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쳐(Vulture) 리프린트 계약을 맺고 번역한 콘텐츠를 편집한 글입니다. ( 체이니
*
 글은 < 리틀 라이즈>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몸을 긋는 소녀>
몸을 긋는 소녀

출연 에이미 아담스, 패트리시아 클락슨, 엘리자베스 퍼킨스, 매디슨 대번포트, 크리스 메시나, 맷 크레이븐, 윌 체이스, 잭슨 허스트, 제니퍼 아스펜

방송 2018, 미국 HBO

상세보기

HBO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몸을 긋는 소녀>는 사람을 매혹시키는 살인 미스터리가 인상적이다. 두 작품은 각각 리안 모리아티와 길리언 플린 소설을 원작으로 미스터리의 중심에 선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결정적인 공통점은 장 마크 발레가 전편 연출을 맡았다는 점이다.

두 작품은 여러모로 비슷하다. 우선 배우들의 무게감이 상당하다. <빅 리틀 라이즈>는 니콜 키드먼과 리즈 위더스푼이 주연을 맡았고, <몸을 긋는 소녀>는 에이미 애덤스와 패트리샤 클락슨이 중심인물로 나섰다. 전혀 다른 사건과 주제의 미스터리를 다루지만, <몸을 긋는 소녀>에서 주인공의 어머니 아도라를 맡은 패트리샤 클락슨은 마치 <빅 리틀 라이즈>에서 리즈 위더스푼이 연기한 매들린의 나이 들고 어두워진 버전 같다. 생각해보면, 매들린은 극도로 뒤틀린 테네시 윌리엄스의 연극에 나올 법한 인물이기도 하다.  인물들이 거주하는 마을은 주민들이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좌우하는 폐쇄적인 성향이 짙고, 여성들은 유달리 관습적인 여성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한다. 인물을 다른 공간이나 시점으로 보낼 때 음악을 적극 활용한다는 사실도 흡사하다. <몸을 긋는 소녀>를 보자마자 <빅 리틀 라이즈>를 처음 봤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빅 리틀 라이즈>를 처음 봤던 당시 굳이 다른 드라마를 볼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처럼 <몸을 긋는 소녀>도 단숨에 나를 매료시켰다.


<
몸을 긋는 소녀>는 엄밀히 말하면 전작과 매우 다른 결의 드라마다. 분위기는 훨씬 어두워졌고, 남부 고딕풍의 작은 마을은 해안가 부촌 몬테레이처럼 매혹적이지 않다. 하지만 <몸을 긋는 소녀><빅 리틀 라이즈>에서도 자주 나왔듯 의식의 흐름, 악몽의 미학, 비선형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사로잡는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시각적 언어는 더욱 대담하게 느낄 정도다. 사람을 취하게 하려고 만든 드라마가 아닐 텐데도 계속 보고 있자면 취하는 기분이 든다. 작은 마을에서 살해된 두 소녀의 진실을 찾고자 미주리 윈드 갭으로 돌아온 카밀(에이미 아담스)이 거의 모든 장면에 취해 있기 때문에 그런 걸까.

<빅 리틀 라이즈>
빅 리틀 라이즈

출연 리즈 위더스푼, 니콜 키드먼, 쉐일린 우들리,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로라 던, 아담 스콧, 조 크라비츠, 제임스 터퍼, 캐서린 뉴튼

방송 2017, 미국 HBO

상세보기

카밀은 레드 제플린 혹은 엠 워드(M. Ward)의 노래를 들으며 거리를 배회할 때, 언제나 에비앙 물통에 넣은 보드카를 홀짝거리며 익숙한 풍경에서 발현된 기억을 곱씹는다. 카메라는 카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비춘다. 어린 시절 작은 손가락으로 여동생을 긁었던 일, 청소용품으로 가득한 카트, 천장에 생긴 틈 등 카밀의 기억이 슬라이드 쇼처럼 지나간다. 떠올리는 이미지에 대한 전후 사정은 필요한 것들만을 전하는데, 무의식에 자리 잡은 어느 순간들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
빅 리틀 라이즈> 또한 비슷한 기법을 사용했다. 오드리와 엘비스 모금 행사가 있던 밤에 벌어진 일을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 오프닝을 떠올려보자. 빨갛고 파란 경찰차 불빛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성들의 얼굴을 비춘다. 구체적인 암시는 없어도 누군가 죽었다는 심각한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챌 수 있다. 다만 누가, 왜 죽었는지 알지 못할 뿐이다. 장 마크 발레는 <몸을 긋는 소녀>에서 보다 폭넓게 이미지를 전달하지만, 정보는 철저히 숨기는 연출 방식을 고수한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하게 느낄 때까지.

<
빅 리틀 라이즈>는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사건의 전말을 보여준다. 보니(조 크라비츠)가 여성들과 몸싸움을 벌이던 페리(알렉산더 스카스가드)를 계단에서 밀어 죽였다는 정황이 밝혀진다이때 페리가 셀레스트(니콜 키드먼)를 폭행하는 것을 막으려는 여성들과 파도가 해변에 몰아치는 장면이 겹치면서 그때 당시의 광란의 순간을 포착하는 동시에 세부 사항을 정확히 집어내는 것을 어렵게 한다. 이전 장면에서는 제인(쉐일리 우들리)이 몇 년 전 자신을 강간한 사람이 페리라는 것을 깨닫고 총을 겨누는 듯한 장면이 상상과 진실 사이를 오간다. 제인은 실제로 페리에게 총을 겨누지 않았지만, 드라마는 실제로 벌어진 일을 다루기 전에 제인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일을 계속해서 묘사한다.

