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밀레니엄’ 삼부작 표지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시리즈는 북유럽 스릴러의 유행을 가져온 작품이었다. 이전에도 주목받은 작품들은 여럿 있었지만 이 정도 파급력은 드물었다. 비록 10부작으로 계획됐던 이야기 중 삼부작만 발표된 미완성 시리즈이긴 하지만, 독특한 캐릭터들과 신기에 가까운 해킹 기술, 어두운 이면의 북유럽 근대사와 짜임새 있는 구성이 어우러져 강렬하고 짜릿한 재미를 안겨준다. ‘성인들을 위한 해리포터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인기를 얻은 시리즈를 가만 놔둘 리가 만무한데, 스웨덴에선 작품이 발표된 지 4년 만에 삼부작이 모두 영상화되었다. 그리고 이는 다시 또 90분짜리 6부작 미니시리즈로 재편집돼 많은 호평을 받았다.

소설 출간 직전에 세상을 떠난 스티그 라르손 작가의 생전 모습
거미줄에 걸린 소녀

감독 페데 알바레즈

출연 클레어 포이, 실비아 획스, 스베리르 구드나손

개봉 2018.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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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그로스의 오리지널 밀레니엄 삼부작
야곱 그로스(미국식 발음은 제이콥 그로스)

이 스웨덴 밀레니엄 삼부작의 음악을 담당한 건, 덴마크의 베테랑 영화음악가 야곱 그로스다. 국제적인 인지도를 누린 작곡가는 아니지만, 여러 밴드에서 활약했고 70년대 말부터 영화와 방송에 뛰어들어 음악을 담당해온 만큼 노련하고 영리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시리즈의 첫 편 연출을 맡은 닐스 아르덴 오플레브 감독과 파트너십을 다져온 인연으로 전체 음악을 총괄하게 됐다. 원작이 가진 다크하고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에 딱 맞게 재단된 사운드를 제공하고 있는데,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일렉 사운드와 묵중한 오케스트레이션의 적절한 조화가 인상적이다. 북유럽 특유의 우울하면서도 서늘한 공기가 담긴 스코어는 원작의 감성을 잘 표출했다.
 
신기술을 가진 해커 리스베트 고전적인 언론인 블롬크비스트’, 그리고 현재의 상황과 과거의 숨겨진 실체들을 각각 일렉트로닉과 심포닉 사운드로 대비시켜 조화를 이끌어낸 솜씨가 무엇보다 일품이다. 두 가지 전혀 다른 소리 결이 만나 차가운 스릴을 조율하고 얼룩진 오욕의 가족사를 조망하는데, 이를 치유하는 것 역시 그의 서정적이고 드라마틱한 선율이다. 할리우드 장르물과는 또 다른 감성과 스타일을 접할 수 있는 영화음악으로, 야곱 그로스는 이를 발판으로 할리우드 진출까지 이뤘다. 사운드트랙은 삼부작 중 1부와 TV 미니시리즈로 재편집된 합본 앨범만 나와 전체 삼부작의 음악을 듣고 싶은 팬들에겐 다소 아쉬울 듯하다. 

<밀레니엄 제1부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사운드트랙 표지
삼부작 합본 사운드트랙 표지
밀레니엄 제1부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감독 닐스 아르덴 오플레브

출연 누미 라파스, 미카엘 니크비스트

개봉 201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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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 제2부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

감독 다니엘 알프레드손

출연 누미 라파스, 미카엘 니크비스트

개봉 2012.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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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 제3부 벌집을 발로 찬 소녀

감독 다니엘 알프레드손

출연 미카엘 니크비스트, 누미 라파스

개봉 2012.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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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핀처와 트렌트 레즈너 & 애티커스 로스가 만든 밀레니엄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2년 뒤 할리우드에서도 이례적이라 할 만큼 발 빠르게 영화화가 이루어졌다. <쉰들러 리스트>로 오스카 각본상을 수상한 스티브 자일리언 각본에, 아찔한 영상미학을 펼쳐온 데이빗 핀처가 연출하고, 007 시리즈로 널리 알려진 다니엘 크레이그와 샛별 루니 마라가 주연을 맡아 삼부작 중 첫 편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 완성됐다. 스웨덴 버전과는 또 다른 핀처만의 스타일이 잘 묻어나는 세련되고 지적인 스릴러였다. 그러나 뛰어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자극적인 폭력과 강한 노출 수위에, 1억 불에 이르는 높은 제작비, 너무 짧았던 리메이크 간극으로 흥행에서 크게 재미 보지 못한 채 후속편 제작은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데이빗 핀처가 영화를 위해 선택한 음악가는 전작 <소셜 네트워크>를 함께 하며 오스카를 거머쥔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였다. 스웨덴 버전에서 들렸던 진중한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전히 배제한 채, 그들의 고유 색채인 인더스트리얼 사운드를 상영시간 내내 배치해 시리고 먹먹한 금속성 효과들로 이 북유럽 스릴러를 디자인했다. 시종일관 답답하게 웅얼거리며 상황과 감정들을 묘사해내는 이질적인 소리들은 음악과 음향 사이의 간극을 넘나들며 긴장과 불안, 과거와 현재, 사랑과 증오들을 훌륭하게 표현한다. 스코어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정도로 실험적인 접근법이지만, 핀처는 <나를 찾아줘>까지 그들에게 음악을 맡기며 이 색채를 고집했다.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

