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봤더라. 좋은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인생을 갖는 것이라고 했다. 박정민에겐 인생을 공유하고 있는 4명의 친구가 있다. 그가 ‘야탑동 양아치들’이라 명명하는 23년 지기 친구들로 초등학교 때 만나 서로에게 볼꼴 못 볼 꼴 다 보이며 막역한 우정을 쌓아가는 중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각자 사는 게 바빠 소홀해지기 십상인데, 이들은 한 달에 서너 번씩 모여 여전히 퉁탕퉁탕거린단다. 이날 자리에는 두 명의 양아치가 함께했다.    


곽지훈-박정민과는 부부 같은 관계를 형성한 친구로 박정민이 까칠한 남편 느낌이라면, 곽지훈은 그런 남편의 투정을 사랑으로 다 받아내는 아내 느낌에 가까웠다. 박정민이 어딜 가자고 하면 늘 순순히 따라나선다는 그는 박정민의 이번 마카오 여행에도 동반했다.  

남궁수-작년에 결혼한 새신랑으로 그의 결혼식 사회를 보던 박정민은 딸 시집보내는 아빠의 표정으로 눈물을 왈칵 쏟아 하객들로부터 눈물 연기의 달인이란 평을 받았고, 친구들에겐 10년 놀림거리를 제공했단다. 온순한 성향으로, 발랄한 양아치들 사이에서 조율자의 느낌이 강했다. 


(왼쪽부터)야탑동, 성남시청공원

# 야탑동 언저리, 술집+성남시청공원
 
‘술 마시기 좋은 곳’을 물색하던 그들이 안내한 곳은 야탑 터미널 근처에 위치한 이자카야였다. 곽지훈과 남궁수가 술에 취약한 관계로 주문한 소주는 대부분 박정민과 기자의 몫이었다. 야탑동 양아치들과 밤 11시까지 이어진 대화는 대개 유머와 해학으로 점철됐는데, 그 사이에서 비집고 나오는 숨겨지지 않는 우정에 흐뭇해지는 순간이 여럿 있었다. 
 
지훈: 저는 소화기 만드는 친구고요, 얘는 소화기 파는 친구입니다.

정민: 지훈이는 제 팬클럽 우수회원이기도 해요. 팬 미팅에도 매번 와요.  

지훈: 제가 펜 카페 초창기 때부터 ‘1호 팬이다’ 자처하고 다녔거든요. 

정민: 이제는 팬들도 많이 알아요. 제 친구인걸. 

궁수: 정민이 시사회를 갔는데 정민이만큼 얘도 유명한 거예요. 팬들이 “지훈님이다~!” 해서 놀랐던 기억이 나요.

시우: 팬 미팅은 자주 하나요?

정민: 1년에 한 번씩은 해요. 2011년도에 처음 했는데 그땐 테이블 두 개 정도 있는 조그마한 카페에서 했어요. 10명 정도의 팬이 와 주셨죠. 그다음 해에 30-40명, 다음 해에 70-80명…조금씩 커지더니 지금은 200명 정도 와 주세요. 제 팬 미팅은 굉장히 소소해요. 다른 배우 팬 미팅은 시스템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잖아요? 사회자도 있고, 게스트도 있고. 저는 그런 거 없어요. 그냥 팬 카페 운영자랑 앉아서 팬들과 편하게 이야기하는 정도에요. 올해에는 피아노 치고 노래하고 그랬어요.  

시우: 무명 때부터 찾아 준 팬도 있나요?

정민: 감사하게도요. 그런데 어느 순간 안 보이시는 분들도… (웃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테죠. 어느 순간 제가 실수를 했을 수도 있고, 시간이 없으실 수도 있고, 다른 배우분이 더 좋아졌을 수도 있고. (웃음) 

시우: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나만 알던 스타가 모두의 스타가 됐을 때의 마음. 팬 입장에선 기쁘기도 하면서 아쉽고 그런 게 있거든요. 
 
정민: 그래서 시간과 상황이 되는 한 계속 대면하고 한 마디라도 더 하고, 사진도 찍어드리려고 하는데 그게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저도 마음 한 쪽이 무거워요. 

