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세계를 구현하는 공상과학영화. 상상력의 야심은 끝도 없지만, 고급 기술이 동원될수록 제작비는 수직 상승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SF영화는 돈이 많이 든다”는 당연한 명제를 획기적인 발상으로 극복한 영화들이 있다. 최근 극장 개봉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가 바로 그 사례. <산책하는 침략자>를 비롯해 기발한 아이디어로 제작비를 절감한 SF영화들을 모아봤다. 단, 출연료나 규모 면에서 저예산의 범주에 속하지 못한 영화도 있다. (무순)

※ 치명적 결말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자 했으나, 보기에 따라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산책하는 침략자

손가락 터치로 인간의 개념을 수집하는 외계인

<산책하는 침략자>는 전혀 외계인이 나올 것 같지 않은 분위기에서 태연하게 외계인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일단, 인간의 몸에 침투한 외계인이라는 설정 덕분에 따로 독창적인 외계인의 생김새를 만들 필요가 없다. 게다가 이들이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 인간의 ‘개념’을 수집하는 방법은 너무 간단해서 황당할 정도. 말 그대로 이마에 손가락을 갖다 대는 게 전부다. 어느 날 행방불명 됐던 남편 신지(마츠다 류헤이)가 돌아와 아내 나루미(나가사와 마사미)에게 “자신은 지구를 침략하러 온 외계인”이라는 고백을 한다. 외계인은 낯선 지구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 가이드를 한 명씩 설정하고, 가이드를 제외한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으로 개념을 하나씩 빼앗는데. 개념을 상실한 사람들은 마치 치매 환자처럼 멍하게 떠돌고 마을은 미스터리한 일들에 휩싸인다. 2017년 칸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부문에 초청됐다.


더 문

갇힌 우주선 속, 샘 록웰 홀로 하드캐리!

데이빗 보위의 아들인 감독 던칸 존스의 재능을 알린 영화 <더 문>. 영화는 ‘달에 고립된 우주인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으로 공간과 인물을 한정했다. 우주에 관한 이야기지만, 광활함과 스펙터클 대신 단 한 명의 외로움만 보여주면 그만이라니. 이만큼 경제적인 발상도 없다. 달 표면의 헬륨 에너지를 지구에 수급하기 위해 홀로 파견된 샘 벨(샘 록웰). 3년간의 파견 근무 종료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 샘 벨은 인공위성의 고장으로 지구와 교신이 끊긴 채로 인공지능 컴퓨터와 외롭게 버티고 있다. 가족들이 남긴 영상을 돌려보며 지구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는 그에게 어느 날 믿을 수 없는 일이 닥친다. 관객들의 허를 찌르는 결말까지 확인하고 나면 왜 <더 문>에 “최고의 저예산 SF영화”라는 찬사가 쏟아지는지를 이해할 것이다.


소스 코드

8분간의 기억을 반복한다

<더 문>으로 재능을 입증받은 던칸 존스가 2년 뒤 발표한 차기작. 역시 장르는 SF이고 이번엔 타임 루프를 소재로 삼았다. <소스 코드>에서 선택한 그의 제작비 절감 비법은 바로 ‘반복’. 헬기 조종사 콜터(제이크 질렌할) 대위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열차에서 낯선 여자와 대화를 하고 있다. 자신이 왜 시카고행 열차를 타고 있는지, 여자는 왜 엉뚱한 이름으로 나를 불러오는지 혼란스럽기만 한 콜터. 그런데 갑자기 열차는 폭발해버리고 그는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곧장 깨어난다. 밀폐된 캡슐에서 눈을 뜬 콜터에게 임무를 알려오는 장교의 말인즉, 열차 안에서의 8분간의 기억으로 돌아가 테러리스트의 실체를 알아내라는 것. 짧은 기억이 반복되는 <소스 코드>는 비슷하지만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갇힌 남자의 이야기를 보여 준다. 비슷한 소재의 영화로 톰 크루즈 주연의 <엣지 오브 투모로우>도 있다.


