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가득히> 하면 떠오르는 장면.

<태양은 가득히>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잘 모르신다고요? 그럴 만도 합니다. 이 영화는 무려 1960년에 만들어진 영화니까요. 도대체 몇 년 전이죠? 게다가 프랑스에서 만들었습니다. 뜬금없지만 이 영화를 이번 주 씨네플레이 수요명화에 소개하게 됐습니다.
<태양은 가득히>는 올해 초 개봉한 영화 <캐롤>을 보신 분이라면 한 번쯤 찾아보시길 권하는 영화입니다. 물론 <캐롤>을 안 본 사람들도 보셔야 합니다. 무지 재밌거든요. <캐롤>과의 연결 고리는 원작 소설을 쓴 작가입니다. 그 소설가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입니다. 하이스미스는 미국의 추리 소설 작가입니다. <태양은 가득히>의 원작은 <재능있는 리플리씨>로 국내에도 출간되어 있으니 영화를 보신 후 혹은 보기 전에 읽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재능있는 리플리씨>를 쓴 소설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태양은 가득히>를 연출한 감독은 르네 클레망입니다. 그는 1954년 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 철도노조원이 독일에 맞서 저항한 기록을 담은 <철로의 싸움>을 발표해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이후 연애 심리를 묘사한 <유리의 성>(1950), 반전사상을 담은 <금지된 장난>(1951) 같은 영화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었습니다. 에밀 졸라 원작을 영화화한 1956년작 <목로주점> 역시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입니다. <태양은 가득히>는 클레망 감독의 작품 가운데 가장 흥행한 작품입니다.

남자가 봐도 여자가 봐도 멋진 <태양은 가득히>의 알랭 들롱.

<태양은 가득히>의 흥행은 사실 감독보다 배우에게 기인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유명한 알랭 들롱이 출연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 남자 배우하면 알랭 들롱부터 떠오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유명한 남자 프랑스 배우가 딱히 기억에 나질 않는군요. 뱅상 카셀? <제이슨 본>에 등장한 모습이 기억에 날듯 말듯하네요. 지금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는 레아 세이두 아닐까요?
다시 <태양은 가득히>로 돌아가겠습니다. 알랭 들롱은 원작의 제목에 등장하는 톰 리플리 역할을 맡았습니다. 리플리의 재능은 뭘까요? 거짓말입니다. 리플리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방탕한 부잣집 외아들 필립(모리스 로넷)의 아버지에게 한 가지 부탁을 받습니다. 로마에 그림 공부하러 가서 놀기만 하는 필립을 미국으로 데려오라는 지령을 받은 거죠. 사례금은 5천 달러입니다. 필립은 이탈리아로 날아온 리플리를 철저히 무시합니다. 이에 리플리는 증오를 키우게 되고 결국 필립을 죽이고 맙니다. 맙소사. 이때부터 리플리는 필립의 신분증을 위조하고 그의 서명을 연습해서 수표를 쓰고 필립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그는 이미 필립의 화려한 삶에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지중해의 요트가 그렇게 좋았나 봅니다. 심지어 필립의 애인 조르주(마리 라포넷)까지 자신의 여자로 만들었습니다.

필립은 리플리가 보는 앞에서 일부러 애정 행각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리플레에게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태양은 가득히>를 떠올리면 지중해의 바다와 알랭 들롱의 얼굴만이 떠오릅니다. 그만큼 이 영화의 리플리와 알랭 들롱은 완벽한 만남이었습니다. 자신의 야망 혹은 욕망에 눈이 먼 리플리는 묘하게 반항적인 얼굴의 알랭 들롱과 썩 잘 어울렸습니다. 순수한 청년의 향기도 살짝 묻어납니다. 그의 외모를 퇴폐미라고 하기도 하고 ‘하층민의 아름다움’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영화 속 리플리의 패션은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근사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리플리가 범죄자이지만 그의 잘생긴 얼굴 때문에 죄가 밝혀지지 않기를 애타게 빌었을 겁니다. 그만큼 알랭 들롱의 리플리는 매력적이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의 여운은 알랭 들롱과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신인 배우 알랭 들롱은 <태양은 가득히>로 세계적인 스타가 됐습니다. 이병헌, 강동원 같은 배우를 두고 ‘한국의 알랭 들롱’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유명해졌죠.

다시 봐도 잘 생긴 알랭 들롱.

<태양은 가득히>의 또 다른 주인공을 꼽아보겠습니다. 필립? 조르주? 아닙니다. 영화 속 인물이 아니라 작열하는 지중해의 태양과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근교의 푸른 바다입니다. 이글거리는 태양은 리플리의 빗나간 욕망을 보는 것 같습니다. 니노 로타의 감미로운 음악은 지중해의 바다와 닮았습니다. <태양은 가득히>는 나폴리 앞바다의 화산섬 이스키아(ischia)에서 촬영했습니다.

<리플리>의 세 배우 (왼쪽부터) 맷 데이먼, 주드 로, 기네스 팰트로.

이스키아 섬은 20세기 말 다시 한번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왜냐면 <재능있는 리플리씨>를 다시 각색해서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리플리>(감독 앤서니 밍겔라, 1999)가 개봉했기 때문입니다. 맷 데이먼, 기네스 팰트로, 주드 로가 출연하는 <리플리> 역시 지중해의 이스키아 섬에서 촬영했습니다. 맷 데이먼이 리플리를 연기했습니다. 주드 로가 필립에 해당하는 딕키 역을 맡았습니다. 맷 데이먼도 훌륭한 배우이긴 하지만 어쩐지 알랭 들롱과 주드 로가 더 비슷한 느낌이긴 합니다.

리플리를 연기한 맷 데이먼.
딕키를 연기한 주드 로.

지금까지 <태양은 가득히>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글을 쓰고 나니 씨네플레이의 수장인 닉(Nick, 별명입니다)이 왜 <태양을 가득히>를 수요명화로 써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지금 서울도 지중해만큼 뜨거운 아니 더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니까요. 이제 그만 덥자, 제발.

앗, 가장 중요한 걸 빼먹었습니다.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면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반복하게 되는 인격장애를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이라고 합니다. 하이스미스의 소설이 이 용어의 기원이지만 <태양은 가득히>의 세계적인 성공으로 인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제 정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