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리>는 여성과 출산을 소재로 한 제임스 라이트먼의 세 번째 영화다. <주노>(2007)가 신체적인 변화, <영 어덜트>(2011)가 과거를 꿈꾸는 심리적인 변화에 집중했다면 <툴리>는 개인에게 지워지는 육아의 현실과 이를 유발하는 시스템의 문제를 좀더 거시적으로 짚어낸다. 마를로가 야간보모를 탐탁지 않아 하는 건 “인생을 하청에 맡길 수 없다”는 개인적인 이유다. 어린 시절 세명의 새어머니를 겪은 마를로는 자신과 같은 불안한 경험을 아이들에게 안기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마를로가 직접 고백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바로 경제적인 문제다. 마를로의 피로, 육아를 정신마저 갉아먹는 노동으로 만드는 모든 상황의 대전제는 마를로가 그다지 부유하지 않다는데 있다. 마를로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키우는 오빠의 집은 윤택하고 여유로워, 문자 그대로 행복이 가득한 것처럼 그려진다. 오빠와 부인이 더 나은 인격체라서 그런 걸까? 그럴 리 없다. 단지 오빠가 경제적으로 훨씬 나은 처지이기 때문이다. 마를로의 육아를 돕지 않는 남편은 악인이 아니다. 영화는 남편을 위해 애써 변명해주진 않지만 남편의 처지를 충분히 설명은 한다. 마를로의 남편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적어도 마를로 또한 그에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툴리>에는 악인이 없다. 상황이 있을 뿐이다. 마를로는 조나의 치료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겠지만 역시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유튜브의 무료 조언 정도다.
“가난에는 이자가 붙는다.” 미국 가수 테이 존데이가 트위터에 남긴 이 한마디는 자본주의 계급의 부조리를 예리하게 짚어낸다. 마를로는 피곤하다. 그래서 항상 예민하고 날 서 있다. 주변에서는 교양 있게 마를로를 돕고 조언을 하지만 아무리 선한 의도와 배려도 받아들일 사람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소용이 없다. 때로 교양과 인격은 상황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요컨대 마음만큼 중요한 건 물리적인 환경이다.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이 갖춰진 다음에야 배려든 심리든 그다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툴리>가 집요하게 드러내는 진짜 공포는 가난의 기회비용이 불러오는 상황들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보모를 들이는 것이 힘들고, 가난하기 때문에 남편이 일을 쉴 수도 없으며, 가난하기 때문에 출산 후 자기 관리나 다이어트는 꿈도 못 꾼다. 아이들에게 냉동피자를 돌릴 수밖에 없는 마를로에게 주어진 유일한 휴식이라곤 지친 몸으로 야밤에 감차칩을 먹는 일이다. 몸은 점점 살찌고 자존감은 갉아먹는 악순환. 그렇게 가난에는 비용이 든다. 독박 육아는 개인의 책임이나 도덕심에 미룰 사안이 아니다. 시스템과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툴리>가 화해와 회복 과정을 생략하고 마치 판타지 동화인 양 급하게 마무리한 건 드라마적인 봉합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봉합되어서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툴리>의 해피엔딩은 면죄부나 타협이 아니다. 차라리 그럼에도 행복했으면 하는 희망 혹은 의지다. 그래서, 더 무섭고 애처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