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그리드 버그만.

8월29일, 오늘은 할리우드의 위대한 여배우 가운데 한명인 잉그리드 버그만이 태어난 날이자 사망한 날입니다. 네, 맞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생일에 죽었습니다. 1915년 8월29일에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태어나 1982년 8월29일 67세의 나이에 유방암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생일과 기일이 같은 잉그리드 버그만은 그 운명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할리우드를 발칵 뒤집은 세기의 분륜의 주인공이기도 했습니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나는 성녀에서 창녀가 되었다가 다시 성녀로 돌아왔다. 단 한 번의 인생에서 말이다.”

<카사블랑카>

스웨덴 출신인 잉그리드 버그만이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가 된 데에는 전설적인 제작자 데이빗 셀즈닉의 힘이 컸습니다. 셀즈닉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자로 유명하죠. 네이버 영화에 데이빗 셀즈닉 검색 한번 해보세요. 주옥 같은 영화들이 그의 이름 아래서 제작됐습니다. 그렇게 잉그리드 버그만은 <카사블랑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녀에게 첫 오스카 트로피를 안겨준 <가스등>으로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가 됩니다. 지금도 잉그리드 버그만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작품이 험프리 보카트와 함께 연기한 <카사블랑카>입니다. <As Time Goes By>라는 유명한 주제가도 아실 겁니다. <카사블랑카>에서 피아노 연주자인 샘(돌리 윌슨)에게 일자(잉그리드 버그만)가 노래를 청하는 장면도 정말 인상적입니다. <카사블랑카> 영화를 본 분들이라면 이 장면이 왜 애절한지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아직 못 본 사람은 꼭 보시길 바랍니다. 꼭이요!

<카사블랑카>에서 샘에게 <As Time Goes By>를 청하는 일자.

할리우드에 입지를 굳힌 그녀는 그 유명한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펠바운드>, <오명>, <남회귀선> 등에 출연했습니다. 히치콕 감독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오명>에서 그녀는 캐리 그랜트와 함께 주연을 맡았습니다. 나치 첩자의 딸 앨리시아를 연기했습니다. 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해 앨리시아는 미국의 스파이 노릇을 하게 됩니다. 미국 정보부 요원 데블린(캐리 그랜트)와의 키스 신은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키스 신으로 기억됩니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명장면이기도 합니다. <카사블랑카>처럼 <오명>을 안 보신 분들도 꼭 보시길 권합니다.

<오명>의 키스 신.

잉그리드 버그만은 1940년대 중반 극장주들이 흥행성을 기준으로 투표로 뽑은 배우 순위 10위 안에 들 만큼 미국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배우가 됐습니다. 화려한 할리우드의 스타였던 잉그리드 버그만은 1947년 뉴욕의 작은 극장에서 본 영화로 인해 자신의 인생에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그녀는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편>를 봤습니다. 이 영화들에 깊이 감동받은 잉그리드 버그만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이탈리아의 거장 로셀리니에게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로셀리니씨, 당신의 영화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편>을 봤습니다.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만약 스웨덴 여배우가 필요하다면, 그녀는 영어는 아주 잘하고, 독어는 아직 잊지 않았고, 프랑스어는 썩 잘하지는 않고, 이탈리아어는 오직 ‘당신을 사랑해’만 알고 있는 배우인데요, 저는 당신과 함께 일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갈 준비가 돼 있습니다. 잉그리드 버그만.”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은 네오리얼리즘의 기수로 세계적인 작가 감독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카데미 시상식 대신 칸영화제에 초청되는 감독이죠.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상업영화와는 전혀 접점이 없는 사람입니다. 편지를 받은 로셀리니의 맨 처음 반응은 “버그만이 누구냐?”였습니다. 곧 버그만의 존재를 알게 된 그는 바로 답장을 썼습니다. ‘이탈리아 말은 오직 ‘당신을 사랑해’(Ti Amo)라는 문장이 포함된 편지의 뉘앙스를 그는 모를 리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는 ‘이탈리아 남자’니까요.