시우: 아무래도 많은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 한 명 한 명과 직접 대면하기 어렵죠. 그런 점에서 지훈 씨는 팬클럽의 산증인인 셈이네요. (웃음)

정민: 학창시절, 저희가 다 ‘찌질이’들이었어요. 

궁수: 난, 아닌데. 

정민: 왜 이래. 너도 ‘찌질이’.

궁수: 아니야. 나는 그래도 교복 바지통 줄여 입고 그랬어! 

일동: ……?

궁수: 저희 때 바지 통 줄여서 입는 게 유행이었어요. 잘 나가는 애들은 다들 줄여서 입었는데, 저도 그중 하나. 

정민: 으이구~ 이런 애들이에요. 이해해 주세요. 그래도 궁수 네가 우리 중 유일하게 여자 친구가 있긴 했다. 필통 주고 사귄 여자친구.  

궁수: 야야~ 아직 아픈 손가락이다. 

정민: 그 친구, 서울대 다닌다고 하지 않았냐?

궁수: 서울대 (강조한다) ‘의대’ 갔어. 

지훈: (소리 지르며) 걔가, 서울대 의대를 갔어?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너, 첫사랑을 미화하는 거 아니야?

궁수: 아니야. 정민이 보다 걔가 공부 더 잘했어. 

정민/지훈: (발끈) 야, 걔보다 내가/정민이가 더 잘했지!

지훈: 정민이가 공부를 정말 잘했거든요. 전교에서 놀았어요. 그래서 고등학교도 공주에 있는 수재들이 모이는 곳에 가고.  

시우: 멀리 떨어져 지내게 됐을 땐 서운하기도 했겠어요.  

궁수: 그때 그래서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지훈: (설마 하며) 편지를 썼어?

정민: 왜 이래? 네가 나한테 쓴 편지도 있어. 

지훈: (화들짝) 내가 너한테 편지를 썼다고? 뭐라고?

정민: 잘 지내고 있냐고. 

지훈: 눈물 자국 있었냐?

정민: 잉크 번진 거 찾아봐? 있었던 것 같은데.

지훈: 와~ 편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시우: 남자들끼리 손편지를 쓰는 게 일반적이지는 않죠?

정민: 네. 그런데 우린 그때가 처음 헤어져 본 거라. 붙어살다시피 했었거든요. 

궁수: 방학 땐, 아침에 눈 뜨자마자 정민이 집에 모이곤 했어요. 

정민: 그거 기억나냐? 하루는 분식집에 떡볶이 먹으러 갔는데, 주머니에 천원밖에 없는 거예요. 딱 1인분 먹을 수 있는 돈이었죠. 떡볶이랑 서비스로 나온 어묵 국물을 먹는데 양은 모자라고, 배는 고프고, 더 먹고 싶고…그런데 다들 소심해서 더 달라고는 말을 못 하니까 간장에 물 타서 먹고 그랬어요. 그런 추억들이 곳곳에 있는 동네에요.  

지훈: 그땐 그랬지!

성남시청공원

-‘성시발령’ 박정민을 구하라
 
궁수: 우리 중학교 1학년 때 신민아 선배가 같은 학교 3학년 선배였어요. 본명이 양민아. 그때 보고 ‘와 연예인은 이렇게 생긴 거구나’ 했어요. 

지훈: 그때도 모델이었어. 유명했지. 

지훈: 맞아, 진짜 멋있었어. 

궁수: 빛이 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정민이는…

모두: 하하하

시우: 정민 씨가 배우가 될지, 친구들은 상상도 못 한 일이죠?

궁수: 처음엔 PD를 하고 싶어 했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영화감독.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연기를 진지하게 해 보겠다고 하더라고요.

시우: 그래서 어땠어요?

지훈/궁수: (무심) 아, 그렇구나~

궁수: 고대를 갔는데, 학교를 그만두고 한예종에 다시 간다고 했을 때, 그때 진짜구나 했죠. 

정민: 무심한 놈들! 저도 얘네들 하는 일에 별 관심 없어요. 얘들은 어디 들어가잖아요? 소화기부터 봐요. 

지훈: 안 그래도 이미 확인했어. 이 가게 소화기!

정민: 둘이 동업하는 게 꿈이래요. 저도 사업을 하나 추진하는 게 있어요. 사업이라고까지 하기는 그런데 이 동네에 작은 책방을 하나 내려고요. 좋아하는 책을 놓고 카페처럼 하고 싶어요. 제 공간을 만들고 싶은 거죠. 집에서는 아무래도 늘어지니까. 

