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워요. 덥기만 하면 조금 나을 텐데 불쾌지수 콱 올리는 습기가 극성입니다. 이게 한국의 날씨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죠. 홍콩이라면 또 모를까요. 홍콩도 못 가는데 홍콩의 날씨만 느껴야 한다니. 조금 억울합니다.
이번 주는 문 닫고 보면 방안에서만큼은 홍콩 기분 100 느낄 수 있는 영화들을 모아봤습니다. 억지라고요? 왕가위 감독의 영화라면 억지가 아니죠. 왕가위의 팬이라면 반갑고, 왕가위의 팬이 아니라면 호기심이 생길 그의 영화 다섯 편을 모아봤습니다. 한자리에 놓고 보니 의도치 않게 작품들 속 배우들 크레딧이 비슷비슷하네요. 헷갈릴 것 같다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모두 자기만의 색을 뚜렷이 하고 있는 작품들이니까요.
아비정전
출연 장국영, 유덕화, 장만옥 상영시간 100분 제작연도 1990년
아비(장국영)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트라우마 탓에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하는 남자입니다. 늘 여자가 필요하지만 깊은 사랑은 경계하는 바람둥이죠. 그는 매일 축구 경기장 매표소에서 일하는 수리 진(장만옥)을 찾아갑니다. 사는 게 무료했던 수리 진 역시 묘한 매력의 아비에게 빠져들죠. 하지만 그도 잠시, 이기적인 남자 아비는 또 다른 여자 루루(유가령)와도 사랑에 빠집니다. 자신의 짐을 빼러 아비의 집으로 간 수리 진. 그녀는 그곳에서 경찰관(유덕화)을 만나게 됩니다. 헤어짐으로 힘들어하는 수리 진을 경찰관이 위로해주면서 둘 사이에도 미묘한 감정이 생겨나죠.
<아비정전>의 인물들은 모두 누군가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온전히 완성되는 사랑은 없습니다. 모두 짧게 스쳐 지나갈 뿐이죠. 여자와 사랑을 나눈 후, 혼자 남은 아비가 갑자기 음악을 틀어놓고 하얀 속옷 차림으로 맘보춤을 추는 장면은 이 영화의 명장면입니다. 사랑을 경계하지만 사랑 없인 살지 못하는 아비의 내적인 외로움이 고스란히 담겨있죠. 늘 어딘가에 고립되어 있는 그들. 정착하지 못하고 홀로 표류하기만 하는 캐릭터들은 왕가위 영화 특유의 그리움, 허무함, 외로움의 표정을 잘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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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출연 임청하 양조위 금성무 왕페이 상영시간 101분 제작연도 1994년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다면 나는 만년으로 하겠다"는, 어마어마한 명대사. 바로 이 영화에서 탄생했습니다. <중경삼림>에는 10분마다 명대사가 나옵니다. 감수성 풍부한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꾸려나간다는 소리죠. <중경삼림>은 전혀 다른 이야기 두 편으로 구성됩니다. 두 이야기 모두 경찰이 주인공이고, 혼잡한 홍콩 도심이 배경입니다.
여자친구 메이와 헤어진 경찰 233(금성무). 그는 헤어진 연인이 좋아했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읍니다. 자신의 생일인 5월 1일 자 유통기한의 통조림들이죠. 자신의 생일까지 연락이 오지 않자 그는 모아놓은 파인애플들을 꾸역꾸역 먹으며 그녀를 잊기로 다짐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여자를 찾아 나서죠. 그의 새로운 그녀는 금발의 가발과 트렌치코트, 선글라스를 착용한 마약 밀거래상(임청하)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스튜어디스였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경찰 633(양조위)입니다. 샐러드 가게에서 일하는 아비(왕페이)는 경찰 633에게 첫눈에 반하고, 급기야 그의 집에 무단침입(!)하여 그의 집에 남아있는 전 연인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하죠.