“당신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기쁘게도 나의 생일날. 당신의 편지는 가장 멋진 생일선물이었습니다. 난 당신과 함께 영화를 찍을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힘닿는 한 모든 걸 다 하겠습니다. 유럽으로 오겠습니까”

잉그리드 버그만은 당장 유럽으로 날아왔습니다. 두 사람은 로마에서, 히치콕의 영화 <염소좌 아래에서>가 촬영 중인 런던에서, 영화제가 열리던 세계의 여러 도시를 일을 핑계로 계속 만났다고 합니다. 로셀리니 감독이 각 영화제에 초청돼서 상을 주워담던 시기였습니다. 당연히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문제는 잉그리드 버그만은 스웨덴 치과의사와 22살에 결혼한 유부녀였던 겁니다. 딸도 있었죠. 로셀리니 감독도 유부남입니다. 물론 그는 유명한 바람둥이로 소문이 자자하긴 했습니다.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의 스캔들이 왜 떠오르죠?)
잉그리드 버그만은 사실 이전에 유명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와 연애를 하긴 했지만 이번엔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할리우드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자신들이 키운 스타를 이탈리아 그것도 예술영화 감독에게 뺏긴 꼴이니까요. 히치콕 감독도 큰 배신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어쩌면 로셀리니보다 자신이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버그만을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답니다. 일종의 삼각관계라고 볼 수도 있을까요?

잉그리드 버그만과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

이탈리아에서 버그만은 로셀리니 감독과 결국 결혼했습니다. 아들 1명과 쌍둥이 딸을 낳았습니다. 쌍둥이 가운데 이후 배우로 유명해진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이탈리아에서 <스트롬볼리>, <유로파>, <이탈리아 여행> 등 3편의 영화를 촬영했습니다. 물론 버그만이 주연이었죠. 미국에서는 두 사람의 간통을 좋게 보지 않아서 이 영화들이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평단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이 3편의 영화는 현대영화의 포문을 여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상찬받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이탈리아 여행>, <유로파>, <스트롬볼리>.
<스트롬볼리>

불륜의 끝은 해피엔딩이 아니었습니다. 버그만과 로셀리니는 결국 파경에 이르렀습니다. 로셀리니와 헤어진 버그만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할리우드로 돌아온 그를 반갑게 맞아준 사람은 <오명>에 함께 출연한 캐리 그랜트가 유일했다고 합니다. 복귀작은 <아나스타샤>입니다. 그녀의 두 번째 오스카 수상작입니다. 할리우드의 대중들은 그녀를 다시 받아주었습니다.

자녀들과 함께한 잉그리드 버그만.

잉그리드 버그만은 1958년 파리에서 활동하는 스웨덴인 연극 연출가와 세번째 결혼을 합니다. 로마에서 파리로 거쳐를 옮기고 프랑스에서 활동했습니다. 이때부터 연극 연출가와 결혼했으니 당연히 연극에 출연했습니다. 세번째 남편과는 1975년 이혼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런던으로 다시 거쳐를 옮겼습니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오리엔트 특급살인>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1972년 잉그리드 버그만은 유방암 선고를 받았지만 연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1974년 <오리엔트 특급살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고 1978년에는 잉마르 베리만의 <가을 소나타>에 출연해 아카데미 후보에 올라습니다. 그녀의 유작은 TV 영화인 <골다라는 이름의 여자>입니다. 이스라엘 여자 총리 골다 메이어의 일생을 다룬 작품입니다. 이 작품으로 잉그리드 버그만은 사후에 에미상을 수상했습니다.

2015년 칸영화제 포스터는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헌정됐습니다.

모두가 선망하는 할리우드 스타에서 불률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잉그리드 버그만의 일생은 복잡했습니다. 단 한 가지 그녀의 삶에서 달라지지 않은 것은 연기에 대한 열정이었습니다. 그녀는 고향 스웨덴의 스톡홀롬에 묻혔습니다.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졌습니다. “그녀는 생애 마지막까지 연기했다.”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

2015년에 잉그리드 버그만의 생을 닮은 다큐멘터리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이 개봉했습니다. 잉그리드 버그만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들은 이 영화를 챙겨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 바로보기

씨네플레이 에디터 두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