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된소리로 읽고 싶은 제목으로도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는 영화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이 지난 8월 18일 개봉했다. 전작 <숫호구>(2012)에서 특유의 키치적인 터치로 이름을 알린 백승기 감독의 신작이다. 영화는 무려 4만 년 전의 지구로 시간을 돌려, 주인공을 인류의 기원이라고 뻔뻔하게 소개한다. 제작비 2천만원으로 만든 이 SF(?)영화에서 주인공은 척 봐도 가발인 게 분명한 긴머리로 사방을 돌아다닌다. 조연들의 행색도 마찬가지. 주인공을 둘러싼 원숭이들 역시 정교함이란 찾을 수 없는 분장과 복장으로 유인원인양 바나나를 들고 날뛴다. 오늘 씨네플레이는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의 병맛을 극대화시켜줄 한국영화의 별종 6편을 모아 소개한다.
미지왕
<미지왕>은 한국형 컬트영화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희대의 바람둥이 왕창한(조상기)과 재벌가의 딸 엄청난의 결혼식, 그런데 왕창한이 식장에 나타나지 않자 긴급수사 본부가 구성되고 경찰은 왕창한을 추적한다는 이야기다.
말이 좋아 ‘컬트’지, 시쳇말로 ‘약빨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미지왕>은 온갖 영화들에 대한 패러디, 말장난과 오버액션으로 뒤범벅돼 있다. 이는 <마스크>의 짐 캐리를 열심히 따라하는 듯한 조상기의 열연에 그치지 않는다. 촬영현장의 카메라와 스탭들이 영화에 노출되고, 배우들은 연기하다말고 웃음을 참지 못하고, 명백한 NG 장면조차 그대로 사용된다. 영화는 물론 흥행 참패해 현재까지 DVD조차 발매되지 못했지만, 영화를 본 수많은 이들은 <미지왕>을 ‘용감하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나저나 ‘미지왕’이 뭐냐고? ‘미친놈 지가 무슨 왕자인 줄 알아’의 준말이다.
긴급조치 19호
네티즌이 유독 사랑하는 졸작 한국영화들이 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 <클레멘타인>(2004), <맨데이트: 신이 주신 임무>(2008), <조선미녀삼총사>(2014)…. 다만 이 작품들은 못 만들었을지언정 ‘별종’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망설여지는 구석이 있다. 헌데 <긴급조치 19호>는 다르다. 줄거리부터 황당하다. 세계 곳곳에서 가수들이 대통령이 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위기를 느낀 한국 대통령이 긴급조치 19호를 발령해 온갖 가수들을 잡아들인다는 내용이다.
구색은 얼추 맞췄다. 핑클, 신화, 베이비복스, 클릭비, NRG, 싸이 등 당시 활동하던 가수들이 카메오로 출연한다. 헌데 가수들이 나오는 신마다 핵노잼에 비윤리적인 유머들이 끼어들면서 관객의 인내심을 자극한다. 이 난리통은 홍경민의 팬인 여고생 민지(공효진)가 대통령 비서실장인 아버지와 화해하면서 마무리된다. <조폭마누라>(2001)로 쏠쏠한 재미를 본 코미디언 서세원이 제작을 맡았다.
무서운집
작년 여름, <무서운집>은 혜성처럼 도착했다. 제작된다는 소문은커녕 영화가 개봉할 거라는 예고조차 없이 갑자기 툭 VOD 시장과 가로수길의 작은 극장에 등장했다. 새로 장만한 4층 집에 스튜디오를 꾸린 사진작가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큰 집에 홀로 남은 그의 아내가 귀신에 시달린다.
<무서운집>은 전혀 무섭지 않다. 오히려 처음엔 얼토당토 않는 전개에 황당해 하다가 귀신과 함께 ‘베싸메무초’를 부르며 춤추는 장면에 이르면 끝내 폭소를 터트리게 된다. 주인공 역의 배우 구윤희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마네킹’ 귀신이 나타날 때마다 표정 없이 비명만 질러대고, 간혹 하는 혼잣말조차도 국어책 읽듯이 내뱉는다. 하지만 어설픈 연기와 얼핏 봐도 후진 티가 역력한 연출은 양병간 감독의 의도였다고 한다. 무진장 못 만들어 놓고 “이게 다 의도였다!”고 발뺌하는 건가 싶지만, 귀신이 나타날 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1층부터 4층까지 계단을 오르내리는 과정과 가정주부의 하루 일과를 소상히 보여주는 고집을 떠올리면 묘하게 설득력 있게 들린다. <무서운집> VOD 보기
다찌마와 리
장편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로 일약 스타덤(작년 <베테랑>으로 1300만명을 동원한 걸 떠올리면 참으로 격세지감!)에 오른 류승완 감독은 차기작으로 단편 <다찌마와 리>를 만들었다. 영화 속 액션 장면을 칭하는 일본식 은어 ‘다찌마와리’를 제목에 붙인 만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만든 ‘인터넷 상영용 영화’다.
