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과장하자면 예전엔 집집마다 크리스마스 캐럴 음반이 한 장씩은 다 있었던 것 같다. 계절이 되면 어김없이 당대 톱스타의 캐럴 음반이 하나씩 새롭게 모습을 보였다. 가수는 말할 것도 없고, 배우, 희극인 등 인기스타의 캐럴이 쏟아졌다. 저 멀리 ‘똑순이’ 김민희부터 “달릴까 말까” 하던 코미디언 영구 심형래나 ‘네로’ 최양락의 음반처럼 캐릭터와 유행어를 앞세운 캐럴이 있었고, 그보단 진지하게 겨울노래 녹음에 임한 당대 인기가수들의 캐럴이 있었다.
그만큼 수요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앞서 언급했듯, 집집마다 캐럴 음반 한 장씩은 있었으니까. 겨울마다 수많은 캐럴이 쏟아졌고, 당연히 그 수많은 캐럴의 질은 천차만별이었다. 대부분은 그저 한철 장사용으로 값싼 유행어를 얹은 가볍디가벼운 캐럴이었다. 그 많은 캐럴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남은 캐럴은 별로 없다. 제작을 한 이들조차 10년 뒤, 20년 뒤를 생각하며 만들지 않았고, 음반의 생명력은 대부분 그해 겨울로 끝났다.
수많은 캐럴과의 경쟁에서, 또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 살아남은 음악이 있다. 빙 크로스비가 부른 ‘화이트 크리스마스’(White Christmas)다. 집마다 쌓아둔 캐럴 더미 속에서 산타클로스 모자를 쓴 빙 크로스비의 음반도 적지 않았다. 그때 빙 크로스비 곁에 있던 다른 캐럴 음반을 찾는 이들은 거의 없다. 찾는다 해도 음악적 의미보다는 추억, 혹은 재미의 이유가 더 크다. 빙 크로스비는 여전히 음악의 기품을 유지한 채 시간이라는 단단한 벽을 넘어 살아남았다. 우리는 이런 음악을 고전 또는 클래식이라 부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캐럴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지만 유명한 영화 주제가이기도 하다. 빙 크로스비는 가수지만 수많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이기도 하다. 그 연결지점이 바로 ‘화이트 크리스마스’고,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뮤지컬 영화 <스윙 호텔>(원제 <홀리데이 인,holiday inn>)에 삽입돼 아카데미 주제가상까지 받았다. 미국의 위대한 작곡가 가운데 한 명인 어빙 벌린(Irving Berlin)이 1940년에 작곡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빙 크로스비의 입을 통해 <스윙 호텔>을 거쳐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스윙 호텔>의 이야기는 단조롭다. 뉴욕의 공연장에서 쇼를 하지만 마음만은 늘 낙향하고 싶은 짐(빙 크로스비)과 그를 따를 수 없는 연인 라일라(버지니아 데일), 친구 프레드(테드 하노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짐이 시골에서 휴일에서 운영하는 호텔 ‘홀리데이 인’을 배경으로 사랑과 우정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거의 80년 전의 작품인 만큼 지금 보면 이야기의 개연성도 떨어지고 정서적으로 몇몇 불편한 부분들이 있지만 ‘화이트 크리스마스’로 영화의 의미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유튜브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스윙 호텔>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낭만 그 자체다. 빙 크로스비가 직접 노래하는 장면이 나오고, 마리오리 레이놀즈(Marjorie Reynolds)가 이를 거든다(마이로리가 노래한 부분은 실제론 마사 메어스(Masa Mears)의 목소리라 한다). 존 스코트 트로터 오케스트라(John Scott Trotter Orchestra)의 반주 위에 얹은 빙 크로스비의 목소리는 그대로 전설이 됐다. 1942년의 마스터 원본은 너무 자주 사용돼 손상됐고,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버전은 1947년 같은 악단과 다시 녹음한 버전이라고 하니 당시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라는 기록만으로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위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중심 역시 <스윙 호텔>이 아니라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어느 순간부터 캐럴이 들리지 않고 있다. 젊은 가수들은 캐럴보다는 스스로 창작한 시즌 송을 더 선호한다. 하지만 이 계절에 빙 크로스비의 크루너 보컬을 듣는 기분은 새롭고 특별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뿐 아니라 빙 크로스비는 캐럴에 특화된 가수였다. 고풍스러운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그의 그윽한 저음으로 듣는 ‘사일런트 나잇’(Silent Night)와 ‘윈터 원더랜드’(Winter Wonderland)를 듣는 건 1년에 잠깐 경험할 수 있는 호사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따뜻함이나 포근함 같은 이미지가 자연스레 묻어난다. 현실은 팍팍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주는 낭만으로 팍팍함을 잠시나마 잊는다.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