시우: 팬들도 많이 찾겠네요.

정민: 고민이에요. 홍보한다면 얼굴을 걸고 홍보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또 내 공간을 만든다는 의미가 퇴색되기도 하니까.

시우: 책방에 작은 쪽방 하나를 두세요.  

정민: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 중이에요. (웃음)  

지훈: 사실 정민이가 이렇게까지 대단해질 줄 몰랐어요. 더 대단해지면 어떻게 될까, 걱정도 되고. 

시우: 어떤 걱정이죠?

지훈: 지금도 바쁠 때는 못 놀 때가 많거든요.

정민: 풉. 같이 못 놀까 봐?

궁수: 풉. PC방 같이 못 갈까 봐?

모두: 하하하하.

정민: 그런데 내가 일로 바쁠 때보다 연애할 때 더 못 만나잖아. 연애할 땐 이 친구들 아예 안 만나거든요. 근데 근 몇 년 너무 자주 불러내서 아주 귀찮았겠어? (웃음)

지훈: 연락 안 되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해요. 갑자기 연락되면 불안해! 또 무슨 일 생겼나 하고. 혹시 오늘 성남시청공원 가 보셨어요?

시우: 네. 정민 씨가 자주 가는 공간이라면서요? 생각할 게 있거나 스트레스 받을 때 찾는.

지훈: 저희끼리는 부르는 말인데 ‘성시발령’이라고 있어요. 정민이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겼다 싶으면 제가 친구들에게 문자로 뿌려요. ‘성시발령’을 내는 거죠. 그럼 다들 성남시청공원으로 달려와요.   

정민: 제가 갑자기 우울해질 때가 가끔 있거든요. 이유 없이 그럴 때도 있는데 한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너부터 먼저 좀 챙기라고. 어릴 때부터 성향이 그랬어요. 타인을 만족시켜주는 게 우선이었죠. 그래서 학교 다닐 때 남들이 해 달라는 건 거의 다 해 줬어요. 공연 무대 만드는 거 도와 달라고 하면 가서 돕고, 편집해야 한다고 하고 편집해 주고, 연기 연습해야 하는데 같이 해 달라고 하면 대본 맞춰주고. 내 시간이 없어도, 타인이 나로 인해 만족을 느끼면 그게 그냥 좋은 거예요. 그게 열심히 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돌이켜보니 꼭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타인의 기준에 제 행복을 맞추며 살았던 거죠. 
 
시우: 착한 사람 콤플렉스와는 다른 건가요?

정민: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시우: 지금 정민 씨가 연기를 하는 것은 본인의 쾌락을 위한 건가요? 아니면… 

정민: 지금은 제 만족을 위한 게 커요. 그럼에도 이 일이 여러 사람들과 하는 일이다 보니 타인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죠. 타인의 시선 안에 놓인 일이기도 하고요.

시우: 그래서 친구들이 ‘성시발령’을 만들었군요. ‘성시발령’은 자주 호출되나요?

정민: 이전에는 꽤 잦았는데 요즘은 별로 없어요. 

지훈: 이 친구 뉘앙스가 있어요. 장난으로 힘들다고 할 때랑, 진짜 힘들다고 할 때랑 달라요. 투정 부리면서 힘들다 하면 그냥 ‘꺼져’ 이러는데, 바닥까지 떨어졌다 싶으면 바로 ‘성시발령’을 공지하죠. 

정민: 소리치며 울다가 성남시청 공원 그늘에서 잠들어 버린 적도 있어요. (웃음)

지훈: 그때 너무 난리 치길래, 빨리 보내버리려고 술을 엄청 먹였어요. 그 사진 어디 있을 텐데… 너 더 유명해 지면 그 사진 풀어 버릴 거야! (*감사합니다. 여기에 풀어주셨습니다.)

소리치며 울다가 공원에 잠들어 버린 과거의 박정민. 베개로 사용한 신발이 포인트다. (곽지훈 제공 사진)

시우: 정민 씨 연애사 좀 들려주세요. 

정민: 순정파죠.

