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발행된 ‘어메이징 월드 오브 DC 코믹스’ 표지. 고릴라 그로드가 바나나를 들고 있다.

배트맨과 슈퍼맨의 만화책들에 신물 날 정도로 등장하는 조커, 펭귄, 미스터 프리즈 등의 빌런들에게 지루함과 피로감을 느끼는 독자라면 플래시의 적수들 모임인 로그스(또는 로그스 갤러리)’에 관심을 가져 볼 만하다. 플래시라는 캐릭터 자체가 DC 유니버스에서 슈퍼맨이나 배트맨보다는 인지도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나 작중에 등장하는 적수들은 더 원색적이고 단순하며 다채롭다.
 
플래시의 적수들은 DC 유니버스에서 배트맨과 슈퍼맨의 뒤를 이어 세 번째로 가장 화려하고 숫자 또한 압도적이다. 또한 악당 하나하나가 개성이 강해 인기 있는 악당들은 팬층도 두터워 외전격 시리즈까지 나오기도 한다. 현재까지도 많이 활용되고 있는, 만화나 TV 시리즈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표적인 플래시의 적수들은 전부 1950년대 후반~1960년대 만들어졌다. 스스로 슈퍼 빌런이나 슈퍼 범죄자 같은 명칭을 거부하고 자신들을 로그스(Rogues)’라 칭하는 이 악당들은 작가 존 브룸과 전설적인 작가 겸 작화가 카마인 인팬티노가 전부 만들었다. 플래시가 <쇼케이스>라는 만화 잡지의 수록 만화에 불과했던 1957년에 등장한 캡틴 콜드가 최초의 로그스 멤버이니 활동년도만 해도 반세기가 넘어 웬만한 마블코믹스의 슈퍼히어로들보다 더 선배격인 셈이다.

고릴라 그로드가 등장한 에피소드.

고릴라 그로드도 플래시 연재 초반에 등장한 적수이다. <쇼케이스>105호부터는 <플래시>로 제목이 바뀌어 발간되었는데 105호에 나온 적수가 미러 매스터, 그리고 106호에 나온 적수가 고릴라 그로드와 파이드 파이퍼이다. 플래시의 적수들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름을 구성하는 두 단어의 첫 철자가 동일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아이들이 이름을 쉽게 외울 수 있게 하려 한 카마인 인팬티노의 배려였다. 웨더 위자드, 레인보우 레이더 등 다른 로그스 멤버들의 이름들도 이런 식인데, 물론 영화 <수어사이드스쿼드>로 이름이 익숙해진 캡틴 부메랑처럼 아닌 경우도 있다.
 

고릴라 그로드의 초창기 에피소드

고릴라 그로드는 경쟁사 마블코믹스에도 비슷한 캐릭터가 없는, 개인적으로는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캐릭터이다. 인간보다 뛰어난 지성과 텔레파시, 그리고 정신조종 능력이 있는 이 고릴라는 원래 동족들과 행복하게 아프리카에 살고 있던 평범한 고릴라였다. 아프리카에 우주선이 추락하면서 그 우주선에 타고 있던 외계인에 의해 이런 능력을 부여받게 됐다. 지능이 발달하면서 고릴라들은 사람처럼 기술적으로 발전한 대도시를 이루고 살게 되는데, 그로드는 이 도시를 혼자 지배하고자 계획했다가 연락을 받고 출동한 플래시에 의해 도시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이러한 설정은 흥미롭게도 <혹성탈출> 시리즈의 대표 주조연급 유인원 캐릭터들과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물론 그로드가 첫 등장한 것이 <혹성탈출 (1968)>의 개봉일보다 훨씬 앞서니 누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하기는 힘들 것이다.
 

2011년 DC 코믹스 리부트 이후 ‘NEW 52’의 고릴라 그로드

첫 등장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 그로드는 이후에도 플래시 만화, 그리고 저스티스 리그 관련 만화에서 수십 차례 등장하며 DC 유니버스의 인지도 있는 빌런 캐릭터 반열에 오르게 된다. 어느 정도 규모 있는 크로스오버 시리즈나 대형 이벤트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였으며, 현대로 넘어오면서 능력과 야망 또한 점점 강화된다. 2011DC 유니버스 리부트 이후에는, 쓰러진 적수의 뇌를 먹음으로써 적수의 지적 능력과 특수 능력을 흡수할 수 있다는 놀랍고도 끔찍한 설정이 추가되었고, 힘 자체도 플래시의 물리적 공격이 전혀 효과가 없을 정도로 강화되었다.
 

TV시리즈 <플래시>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로드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TV 시리즈 <플래시>(2014~) 또는 게임 <인저스티스 2>를 통해서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플래시>에서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2011)과 유사한 설정으로 그로드가 실험실에서 고통 받고 있던 실험용 고릴라로 등장한다. <인저스티스 2>에서는 슈퍼맨의 적수 브레이니악의 조력자로 등장하는데, 알고 보니 더 장대한 계략이 있는 강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게임 <인저스티스 2>

영화 <저스티스 리그>(2017)에서도 그로드에 대한 언급이 스치듯이 지나간다. 극중 플래시(에즈라 밀러)가 배트맨에게 자신의 능력들을 열거하는데, 그 중에 고릴라와의 소통 능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2010년대 이후의 만화 기반 컨텐츠 소비 트렌드가 80~90년대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트렌드에서 벗어나 비현실적이고 다소 과장되어 있더라고 좀 더 재미있고 특이한 것들을 찾는 것으로 점점 이동하면서, 고릴라 그로드 같은 특이한 캐릭터들의 인기와 활용도는 점점 상승할 것으로 생각된다.


최원서 / 그래픽 노블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