. 어린 시절 작은 손가락으로 여동생을 긁었던 일, 청소용품으로 가득한 카트, 천장에 생긴 틈 등 카밀의 기억이 슬라이드 쇼처럼 지나간다. 떠올리는 이미지에 대한 전후 사정은 필요한 것들만을 전하는데, 무의식에 자리 잡은 어느 순간들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빅 리틀 라이즈> 또한 비슷한 기법을 사용했다. 오드리와 엘비스 모금 행사가 있던 밤에 벌어진 일을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 오프닝을 떠올려보자. 빨갛고 파란 경찰차 불빛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성들의 얼굴을 비춘다. 구체적인 암시는 없어도 누군가 죽었다는 심각한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챌 수 있다. 다만 누가, 왜 죽었는지 알지 못할 뿐이다. 장 마크 발레는 <몸을 긋는 소녀>에서 보다 폭넓게 이미지를 전달하지만, 정보는 철저히 숨기는 연출 방식을 고수한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하게 느낄 때까지.
<빅 리틀 라이즈>는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사건의 전말을 보여준다. 보니(조 크라비츠)가 여성들과 몸싸움을 벌이던 페리(알렉산더 스카스가드)를 계단에서 밀어 죽였다는 정황이 밝혀진다. 이때 페리가 셀레스트(니콜 키드먼)를 폭행하는 것을 막으려는 여성들과 파도가 해변에 몰아치는 장면이 겹치면서 그때 당시의 광란의 순간을 포착하는 동시에 세부 사항을 정확히 집어내는 것을 어렵게 한다. 이전 장면에서는 제인(쉐일리 우들리)이 몇 년 전 자신을 강간한 사람이 페리라는 것을 깨닫고 총을 겨누는 듯한 장면이 상상과 진실 사이를 오간다. 제인은 실제로 페리에게 총을 겨누지 않았지만, 드라마는 실제로 벌어진 일을 다루기 전에 제인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일을 계속해서 묘사한다.
<몸을 긋는 소녀>는 상상과 현실을 한두 번 오가지 않는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과거 동생이 발작을 일으켰을 때 엄마를 찾아 나선 어린 카밀의 뒤를 현재의 카밀이 따라 방을 나서는데, 현재로 돌아오면 방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텅 비어 있다. 드라마는 이와 같은 식으로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교차한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기억, 상상, 현실의 경계는 <빅 리틀 라이즈>와 달리 구멍이 뚫린 곳이 많다. 그 예시로, 세인트루이스를 떠난 카밀이 윈드 갭으로 향하는 장면을 보면 된다. 고속도로 옆에 세워진 표지판에 ‘당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출구’(Last Exit to Change Your Mind)라고 적혀 있는데, 이 문구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두 작품에서 음악은 사람들의 관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빅 리틀 라이즈>에서 제인은 이어폰을 낀 채 조깅을 하는데, 마치 음악이 그녀를 계속 달리게 하는 원동력처럼 작용하는 것을 암시한다. <몸을 긋는 소녀>의 한 에피소드에서 카밀은 아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친구와 함께 듣기 위해 이어폰을 공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얀색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여기서 나가자”라고 말하는데, 이 사소한 행위는 카밀에게 장거리 여행을 나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뜻한다.
<몸을 긋는 소녀>가 음악과 배경을 결합하는 방식은 <빅 리틀 라이즈>보다 한 단계 상승했다 할 수 있다. 드라마는 이런 기법을 사용할 때 안개가 서린 듯 흐릿한 톤으로 연출하는데, 마치 습기 많은 여름의 끝자락에 있는 듯한 기분이거나 혹은 장시간의 음주 이후 알딸딸한 취기에 스르르 눈이 감기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 때문에 여름의 열기와 취기 때문에 정신이 모호한 카밀의 기분으로 드라마를 보게 된다. 카밀이 운전대를 잡고 생각을 정리하며 음악을 마구 돌려듣는 장면이 꼭 그러하다.
카밀이 레드 제플린의 ‘인 더 이브닝’(In The Evening)을 들으며, 윈드 갭의 오래된 주택가를 지나는 장면은 아직도 뇌리에 강렬히 남아있다. 밖에서 노는 아이들은 없고, 어떤 집 앞에 있는 소녀의 실루엣만 보이는 풍경을 통해 이 마을이 어딘가 수상하다는 기분을 듬뿍 받는다. 때마침 흘러나오는 레드 제플린의 노래는 공허하게 붕 뜬 기분을 유발하고, 괴이한 향수병을 자극하며 감정을 가라앉힌다. 이 장면은 그저 기억에 남을 뿐 아니라 무의식을 파고들어 뿌리까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