궁수: 좋게 말하면 순정파죠. 다음 생애엔 정민이 여자 친구로 태어나려고요. 

시우: 순정파 중에서도 순정파인가 보군요. 

지훈: 정확히 말하면 여자 친구가 된 다음에 한 번 차야지.

궁수: 돌아오라고 차도 사줄걸.

정민: 사줬던 거 같기도 하고. (웃음)

궁수: 그래서 다음 생애엔 정민이 전여친으로 태어나는 게 꿈이에요.

정민: 넌 내 스타일 아니야.

모두: 하하하 

시우: 첫사랑은 언제였어요?

정민: 끝사랑이 첫사랑이죠.

지훈: 미친.

시우: 과거든 현재든 사랑하는 사람에게 반한 이유는 뭔가요?

정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한 건, 지나간 인연들의 처음은 늘 재미있었어요.

시우: 한 번 만나면 연애는 길게 하는 편인가요?

정민: 그래도 1년 이상은 만나는 것 같아요. 궁수는 12년 사귀다 결혼했어요. 지훈이는 ‘모솔’이에요, 모솔! 크크크크.  

궁수: 상상 연애만! 크크크크크

지훈: (발끈) 상상 연애라니~!

시우: 지훈 씨는 혹시 소개팅할 때 ‘모솔’이라고 밝히세요? 

지훈: 아…밝히면 상대가 속으로 ‘뭐지, 이 이상한 놈은?’ 그럴까요? 

모두: 하하하.

<그것만이 내 세상>

-‘친구, 배우, 아들’ 박정민
 
시우: 친구들이 보는 박정민의 장점은 뭔가요?

지훈: 정민이가 굉장히 섬세하고 예민한데, 저는 그게 이 친구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생각 자체가 다른 애들과는 달라요. 저희가 생각하지 못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또 챙기죠. 그런 지점들이 이 친구가 하는 일과 잘 맞지 않나 싶어요.  

정민: 생각이 많은 거죠. 

궁수: 조금 오그라드는 말인데,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뭐든 금방 배워요. 사실 정민이가 노래를 못해요. 

시우: (<변산>에서 확인한 노래 실력을 떠올리며) 설마!

궁수: 그러니까 이놈이 무서운 거죠. 얼마 전에 <유희열의 스케치북> 나가서 노래하는 걸 보는데 놀랐어요. 그때 피아노 치면서 노래를 했어요. 거기에 랩도 하고. 그게 진짜 어렵거든요. 

정민: ‘그것만이 내 세상’ 노래 부를 때 네 키를 낮춰서 불렀어요. 방송 나가고 친구들에게 연락 진짜 많이 왔어요. “너, 노래는 정말 못하는구나!” (웃음)

궁수: 아니야. 친구인 내가 봐도 신기했어. 

정민: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것도 연기예요. 잘하는 척하는 연기를 하는 거죠. 잘하는 것과, 잘하는 걸 진짜 잘하게 되는 것과, 잘하는 것처럼 하는 건 차이가 크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잘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잘하는 척하는 걸 조금 할 뿐이에요. 약간 캐치를 한다고 해야 하나? 잘하는 척하는 걸 배우는 거죠.

지훈: 이것도 장점이에요. 정민이가 겸손해요. 뻐기기나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사람이 인기를 얻으면 변한다고도 하는데 안 그래요. 늘 같아요.

정민: 얘네한테는 센 척 엄청 해요. 여기다 다 푸는 거죠. (웃음) 가장 저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친구들이에요. 짜증 나면 숨김없이 짜증 내고. 

지훈: 잔소리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밥 좀 잘 먹고!

정민: 제가 지훈이에게 유독 화를 많이 내요. 

궁수: 그럼 지훈이는 또 저에게 풀어요. 

지훈: 넌 누구한테 푸니?

궁수: 나한테?

모두: 하하하

시우: 박정민의 어떤 영화를 가장 좋아하나요. 

정민: 일단 <파수꾼>은 재미없다고 했어요. 영화 보는 눈이 떨어지는 애들이에요. (웃음)

지훈: <파수꾼> 보긴 많이 봤어. 4번이나. 저는 정민이 새로 나오는 영화가 가장 재미있어요. 최근 <변산>이 나와서 그런지, 지금은 <변산>이 가장 좋아요. <변산>은 3번 봤어요. 시사회에서 한 번, 친구들이랑 한 번, 회사 동료랑 한 번. 

