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가 기억하는 대상으로 이미지를 포착하려는 욕망은, 앞서 언급한 이미지의 자율적 생동을 담아내려는 욕망과 충돌한다. 충돌을 무릅쓰고 감독이 공간에 자율성을 주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짐작하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그것이 주는 감흥만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주민들의 목소리는 기억 속에서 집을 사유하는 데 반해 이미지는 여전한 현존을 강조하는 데서 오는 아이러니한 감정을 느끼며, 나는 방의 주인이 사라진 뒤에 남겨질 집과 이를 둘러싼 자연물이 감내해야 할 시간을 염려하게 되었다. 공간과의 이별을 앞둔 마을 주민들의 개별적인 감정은 표현의 미세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으로 요약된다. 아쉬움 속에는 어쩔 수 없음이라는 인정이 수반된다. 반면 공간의 감정을 상상해본다면 그것은 결코 아쉬움일 수 없다. 마을 주민들은 그런 장소를 다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이사 후 만날 다른 장소에 관한 기대를 품는다. 그러나 현재 그 공간에 자리한 나무와 집들에 재개발은 없다. 개발은 그들에게 재생될 수 없는 소멸과 죽음을 의미한다.
<집의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자주 떠올린 영화는 재개발과 재건축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몇편의 애니메이션이다. 사람과 분리된 공간이 주는 심상 때문이다. <토이 스토리>(1995)가 인간의 시선 바깥에서 펼쳐지는 인형과 장난감의 삶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했던 이야기는 무엇인가. <인사이드 아웃>(2015)이 인간 내부의 감정을 인격화하면서 보여줬던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공간에, 우리의 신체 내부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다른 생이 있다는 것을 이들은 믿게 했다. 이런 인간화 전략이 필요한 것은 애니메이션만이 아니다. 우리는 극영화뿐만 아니라 실제 일어나는 사건들을 쉽사리 실감하지 못한다. 많은 다큐멘터리가 ‘여기 사람이 산다’라는 메시지를 지속해서 강조해야 했던 이유도 우리가 종종 당연한 사실을 잊기 때문이다. 용산 철거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2012)에서 불타는 망루 안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 안의 미세한 움직임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지 않으면 쉽게 인지하지 못한다. 풍동 철거 투쟁을 다룬 <골리앗의 구조>(2006)에서 슬레이트로 건물 외벽을 두른 건물 안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내부에 동석한 카메라가 없었다면 실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떼쓰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해 달라”라는 철거민의 말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 얼마나 쉽게 망각되는지 일러준다.
어떤 다큐멘터리는 그만큼이나 절박한 이유로 사람을 생략한다. 그 앞줄에 정재훈의 <호수길>(2009)을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 응암2동의 어느 골목 어귀에서 벌어진 철거를 담은 이 영화에는 카메라를 든 나도, 카메라 앞의 너도 없다. 오직 비인칭적인 카메라와 그 앞의 사람이든, 동물이든, 건물이든, 산이든 모두 평등하게 포착된, 파편화된 마을의 풍경만이 있을 뿐이다. 이를 통해 한 건물의 철거가 그 건물을 둘러싼 모든 것의 일임을 영화는 보여준다. 나는 <집의 시간들>이 <호수길>이 보여준 상황과 방식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재개발은 이제 더는 거기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이 살던 공간과 집의 일이며, 그것은 명확히 분리된다. <집의 시간들>에서 사람들은 미래를 상상하며 공간을 기억할 수 있지만, 철거될 건물과 나무에게 과거를 회상할 미래의 공간은 주어져 있지 않다. 공간이 내는 목소리에 관해서 이야기하려면 우리는 당연히 그 공간이 처한 다가올 상황에 관해서도 말해야 한다. 공간과 자연을 순진무구한 대상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재개발과 재건축은 이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 되었다. 공간을 대신해 싸워줄 사람은 사라졌다. 이것이 <집의 시간들> 속 흔적으로 드러난 사람들을 통해 표현된다. 재건축이 행운으로 인식되는 시대에, 공간을 기억하고 아쉬워하는 사람이 여전히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안심해야 할까. 선택될 세간살이들과 버려질 세간살이들, 뿌리째 뽑혀 사라지거나 조형 요소로 다듬어질 나무들의 미래 대신 현재를 보여주는 영화는 포클레인 소음에 밀려 사라질 나무와 공간과 물질의 울음과 저항을 보는 대신 눈을 감아버린다. 영화가 끔찍한 미래를 담아야 했다는 말이 아니다. 지나치게 평온한 재개발의 예고 속에 숨은 것들이 있음을 여기에서라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개발 다큐멘터리의 범주 속에서 <집의 시간들>이 보여주는 것은 이제 거주 공간에 관해서만큼은 재개발이 무척이나 평화로운 외형을 띠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옮겨 갈 곳이 있는 사람들은 원래 있던 곳에서 평화롭게 밀려난다. 왜 우리는 저항할 수 없게 되었는가. 저층 아파트가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가 지어지면 그만큼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이 많아질 텐데, 왜 사람들은 여전히 집을 찾지 못하고, 집값은 치솟는 것일까. 예전에 살던 곳에서 더는 살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다시 어떤 투쟁을 생각한다. <상계동 올림픽>(1988)에서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았던 판자촌 사람들과 같은 억울함이 더는 없는가. 우리는 전보다 나아졌는가. 처절한 몸싸움을 벌일 새도 없이, 우리는 스스로 우아하게 밀려난다. 싸울 대상이 없기에 더는 싸울 수도 없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움 속에는 자연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