영화는 60년대 한국영화 특유의 목소리 연기, 문어체의 딱딱한 대사, 촌스러운 분장 등의 키치적인 요소를 덕지덕지 붙인 유희의 흔적처럼 보인다. 장진 감독의 초기작들에 출연하며 코믹한 이미지를 구축하던 임원희를 주연으로 내세운 원맨쇼는 피식 실소가 터지는 유치함으로 가득하다. 처음엔 배우들의 과도한 제스처를 액션인양 늘어놓던 <다찌마와 리>는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제대로 된 액션(데뷔 때부터 최근 <베테랑>까지 함께 작업한 최영환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잡았다)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액션영화 키드로서 영화감독의 꿈을 키웠던 류승완은 진지한 구석이라곤 털끝만큼도 없어 보이는 <다찌마와 리>를 통해 어려서부터 흠모해온 뭇 액션영화들에 오마주를 바치는 것처럼 보인다. 훗날 임원희를 주인공으로 채용한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2008)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가루지기
변강쇠. 이 세 글자만 들어도 머리를 관통하는 특정한 이미지가 있다. (묘사는 생략) 80년대 말 엄종선 감독이 연출한 <변강쇠> 시리즈 때문이다. 이대근, 김진태, 원미경, 하유미 등 배우들의 걸쭉한 연기가 뿜어내는 에로티시즘과 B급영화의 상상력이 두루 어우러진 <변강쇠> 시리즈는 ‘유쾌하다’와 ‘저질이다’라는 평을 동시에 받으며 우리나라 섹스 코미디의 전설로 남았다.
신한솔 연출, 봉태규 주연의 <가루지기>(2008)는 <변강쇠>의 2000년대식 변주다. 여자들이 주도권을 잡은 마을에서 부실하기로 소문난 강쇠(봉태규)는 음양통달 도사에게 전수받은 비책으로 엄청난 양기를 품고 돌아와 조선 최고의 거물(!)로서 활약한다. <변강쇠>의 자장 아래 놓인 만큼 음담패설류 유머가 줄을 잇는다. "웬만한 사내의 몸통만한" 그것으로 제기를 차거나 오줌빨이 뻗어나가 저 멀리 바위를 떨어트리는 그런 식의 유머코드들 말이다. 코미디는 원류를 따라가되, 기존의 방향과 다르게 여성들이 자유롭고 노골적으로 성을 즐기는 이야기를 전면에 배치하면서 나름 새로운 시선을 덧붙이기도 했다. 영화 속 유머가 유치하긴 해도 ‘불편’하지 않은 건 바로 이런 시선에서 기인한다. 변강쇠가 절구질을 할 때 아낙네들이 난타로 화답하거나 싱크로나이즈를 등장시키는 오락적인 요소로 유쾌한 분위기를 한껏 살려놓은 가운데, 후반부에 이르러 느닷없이 억지 감동을 배치시켜놓은 건 분명한 단점이다.
숫호구
<숫호구>(2012)는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의 감독 백승기의 데뷔작이다. 연출부터 각본, 촬영, 편집까지 도맡아 했다. ‘감성 충만 C급 무비’를 모토로 삼은 영화는 찌질함이 물씬한 제목에 걸맞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들이민다. 나이 서른이 되도록 연애 한번 못해본 원준(백승기 감독이 직접 연기했다)은 욕구불만과 열등감에 시달린다. 연애뿐만 아니라 번듯한 직장생활도 하지 못하는 그는 어느 날 정체불명의 박사가 진행한 생체실험으로 ‘슈퍼 섹시 아바타’를 갖게 된다. 이처럼 <숫호구>는 시치미 뚝 떼고 드라마, 멜로, 판타지, 거기에 SF까지 표방하려 든다. 물론 설득력은 제로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매력은 분명하다. 뻔히 알면서도 이 무모한 구라에 설득 당하게끔 이끄는 투박함과 뻔뻔함이 그것이다. ‘백승기 월드’에 기꺼이 입문할 이들에게 백승기 감독이 쓴 책 <서른 살에 처음 시작하는 영화 만들기>도 읽어보길 권한다. <숫호구> VOD 보기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