네 인물 모두 멘탈 상태가 정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핸드헬드는 왕가위 감독이 담으려는 혼란스럽고 외롭고 불안한 '청춘'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죠. 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며칠은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흥얼거리실 게 분명해요. 아비처럼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말이죠. 리즈 시절 금성무와 양조위의 촉촉한 눈망울은 평생 마음 소장감이니 꼭! 챙겨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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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출연 양조위 장만옥 상영시간 97분 제작연도 2000년
홍콩의 지역 신문 편집장인 초 모완(양조위)과 수출 회사 비서로 근무하는 수 리첸(장만옥). 두 사람은 같은 날 같은 건물로 이사하게 됩니다. 이상하게 함께 자리를 비우는 날이 많은 두 사람의 배우자. 초 모완은 수 리첸의 핸드백이 자신의 아내의 것과 같다는 사실을, 수 리첸은 초 모완의 넥타이가 자신의 남편의 것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홀로 남은 두 사람이 마주하는 날은 자연스레 점점 많아지죠. 끌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게 되는 둘. 두 사람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요?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이미 애절함이 한가득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랑에 관해 많은 말을 나누지 않죠. 두 사람이 거리를 두려 애쓰는 장면에서 나오는 절제미가 이 영화의 포인트입니다. 외로움을 화려함으로 덮으려는 장만옥의 치파오가, 어두운 사무실에서 고요히 존재감을 더하던 양조위의 담배 연기가 짙게 남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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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투게더
출연 장국영, 양조위, 장첸 상영시간 97분 제작연도 1997년
<해피 투게더>는 흑백 화면으로 시작됩니다. 충동적이고 제멋대로인 보영(장국영)과 조용하고 책임감이 강한 아휘(양조위). 둘은 너무 다른 성격 탓에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는 연인입니다. 관계회복을 위해 홍콩의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아르헨티나로 떠나온 둘. 하지만 이과수 폭포를 보러 가는 길에 둘은 또 헤어지게 되고, 아휘는 다시는 보영을 만나지 않겠노라 다짐하게 되죠. 홀로 허름한 클럽에서 일을 시작한 아휘. 어느 날 보영이 다른 남자와 그곳을 다녀가더니, 자꾸 그의 곁을 맴돌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누군가에게 맞아 만신창이가 된 채 아휘의 아파트에 찾아오죠. 아휘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는 보영. 어쩔 수 없이, 늘 그를 그리워하던 아휘는 보영을 다시 집에 들입니다. 이때부터 영화의 화면은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죠.
영화의 원제는 '춘광사설(春光乍洩)'입니다. 구름 사이로 잠시 비추는 봄 햇살이란 뜻이죠. 이들의 행복은 늘 그러했듯 잠깐입니다. <해피 투게더>는 장국영 전매특허 공허한 눈빛과 제멋대로인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휘를 연기한 양조위의 절절함, 이들을 둘러싼 고독함이 일품인 영화입니다. 현실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캐릭터들은 '사랑'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죠. 1997년 제 50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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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서독 리덕스
출연 장학우, 장국영, 장만옥 상영시간 100분 제작연도 2008년
<동사서독 리덕스>는 왕가위 감독이 <동사서독>(1994)을 15년 만에 다시 꺼내 재편집한 작품입니다. 장국영, 양가휘, 임청하, 장학우, 유가령, 양채니, 장만옥 등 홍콩의 유명 배우들이 총출동하죠. 장르는 '무협'이지만 액션이 난무하는 스피디한 전개의 영화는 아닙니다. 그와 정반대로, 액션보다는 인물의 표정에, 스피디한 전개보단 인물들이 감정을 소모하는 과정에 주목한 영화죠.
청부 살인 알선을 하며 사막에서 은둔자로 사는 구양봉(장국영). 그는 검객의 꿈을 위해 사랑하는 여인 자애인(장만옥)을 형의 여자로 내어주고 스스로 냉소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그에게 몇몇 인물들이 찾아오며 이야기가 전개되죠. 기억을 지워준다는 술 취생몽사를 들고 온 황약사(양가휘), 황약사에게 버림받고 오빠와 여동생으로 자아가 분열된 모룡연/모룡언(임청하), 검객에게 남동생을 잃은 완사녀(양채니), 시력을 잃어가는 검객 맹무살수(양조위), 협객으로 이름을 떨치고 싶은 가난한 무사 홍칠(장학우). 그들은 모두 과거의 아픈 상처를 지닌 인물들입니다. 사랑을 잃던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던가. 상실감과 고독함에 젖은 이들의 복잡한 내면은 왕가위 감독만의 스타일로 그려져 더 짙은 색을 발하죠. 왕가위 감독의 팬들이 레전드로 꼽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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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에디터 코헤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