<전설의 주먹>

궁수: 저는 <전설의 주먹>이 가장 감명 깊었어요. 그게 정민이 첫 상업영화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큰 영화에 처음으로 출연한 거니까 신기하면서도 좋더라고요. 박카스 CF 찍고 할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웃음) <동주> 땐 다른 이유로 좋았는데, <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님을 시사회에서 볼 수 있어서 참 설레더라고요.

지훈: 나는 칭따오, 정상훈!(박정민과 같은 소속사다) 와, 생각보다 너무 잘 생겨서 깜짝 놀랐어요. 

정민: 저는 오히려 이런 게 신기한 거예요. 이준익 감독님이 대단한 감독님인 건 잘 아는데, 워낙 오래 만나다 보니 저에겐 아저씨 같은 느낌도 있거든요. (웃음) 그런데 누군가에겐 너무 대단한 사람인 거예요. 그래서 친구들의 이런 반응을 보면 다시금 숙연해지죠. ‘맞다! 내가 막 할 분이 아닌데’ 하면서. (웃음)

궁수: <동주>의 경우 정민이답게 나온 영화라고 생각해요. 송몽규 시인이라는 역할 자체가 글을 쓰는 작가의 느낌이 나잖아요? 정민이도 글 쓰는 걸 좋아해서 느낌 있더라고요. 

시우: 글솜씨는 어릴 때부터 좋았군요. 

지훈: 저희가 고등학교 때 ‘싸이월드’ 그룹 다이어리를 함께 사용했어요. 그때 정민이가 쓴 걸 보면, 비속어도 많고 다듬어지지 않긴 했지만 재미있었어요. 정민이 책도 재미있잖아요? 그런데 대부분의 배우는 학창시절부터 끼가 두드러지는 편이죠?

시우: 반반인 것 같아요. 학교 다닐 땐 조용했던 경우도 많더라고요. 실제로 만나면 낯을 가리는 배우도 많고요. 정민 씨도 낯을 좀 가린다고 했나요?

정민: 이전에는 더 심했어요. 배우들에게 낯을 가렸던 가장 큰 이유는 ‘저 배우가 나를 모를 것이다’라는 생각이 커서였어요. 이제는 얼굴 정도는 아시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조금 있어서 “안녕하세요, 박정민입니다”하고 먼저 다가가기도 해요. 이전에는 “저는 어떤 영화에 나왔던 누구입니다”라고 얘기하는 게 저 사람도 불편하고 나도 불편하고…그러다 보니 피하게 됐는데 지금은 그러지는 않아요. 

시우: <변산>은 부자 관계를 다룬 영화지만 우정에 대한 영화이기도 했어요. 

지훈: 정민이는 불효자에요.

정민: 아니야, 요즘 돈 많이 드려. (웃음) 

궁수: 너희 부모님 그거 없어도 문제없으시거든!

지훈: 맞아. 나쁜 놈. 돈이 전부가 아니야~ 어머니에겐 연락 자주 드리냐?

정민: 얘네가 저희 부모님을 더 잘 챙겨요.

궁수: 어머니 아버님이 정민이에게 못 물어보는 것도 저희에겐 물어보시죠.

정민: 저보다 얘네들을 더 좋아해요. 대화를 더 잘 해 주니까. 저보다 통화도 이 친구들이 더 많이 할걸요?  

지훈: 그래도 다 너 걱정이지. 정민이가 걱정되면 저에게 연락하세요. “정민이 별 일 없니? 밥은 잘 먹고 다니니?” 

<동주>

궁수: 백상예술대상에서 <동주>로 신인상을 받을 때, 어머니가 펑펑 우셨어요. 그때 제가 현장에 모시고 갔었는데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정민: 많이 우셨다고 그러더라…
 
뭔가, <변산>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기시감. <변산>에서 박정민이 연기한 학수 곁에는 절친한 고향 친구 구복(최정헌)과 상렬(배제기), 석기(임성재)가 있다. 그들은 퉁명스러운 학수 대신 학수 어머니의 산소를 돌보고, 학수 아버지에게 살갑게 아들 노릇을 한다. 현실의 ‘박정민-그의 친구들’ 관계와 유사한 지점이 엿보여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궁수: 어릴 때 정민이가 아버지 생신이 가까워 오면 선물 사는데 저희를 끌고 갔어요. 그런데 선물 사러 가면 꼭 자기가 갖고 싶은 걸 골랐어요. 아버지에게 필요 없는 물건을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드리잖아요? 