3장의 CD170분이라는 방대한 사운드트랙을 자랑하는데, 전위적인 엠비언트와 다이내믹한 리프, 다양한 패턴의 타악기들 속에서 온건히 서정성을 드러내는 건반만이 음악의 흔적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영화에서 벗어나 온건히 음악적으로 감상하기에는 다소 고역일지 모르겠지만, 원작이 지닌 광기와 공포, 고통과 상처를 드러내는 사운드로선 최적의 효과를 자아낸다. 다만 <소셜 네트워크>에서 들려줬던 혁신적이고 아름다운 매칭에 비한다면 다소 아쉬운 동어반복의 기시감도 생기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오프닝에서 레드 제플린의 노래 ‘Immigrant Song’을 카렌 오와 새롭게 재해석 낸 충격파는 꽤 오랜 잔향을 남긴다.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사운드트랙 표지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감독 데이빗 핀처

출연 다니엘 크레이그, 루니 마라

개봉 201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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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시리즈의 리부트, 거미줄에 걸린 소녀
<거미줄에 걸린 소녀> 리스베트 역의 클레어 포이
미하엘 블롬크비스트 역의 스베리르 구드나슨

기대 이하의 성적표를 받아든 소니는 난감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시리즈를 포기하기도 아쉬웠던 그들은 아예 방향을 틀어 오리지널 삼부작을 진행하는 것이 아닌 스티그 라르손 사후에 써진 새로운 삼부작(아직 완결되진 않았다)으로 눈을 돌렸다. 작가가 심장마비로 급사한 후 벌어진 상속 다툼에서 승기를 쥔 친족들의 욕심(!)에 힘입어 그들에게 고용된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새롭게 구상한 시리즈였다. 스티그 라르손의 10부작과는 전혀 다른 기획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그리고 그 구상은 연인이었던 에바 가브리엘손에게 남아 있다고 한다), 원작 캐릭터와 세계관을 이어받은 새 이야기가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독자들은 반겼다.
 
아쉽게도 7년의 세월이 흘렀고, 전작의 배우들과 스탭진은 모두 교체됐다. 새로운 리스베트 엔 영드 <더 크라운>으로 주목받은 클레어 포이가 캐스팅됐고, 스베리르 구드나슨이 새 블롬크비스트 되었다. 연출을 맡은 건 <이블데드> <맨 인 더 다크>로 할리우드 눈도장을 받은 우루과이 출신의 페데 알바레즈였다.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밀레니엄 시리즈 <거미줄에 걸린 소녀>는 더 젊어지고, 더 스펙터클에 방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관객들이 받아들이긴 쉽지 않은 듯하다. 전편 제작비의 절반 수준인 4300만 불을 들였지만 아직까지 이를 회수하지 못했고, 비평적 반응 또한 뜨뜻미지근한 편이다. 


스페인의 베테랑 영화음악가 로케 바뇨스
로케 바뇨스

그러나 아직 실망은 이르다. 음악을 담당한 로케 바뇨스의 존재감 때문이다. 버클리 음대에서 영화음악과 재즈 작곡을 전공한 그는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와 다니엘 몬존, 에밀리오 마르티네즈 라자로 등 당대 스페인 유명 감독들과 호흡을 맞추며 정상급 영화음악가로 성장했다. 드라마틱한 선율과 압도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을 구현하며 스페인의 오스카라 불리는 고야상에서 2년 연속으로 음악상을 수상한 그는 2013년 페데 알바레즈의 데뷔작이기도 했던 <이블데드> 할리우드에 진출했고, 영화 못지않게 무시무시한 귀곡성으로 강한 임팩트를 남겼다. 근 십 년간 가장 압도적인 호러 영화음악이었다. 이후 <올드보이>, <리그레션>, <하트 오브 더 씨>, <커뮤터> 등을 꾸준히 선보이며 할리우드와 스페인 양쪽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나가고 있다.
 
<거미줄에 걸린 소녀>는 그가 페데 알바레즈 감독과 세 번째로 호흡을 맞추는 작품으로, 기계음으로 가득했던 전작과 달리 파워풀하고 서정적인 스트링의 위용과 테마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우는 심포닉 스코어다. 그는 리스베트와 카밀라의 선율을 만들고 부딪치며 역동적이고 치밀한 서사와 감정의 굴곡을 대담하게 그려나가고 있다. 물론 일렉 사운드도 적절히 뒷받침되며 스릴과 서스펜스 조성에 한몫하는데, 전형적으로 공식화된 할리우드표 오스티나토 액션 스코어와는 사뭇 다른 접근법이다. 오랜 시간 스페인 장르물들(프래절, 코박 박스, 머시니스트, 인트루더스 등)에서 활용했던 그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며, 오페라틱하고 강렬하다. 뻔하고 고만고만한 할리우드 스코어에 지쳤다면 로케 바뇨스의 <거미줄에 걸린 소녀>는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거미줄에 걸린 소녀> 사운드트랙 표지

사운드트랙스 /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