맨 프럼 어스

대사로 설명하는 어마어마한 진실

<맨 프럼 어스>는 단돈 20만 불의 제작비로 탄생한 초저예산 SF영화다. 지방의 한 대학교수인 존(데이빗 리 스미스)은 종신교수직을 거절하고 돌연 마을을 떠나기로 한다. 존의 환송 모임에서 동료들은 그의 행동이 의아해 집요하게 추궁을 하는데. 그가 꺼낸 대답은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다. 자신이 14,000년 전부터 살아왔고, 늙지 않는 외모 때문에 10년 주기로 신분을 바꿔왔다는 것이다. 이 믿을 수 없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교수들과, 그 반박을 그럴듯한 논리로 다시 뒤집는 존. 놀라운 진실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궁금하다면 영화로 확인할 것. 놀라운 반전을 선사한 영화 <맨 프럼 어스>가 초저예산 SF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상상력을 대사로 대신하기 때문이다. 말뿐인 공상과학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극도의 몰입을 선사하는 이 영화는 그야말로 갇힌 공간에서 말의 서스펜스를 방불케 한다.


케이 팩스

빛보다 빠른 속도는 육안으로 식별 불가능!

인간의 모습을 갖춘 외계인, 그리고 대사로 눙친 상상이란 점에서 <산책하는 침략자>와 <맨 프럼 어스>의 장점을 갖췄다. 스스로를 1천 광년 떨어진 케이-팩스라는 행성에서 왔다고 소개하는 남자 프롯(케빈 스페이시)은 정신 이상자로 오인받아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프롯의 증세를 진찰하려던 의사 마크(제프 브리지스)는 대화를 진행할수록 그의 빈틈없는 이론에 점차 흥미가 생긴다.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는 프롯은 심지어 과학자보다 더욱 정교한 자전 궤도까지 그려내는데. 그는 과연 케이-팩스에서 온 외계인일까, 상처 입은 정신분열증 환자일 뿐일까. 한편, 학자들의 요구에 프롯이 초광속 이동을 시범해 보이는 장면은 이 영화의 경제성을 단번에 함축한다.

프롯- 아디오스! 알로하!

과학자들- 뭐 하는 겁니까?

프롯- 방금 다녀왔어요.


타임 패러독스

타임머신이 이렇게 생겼다고?

단편소설 <너희 좀비들(All You Zombies)>을 영화화한 작품. 시간 여행을 하면서 각종 범죄를 예방하는 일을 하는 시간 요원(에단 호크). 그는 과거로 가 테러범의 폭탄을 해체하던 도중 큰 화상을 입었지만 시간 이동 장치에 가까스로 접촉해 현재로 돌아온다. 바로 이 타임머신이 <타임 패러독스>의 가성비 포인트인데. 바이올린 케이스처럼 생긴 타임머신을 들고 눈을 감았다 뜨면 ‘뿅’하고 사라졌다가 ‘뿅’하고 도착한다. 세기말 예능프로그램에서나 보던 편집 방식에 웃음이 터질 것 같다가도, “가성비는 확실하군!” 하며 눈감아주게 된다. 영화는 사뭇 진지하고, 반전을 거듭하는 플롯은 집중력을 요하기 때문. 안면 전체에 피부 이식을 마친 그는 새로운 얼굴로 다른 임무 수행을 시작한다. 바텐더로 위장해 일하고 있는 그의 술집에 어느 날 한 작가(사라 스누크)가 들러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들려주는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요원은 그에게 시간 여행을 제안한다.


안전은 보장할 수 없음

미국판 <지구를 지켜라!>

잡지사 인턴 다리우스(오브리 플라자)는 신문에 실린 괴짜 광고를 추적하는 취재를 맡는다. 그건 바로 시간 여행에 동행할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였다. '보수는 여행 이후 지불', '무기는 각자 가져올 것', '안전은 보장할 수 없음.' 알고 보니 케네스(마크 듀플라스)는 죽은 여자친구를 살려내기 위해 광고를 냈다. 다리우스도 믿거나 말거나 어머니의 죽음을 되돌려 행복을 찾고 싶다는 명목으로 시간 여행에 동참하기로 한다. 타임머신에 골몰한 괴짜 케네스의 행동이 우습지만 다리우스는 그에게서 진정성을 느끼며 점차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타임머신은 결말에 이르러서야 완성되고, 따라서 제작비는 고작 75만 불 정도다. 장준환 감독의 발칙한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 <안전은 보장할 수 없음>은 판타지 SF영화의 탈을 쓴 성장 드라마다.


씨네플레이 인턴기자 심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