정민: (아버지 흉내)“에잇, 너나 가져라!” 

모두: 하하하. 

궁수: 그럼 지가 그냥 쓰는 거예요.

지훈: 머리가 좋아. 

정민: 아버지가 절대 못 입는 옷이나, 글씨 교정해주는 펜 같은 걸 사서 드리면 바로 저에게 돌아오곤 했죠. (웃음)

궁수: 정민이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 같기도 해요. 제가 취업 못 하고 빌빌거리고 있을 때 “어디 원서는 써 봤니” 조언을 해 주시고 그랬어요. 

지훈: 우리에겐 또 한분의 아버지시지.  
 

<파수꾼>

-또래, 동류의식
 
시우: 정민 씨 또래 중에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배우들이 참 많잖아요? 특히 독립영화에서 출발해서 지금 많은 사랑을 받는 배우들이요. 이 층이 매우 탄탄하다고 느껴요. 각자가 가는 길이 매우 흥미롭기도 하고요. 

정민: 맞아요. 제 또래에 좋은 배우들이 정~말 많아요. 

시우: 또 많이들 영리하다는 느낌도 들고요.  

정민: 제가 봐도 다들 똑똑하죠.

시우: 관객 입장에서는 굉장히 고무적이 일이에요. 

지훈: 그럼 라이벌이 많은 거 아닌가요? 

정민: 이건 라이벌의 문제가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저희가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이끄신 수많은 선배님들이 나오시는 영화를 보면서 꿈을 키운 시네마 키드들이잖아요. 한국영화가 잘 될 때도 있고 잘 되지 않을 때도 있는데, 어쨌든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제 또래 배우들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참 중요하다는 생각은 해요. 선배님들께서 잘 닦아오신 길을 꾸준히 잘 닦아나가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시우: 공감해요. 지금 30대 초중반에 있는 이 배우들의 선택이 매우 중요해지는 순간이 곧 올 거라는 생각이에요.   

정민: 영화 <사바하> 포스터 찍는 날 (이)정재 선배님이 이런 말씀을 해 주셨어요. “정민! 우리 세대 배우들, 그러니까 너희 선배들이 지금 굉장히 많은 시도와 선택을 하고 있어. 그러니 너희들은 겁먹지 말고 하면 돼. 선배들이 많이 해 둘 테니까, 정민 너희 세대는 겁먹지 말고 많은 걸 했으면 좋겠어. 너희들이 더 많이 할 수 있게끔 선배들이 가꿔 둘 거야!” 그 이야기를 하시는데 ‘우와~!’ 너무 감동인 거예요. 

시우: 훈훈하다~

정민: 그 말씀을 듣고 생각했죠. 선배들이 저런 고민을 하고 계시구나. 그렇다면 우리 또래 배우들은? 우리가 당장 모여서 비상대책위원회 같은 걸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열심히 해야겠구나, 라고 느꼈어요.

시우: 기대가 커요. 다들 작품에 대한 욕심이 많다고 느끼거든요. 이 욕심이라는 게 또 선배들 때와는 조금 다른 형태인 것 같아서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지 궁금해요. 

정민: 생각해보면 얼마 전 촬영을 마친 <사냥의 시간>이 좋았던 것도 그 이유와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젊은 감독, 젊은 배우들, 젊은 스태프들끼리 좋은 영화 만들어 보자 끈끈하게 뭉친 게 너무 기분이 좋았거든요. <사냥의 시간>은 감히 말씀드리는데 기대하셔도 좋을 거 같아요.

<파수꾼> 주역들이 다시 만난 <사냥의 시간>

시우: <사냥의 시간>은 <파수꾼>의 주역들(윤성현 감독, 이제훈, 박정민, 배제기)이 다시 만나서 기대를 모으는 작품이기도 하잖아요? 8년 전과 비교해서 각자 달라진 지점들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떻던가요.

