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영화들이 있다. 보지 않았는데 본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영화. 이런 경우 유명한 영화 속 한 장면만을 기억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서 힐러 감독의 <러브 스토리>(1970)도 그런 영화 가운데 하나다. <러브 스토리>의 명장면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하버드 캠퍼스에서 남자 주인공 올리버(라이언 오닐)와 여자 주인공 제니퍼(알리 맥그로우)가 서로 장난을 치고 키스를 하고 눈밭에 구르는 시퀀스다. 여기에 프랜시스 레이의 오리지널 스코어 <snow frolic>이 흐른다.
<러브 스토리>를 연출한 아서 힐러 감독이 1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살. 힐러 감독은 1923년 캐나다 앨버타주 애드먼턴에서 태어났다. 캐나다 CBS 방송에서 코미디물을 제작하다가 1956년 할리우드로 건너왔다. 이후 그는 70여 편이 넘는 영화와 TV 드라마를 연출했다.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아카데미 시상식을 주관하는 미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대표를 역임했으며 2001년 영화산업에 기여한 공로로 ‘진 허숄트 박애상’을 수상했다. 힐러 감독의 죽음 앞에 다시 <러브 스토리>를 떠올려봤다.
<러브 스토리>는 에릭 시걸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와 소설의 관계에 조금은 특별한 사연이 숨어 있다. 사실 에릭 시걸은 소설을 먼저 쓰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먼저 썼다.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백만장자의 아들인 하버드 법과대학원생 올리버와 가난한 이탈리아계 노동자의 딸인 레드클리프 음대생 제니퍼는 한눈에 반한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하지만 올리버의 아버지는 반대한다. 올리버는 아버지와 의절하고 자신의 상속권까지 포기한 채 제니퍼와 결혼한다. 두 사람은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행복하다. 올리버는 열심히 공부하고 제니퍼는 그런 올리버를 위해 음악교사로 일하며 생계를 책임진다. 결국 올리버는 유명 로펌의 변호사가 되고 두 사람은 넒은 집으로 이사한다. 행복한 일만 남을 것 같은 그때 올리버는 제니퍼가 백혈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제니퍼는 목숨을 잃는다.
결코 처음 본 것 같지 않은 이 진부한 스토리를 담은 시나리오가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쉽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우여곡절 끝에 에릭 시걸의 시나리오는 재정난에 시달리던 파라마운트사의 회의 테이블에 올랐다. 파라마운트의 간부들은 시걸의 시나리오가 못 미더웠다. 그러면서 시걸에게 먼저 소설로 써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시걸의 소설은 500만 부 넘게 팔려나갔고 곧장 영화 촬영이 시작됐다. 잘 알다시피 영화 역시 엄청난 흥행에 성공했다. 당시 1억 600만 달러의 흥행을 올렸는데 이는 현재 가치로는 6억 6500만 달러에 해당한다. <러브 스토리>의 엄청난 인기를 짐작할 수 있는 지표가 있다. 1970년에서 80년대 초·중반까지 미국에서 가장 많이 지어진 아기의 이름이 <러브 스토리>의 여주인공의 이름인 ‘제니퍼’였다.
<러브 스토리>는 국내에서 1971년 개봉해서 서울 관객만 27만 명을 모았다. ‘고작 27만’이라고 생각했다면 틀렸다. 1971년이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 <씨네21> 1059호 류재림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이 쓴 ‘내 인생의 영화’ 칼럼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국내에서 약 30만 명의 스코어를 기록했던 <러브 스토리> 역시 당시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지금도 그러하듯 당시에도 인기 영화가 등장하면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일 때마다 영화의 내용이나 남녀 주인공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 영화가 개봉된 1971년 겨울, 사람들의 화제는 단연 <러브 스토리>였다.”
<러브 스토리>의 성공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그토록 진부한 클리셰 덩어리의 스토리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다. 우선 배우들의 연기가 눈부셨다. 남녀주인공인 라이언 오닐과 알리 맥그로우는 당시 유명한 배우가 아니었다. 영화계에서 거의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러브 스토리>는 저예산 영화였다. 유명한 배우들은 출연을 거절했다. 어쩌면 이 무명의 배우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능력을 뛰어넘는 연기를 보여줬을지도 모른다. 그 유명한 눈밭의 장면이 즉흥적으로 촬영됐다는 사실은 유명한 일화다. 당시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고 힐러 감독은 스탭 몇 명과 두 배우들만 데리고 그 장면을 촬영했다. 특별한 연출 지시는 없었다. 올리버와 제니퍼의 ‘눈 장난’(snow frolic)은 오로지 두 배우가 만들어낸 것이다.
프랜시스 레이의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클로드 를루슈 감독의 <남과 여>(1966) 등의 영화음악으로 유명한 레이는 프랑스에서 지내며 제작진이 보내준 시나리오를 보고 관계자와 몇 통의 전화를 하고 오리지널 스코어를 작곡했다. 레이의 음악이 없는 <러브 스토리>는 결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음악이 어쩌면 대충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고 해도 말이다.
영화 속 배경 역시 <러브 스토리>의 성공 요인으로 꼽을 수 있겠다. 에릭 시걸은 <러브 스토리>를 쓸 당시 예일대에서 고전, 비교문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우연히 하버드 대학원생의 뒷바라지를 하던 여성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러브 스토리>를 구상했다. 남자 주인공 올리버는 하버드 학생이었던 배우 토미 리 존스와 미국 부통령 엘 고어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런 스토리의 촬영장소는 두말할 것 없이 하버드와 레드클리프 대학이 될 수밖에 없다. 힐러 감독은 로케이션 선정에 있어서 원작자 시걸의 의도를 제대로 구현해냈다.
시걸의 명대사도 그냥 넘어가기 힘들 것 같다. “사랑한다면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 거야"(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 라는 대사는 미국영화협회(AFI)가 2005년에 선정한 ‘100년 100편의 영화 속 명대사’ 13위에 올랐다. 이 대사는 제니퍼와 다툰 올리버가 집을 뛰쳐나간 제니퍼를 찾아다니다 집 앞에 앉아 열쇠를 잃어버렸다며 울고 있던 제니퍼를 만나서 미안하다고 했을 때 제니퍼가 울면서 한 대사다. 영화가 끝날 무렵 이 대사는 다시 등장한다. 올리버가 제니퍼가 죽었다고 하자 올리버의 아버지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I'm sorry”라고 말하고 올리버는 제니퍼에게 배운 그 대사를 아버지에게 말한다.
<러브 스토리>의 인기는 속편으로 이어졌다. 1978년에 만들어진 <올리버 스토리>가 그것이다. 제니퍼의 죽음 이후 올리버의 삶을 다룬 이 영화는 역시 에릭 시걸이 쓴 소설이 원작이다. 소설보다는 영화가 낫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1편보다 나은 속편은 힘든 법이다. <올리버 스토리>는 범작으로 남았다.
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영화 <러브 스토리>는 사실 그 진부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지금 봐도 펑펑 눈물을 흘리며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영화다. 어쩌면 당신의 인생영화가 바뀔지도 모른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두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