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으로 가는 기차 안. 해리와 샐리는 남녀는 친구가 될 수 있는가란 케케묵은 주제를 놓고 설전을 벌인다. 해리(빌리 크리스털)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믿고, 샐리(멕 라이언)는 친구가 될 수 있다 믿는다. 뉴욕에 도착한 뒤 둘은 그리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짧은 인사를 나눈 뒤 헤어진다.
 

5년 뒤 우연한 짧은 재회에서도 서로의 생각이 많이 다르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한 그들은 또 다시 5년 뒤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이미 두 번의 우연만으로도 이 영화의 결말은 이미 예정돼있는 듯하다. 게다가 두 번째 우연에서 둘의 상황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샐리는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진 상태였고 해리 역시 이혼 수속을 밟고 있었다. 서로의 힘든 상황 속에서 둘은 남녀는 친구가 될 수 있는가란 실험을 해보기로 한다.
 
그 과정 속에서 두 캐릭터가 돋보이고 현실감 있는 둘의 매력적인 합이 터지며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수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가 닿았다. 연출을 맡은 롭 라이너와 각본을 쓴 노라 애프런은 각각 해리와 샐리에게 자신의 감정을 투영했다. 연출 당시 이혼한 상태였던 롭 라이너 감독은 남녀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믿음을 해리를 통해 표현했고, 노라 애프런은 자신과 주변의 경험으로 샐리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가짜 오르가즘을 연기하는 명장면(?)밖이 71도인데도 춥다는 당신을으로 시작하는 명대사가 이 모두의 연출과 각본, 연기를 통해 탄생한다.

둘의 감정이 오가는 곳은 뉴욕이다. 영화에서 뉴욕을 둘러싸고 있는 계절은 가을과 겨울이다. 그리고 그 계절에, 그 도시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고풍스러운 재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영화음악을 맡은 해리 코닉 주니어는 영화를 온통 운치 있는 재즈로 꾸몄다. 아름다운 뉴욕의 가을 아래서 해리와 샐리가 얘기를 나눌 때 어텀 인 뉴욕(Autumn In New York)’이 흘러나오고, 송년회 댄스파티에선 기분 좋은 스윙이 함께하는 아이 쿠드 라이트 어 북(I Could Write A Book)’이 둘의 미묘한 감정 사이에 자리한다.


해리 코닉 주니어는 단 하나의 곡도 쓰지 않았지만 조지 거쉰과 베니 굿맨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고전과 스탠더드를 가지고 그래미 시상식 최우수 남성 재즈 보컬상을 받았다. 그는 피아노 트리오로, 또는 빅밴드로 편곡한 음악에 자신의 감미로운 보컬을 입혀 해리와 샐리의 대화와 감정을 더욱 윤택하게 해주었다.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만 채우려는 욕심도 없다. 비록 사운드트랙 음반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레이 찰스의 윈터 원더랜드(Winter Wonderland)’나 프랭크 시나트라의 잇 해드 투 비 유(It Had To Be You)’ 같은 대선배의 곡을 영화에 삽입하며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영화의 마지막 자신이 직접 부른 잇 해드 투 비 유를 넣으며 음악의 주인공은 자신임을 분명히 하지만.
 
꼭 뉴욕의 하늘 아래서만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영화음악이 어울리는 건 아니다. 도시의 속살이 드러나는 한적한 은행나무 길 아래서도, 덕수궁 돌담길에서도 이 고풍스런 재즈 넘버들은 가을을 더 가을답게 해주고 겨울을 더 겨울답게 해줄 것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고 있는 지금,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음악이 가장 아름답게 들리는 계절이 왔다. 해리 코닉 주니어가 부르는 고즈넉한 웨어 오어 웬(Where Or When)’을 들으며 한껏 분위기를 잡기 좋은 계절이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감독 로브 라이너

출연 빌리 크리스탈, 멕 라이언

개봉 1989.11.18. / 2016.12.28.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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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