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잘 날 없는 큐레이터의 수난기. <더 스퀘어>는 주인공 크리스티안(클라에스 방)의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시작해 잇달아 벌어지는 크고 작은 소동을 보여준다.
영화의 도입부,북적이는 거리에는 부랑자와 노숙인과 바쁜 도시인들이 한데 섞여있다.행인들은 거리에서 들려오는“생명을 구하시겠습니까?”라는 말을 지나치며 시선을 피한다. 이들 틈에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인 크리스티안도 출근을 하고 있다. 갑자기 그에게 여성의 울부짖는 소리가 귀에 꽂힌다. 그녀는 한 행인에게 달려와 어떤 남자가 나를 죽이려 한다며 극도로 흥분해 소리친다. 크리스티안은 행인과 함께 그녀를 진정시키려 애쓰지만 당황하고 긴장한 건 매한가지. 그런데 금방이라도 해코지를 할 것 같았던 험상궂은 사내가 다가와 외마디 경고를 던지곤 맥없이 사라져 버리는데. 얼이 빠진 크리스티안은 행인에게 안도의 하이파이브를 건네며 정의의 사도라도 된 양 자신을 추켜 세운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 크리스티안은 알아차린다.휴대폰과 지갑과 단추를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현대인들에겐 끔찍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예술과 자본의 아이러니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더 스퀘어>는 대략 이와 같은 화법으로 흘러가는 영화다. 인간의 위선을 꼬집는 적나라한 코미디의 연쇄. 실제로 외스틀룬드 감독이 2015년에 직접 제작한 예술 프로젝트 ‘더 스퀘어’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이자, 이 사각형 안에서는 모두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는 메시지로 북유럽 전역을 감동시킨 현대미술 작품이었다. <더 스퀘어>라는 영화에 그대로 안착한 ‘더 스퀘어’는 크리스티안이 진행하게 될 전시에서 주요한 자리에 놓일 작품이다.
하지만 그 어떠한 원대함을 품은 예술이라 할지라도 자본주의의 숙명 앞에선 얄짤없다. ‘더 스퀘어’의 마케팅 업체가 가져온 장황한 이야기의 결론은 단순하다. ‘단 2초 안에 사로잡지 못하면 바로 눈을 돌려 버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라면 자극과 논란은 필수 요소라고 말한다. 휴대폰을 찾는 데 혈안이 된 크리스티안은 이 터무니없는 제안서를 얼렁뚱땅 승인해 버렸고, 결국 금발의 거지 아이가 폭발하는 홍보영상이 유튜브에서 논란거리가 되어 급기야 크리스티안의 직업적 위치까지 흔드는 사건이 되고 만다.
<더 스퀘어>는 누구나 동등한 권리를 누릴 성역이라는 ‘더 스퀘어’의 숭고한 작품 앞에 경탄을 내보이면서도, 미술관을 떠나는 혹은 작품에서 눈길을 거두는 찰나에 그 사실을 잊고 마는 현대인들의 민낯을 까발리는 영화다. '더 스퀘어'를 사고 팔 뿐, 사각형에 한참 다가서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조롱이다. 비단 크리스티안뿐만이 아니다. 작중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아이러니를 품은 우리들 모습의 치환이다. <더 스퀘어>의 모든 장면에는 블랙코미디적 요소와 풍자가 넘쳐흐른다.장장 두 시간 반의 러닝타임을 할애하는 영화임에도 지루할 틈이 없다.
가까이서 보면 감동, 멀리서 보면 우스운
감동을 주려거든 근경을, 우스꽝스러움을 부각하려거든 원경을 활용하라는 말이 있다. 루벤 외스틀룬드는 그 방면에서 충실한 방식으로 의도를 보여준다. 작중 인물이 처한 상황들 자체만으로도 난감하고 우습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지만, <더 스퀘어>는 황망한 여백 속에 인물을 덩그러니 놓아두는 장면을 자주 등장시킨다. 또, 카메라가 비추는 피사체의 언저리(여백)에 부차적인 웃음 코드까지 심어두면서 겹겹이 쌓인 코미디를 층위를 보여준다. 여기에 현대적이고도 고풍스러운 사운드가 깔리는 아이러니 역시 같은 효과를 낸다.
가령, 하룻밤을 보낸 여자가 찾아와 그 밤의 의미를 집요하게 물어올 때, 크리스티안은 이 대화에서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솔직한 여자와 솔직하지 못한 남자의 대화는 출발점부터 어긋나있으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우스운 장면이다.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무언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음이 대화를 자꾸만 방해하고, 이들 뒤로 위태롭게 흔들리는 미술 작품 하나가 보인다.
예술과 현실의 알량한 경계
<더 스퀘어>는 이토록 영화 곳곳에 빈틈 없이 풍자와 해학의 요소를 배치해 놓았다. 이렇게까지 겉 다르고 속 다른, 마음 따로 몸 따로인 인간 군상들의 이중적 행태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도 드물 것이다. 그중에서도 유인원을 흉내 내는 행위예술가가 나오는 롱테이크는 <더 스퀘어>에서 결코 잊히지 않을 장면이다. 흉내를 내려다가 아예 스스로를 유인원이라고 믿어 버린 사람처럼, 행위예술가는 사람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와 불가해한 접촉을 시도한다. 사람들은 점차 난폭해지는 유인원의 행위예술을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감내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예술과 현실의 알량한 경계를 꼬집는 이 시퀀스는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의 혼까지 쏙 빼놓을 정도로 강렬하다.
최고의 복지국가에도 모순은 있다
스웨덴 영화 <더 스퀘어>는 최고의 복지를 자랑하는 국가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잔존하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벌어진 거리, 유럽 국가 중 시리아 난민 최대 수용국으로 불리는 스웨덴 국민들이 실제로 난민에 가하는 이중적 시선, 예술과 허세의 미묘한 간극을 극명하게 들춰내는 모순점을 총동원한다. 그 지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캐릭터 크리스티안. <더 스퀘어>는 그의 운수 나쁜 나날들을 비추면서 우리 내면의 비인간성에 맹렬히 경고한다. 이 따끔한 고발은 <더 스퀘어>에게 제70회 칸국제영화제 최고상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겨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