정민: 영화로는 8년 만이지만 저희가 일상에서 꾸준히 만났어요. 그래서인지 큰 변화를 느끼지는 못했어요. 아직도 이제훈은 우리에게 너무나 좋은 형이고, 감독님은 여전히 너무 좋은 감독님이에요. 신기한 건 감독님은 여기에서 모니터하고 있고, 제훈이 형과 제기는 저기에서 연기하고 있고, 모든 게 이전과 같은데 ‘현장 사이즈’가 커진 거예요. 카메라 조명 장비도 이만하고! <파수꾼> 때는 정말 작았는데. (웃음)

시우: 모두 함께 잘 돼서 만나니 더 즐거운 현장이었겠네요. 

정민: 점점 영화를 대하는 제 마음의 형태가 달라지고 있음을 느껴요. ‘내가 이 영화로 덕을 보겠어!’라는 마음이 사라지고 ‘이 영화를 어떻게 하면 잘 만들 수 있을까’란 책임감이 커지는 상황이에요. 그런 과정이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된 게 얼마 안 됐고요. 

지훈: 정민이가 우리랑 있을 때와 쓰는 어휘가 달라. 우리끼리 있을 땐 막 인터넷 용어 쓰고 그러는데.

궁수: 의미 없는 삼행시 짓기 놀이하고.

모두: 하하하

지훈: 정민이에게 연기는 어쨌든 사회생활이잖아요? 사적인 공간을 벗어나서 일하는 걸 보면 멋있다 싶어요. 말씀드렸듯 제가 아는 사람 중 어휘가 두드러지게 좋다고 느낄 때도 많고요.  

시우: 아무리 생각해도 정민 씨는 인생을 잘 산 것 같아요. 이런 친구들이 있다는 게. 말은 툴툴거리지만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애정이 있음이 느껴져요.

정민: 사회에 나와서 만나는 사람과는 자칫 오해가 생길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친구들에겐 그 어떤 말을 해도 용서가 되니 편하고 좋아요.  

궁수: 그런데 기분은 똑같이 나빠요. (웃음) 

지훈: 하하하. 저희는 정말 친구 없는 애들이 모여서 친구가 된 느낌이에요.

정민: 맞아. 다들 뭔가가 결여돼 있어서 잘 맞아. ‘인싸’(인사이더)가 되고 싶기도 했으나, '결국 ‘아싸’(아웃사이더)였던! (웃음) 한 잔 하자. 
 

2014년 극단경을 통해 무대에 올린 'G코드의 탈출'
‘G코드의 탈출’ 당시 그의 대본. 여러 낙서와 단상에서 그의 치열함이 엿보인다.

-그리고 남은 이야기
 
1. 박정민은 2014년 혜화동 파출소 골목에 자리 잡은, 100석이 조금 안 되는 소극장에서 2인극 <G코드의 탈출>을 올린 바 있다. 넉넉하지 않은 예산으로 인해 고비도 있었지만, 치열하게 대본과 싸우면서 만들어 간 그 과정의 감흥을 박정민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박정민은 당시 이 연극을 연출한 이치민과 ‘연극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모아서 같이 으쌰으쌰 해보자’는 의미로 『극단 경』을 창단하기도 했는데, <G코드의 탈출> 이후 4년째 『극단 경』은 휴지기지만 언제고 꼭 이 이름으로 관객을 만나고 싶단다. 
 
2. ‘뀨디’ 박정민. 인터뷰 며칠 후, 박정민은 자신의 인스타 라이브를 통해 또 한 번 기습적으로 셀프 LP 음악방송을 했다.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고, 아쉽게도(?) 음주 음악방송은 아니었다. 추측컨대 배역을 맡으면 연출이 요구하는 것에 한술 더 떠 캐릭터로 걸어 들어가는 습성을 지닌 그는, 카드와 싸우느라 뜬눈으로 밤을 통과한 후 딱딱해진 어깨를 두드리며 턴테이블 앞에 앉았을 것이다. 평소보다 더 낮게 깔린 나긋한 음성에서 고된 수련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는 자의 기분 좋은 노곤함이 느껴졌다. 이날 그의 선곡 중 하나는 제이슨 므라즈의 ‘아임 유어즈(I’m Yours)’. 아마도, 그가 세상에 하는 말. 


정시우 /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