<
몸을 긋는 소녀>는 상상과 현실을 한두 번 오가지 않는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과거 동생이 발작을 일으켰을 때 엄마를 찾아 나선 어린 카밀의 뒤를 현재의 카밀이 따라 방을 나서는데, 현재로 돌아오면 방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텅 비어 있다. 드라마는 이와 같은 식으로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교차한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기억, 상상, 현실의 경계는 <빅 리틀 라이즈>와 달리 구멍이 뚫린 곳이 많다. 그 예시로, 세인트루이스를 떠난 카밀이 윈드 갭으로 향하는 장면을 보면 된다. 고속도로 옆에 세워진 표지판에 ‘당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출구’(Last Exit to Change Your Mind)라고 적혀 있는데, 이 문구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두 작품에서 음악은 사람들의 관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빅 리틀 라이즈>에서 제인은 이어폰을 낀 채 조깅을 하는데, 마치 음악이 그녀를 계속 달리게 하는 원동력처럼 작용하는 것을 암시한다. <몸을 긋는 소녀>의 한 에피소드에서 카밀은 아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친구와 함께 듣기 위해 이어폰을 공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얀색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여기서 나가자”라고 말하는데, 이 사소한 행위는 카밀에게 장거리 여행을 나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뜻한다.

<
몸을 긋는 소녀>가 음악과 배경을 결합하는 방식은 <빅 리틀 라이즈>보다 한 단계 상승했다 할 수 있다. 드라마는 이런 기법을 사용할 때 안개가 서린 듯 흐릿한 톤으로 연출하는데, 마치 습기 많은 여름의 끝자락에 있는 듯한 기분이거나 혹은 장시간의 음주 이후 알딸딸한 취기에 스르르 눈이 감기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 때문에 여름의 열기와 취기 때문에 정신이 모호한 카밀의 기분으로 드라마를 보게 된다. 카밀이 운전대를 잡고 생각을 정리하며 음악을 마구 돌려듣는 장면이 꼭 그러하다.

카밀이 레드 제플린의 ‘인 더 이브닝’(In The Evening)을 들으며, 윈드 갭의 오래된 주택가를 지나는 장면은 아직도 뇌리에 강렬히 남아있다. 밖에서 노는 아이들은 없고, 어떤 집 앞에 있는 소녀의 실루엣만 보이는 풍경을 통해 이 마을이 어딘가 수상하다는 기분을 듬뿍 받는다. 때마침 흘러나오는 레드 제플린의 노래는 공허하게 붕 뜬 기분을 유발하고, 괴이한 향수병을 자극하며 감정을 가라앉힌다. 이 장면은 그저 기억에 남을 뿐 아니라 무의식을 파고들어 뿌리까지 내린다.

흥미롭게도 < 리틀 라이즈오프닝은 캘리포니아 해변을 따라 운전하는 모습을 비추고, <몸을 긋는 소녀>는 여러 중요한 순간에 에이미 아담스가 운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강한 공간감’은 두 작품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빅 리틀 라이즈>가 심각하고 충격적인 감정과 재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면, <몸을 긋는 소녀>는 남부 특유의 우울감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슬픔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런 분위기가 배경과 한데 뒤얽혀 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밀접하다 할 수 있다.

<
몸을 긋는 소녀>는 같은 거리와 지역 슈퍼, 경찰서, 조각상 등 같은 비슷한 장소를 계속해서 비춘다. 이곳에는 딱히 이렇다 할 무언가가 없어서 길가에 있는 사물을 기억하는 게 어렵지 않다. 카밀을 포함한 윈드 갭 사람들은 이러한 공간감에 사로잡혀 있다.


장 마크 발레는 ‘제한된 움직임’을 상징하는 장면을 지속해서 비춘다. 시청자는 카밀이 운전하는 장면을 조수석의 시점에서 바라보게 되고, 카밀이 차 문을 쾅 닫을 때 마치 우리의 은유적인 얼굴을 강타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카밀의 이복동생 아마(엘리자 스캔런)와 친구들이 스케이트를 신고 끊임없이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보면 꼭 그들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아마 홀로 스케이트를 타고 집 현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마치 시공간의 감옥에 갇힌 롤러 걸을 보는 듯하다.

카밀의 어머니 아도라는 지배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마치 그 집은 아도라를 중심으로 가족 전체가 밀실 공포증을 앓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집을 모방한 인형의 집 복제품을 살펴보면 알 것이다. 가정부 게일라가 아도라의 화장실 바닥을 닦는 장면에서 아마의 시점으로 넘어가 인형의 집 바닥에 쌓인 먼지를 치우는 장면은 그 집에 사는 것이 얼마나 숨 막히는 일인지 기막힌 편집으로 보여준다이 같은 연출 방식은 마치 커다란 러시아 목각 인형 마트료시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한다.

카밀이 좋아하는 음악이 레드 제플린일지 몰라도, 드라마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1970년대 이글스에 가깝다. “당신이 원할 때 체크아웃 할 수 있지만, 아마 떠날 수 없을 거예요”라는 ‘호텔 캘리포니아’의 가사는 카밀과 고향, 가족 관계를 비롯해 드라마 전반 최면을 거는듯한 분위기에 부합한다. <몸을 긋는 소녀>가 끊임없이 반복하며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윈드 갭을 떠날 수 없다’라는 것이다. 이 장소가 마음에 한번 자리 잡는 순간, 그 잔상을 털어내기란 불가능해진다.


번역 Tomato92, 편집 Jacinta  / 에그테일 에디터
원제: Jean-Marc Vallées Evolution to Sharp Objects From Big Little L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