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정리하고 되돌아보는 12월 말, 이 시기 할리우드에선 각종 시상식들이 개최된다. 각 도시별 비평가 협회들이 한 해 영화들을 복기하고, 연초의 빅 3 - 골든 글로브와 영국 아카데미, 오스카로 그 대미를 장식한다. 여기에 맞춰 완성도 높은 영화들이 개봉해 반응을 살피고, 여론을 조성하며 시상식에 대비한다. 따라 한 해 결산의 느낌보단 오히려 시상식에 더 초점이 맞춰진 면도 없지 않다. 그래서 아예 한 해를 정리하는 의미의 ‘베스트 목록’보단 연말과 연초 ‘시상식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그리고 오르내릴) 2018 할리우드 사운드트랙 리스트 5’를 골라보았다.

(왼쪽부터) <퍼스트맨>, <레디 플레이어 원> 사운드트랙 표지

먼저 안타깝게도 이 명단에선 제외했지만 올해 나온 인상적이고 주목할 만한 사운드트랙들을 간략하게나마 언급하고 본문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아무래도 다른 나라보다 사운드트랙이 활성화된 할리우드 위주로 언급하게 된 점을 조금 아쉽게 생각한다. 저스틴 허위치의 <퍼스트맨>나 알란 실베스 트리의 <레디 플레이어 원>은 이미 앞서 자세히 다룬 바 있기에 이번 리스트에선 제외함을 밝혀둔다. 여기에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시상식 후보로 오르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따로 다뤘던 만큼 시상식 후보에 오를 가능성이 더 높다는 말인지 모른다. 리스트는 한국 사운드트랙과 마찬가지로 무순이다.

(왼쪽부터) <그린 북>, <맨디> 사운드트랙 표지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 사운드트랙 표지

까다로운 오스카 규정 탓에 초반 탈락했지만 흑인 피아니스트와 백인 운전사의 묘한 우정을 다룬 <그린 북>의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크리스 바워스는 89년생의 젊은 작곡가지만 돈 셜리 트리오 연주 사이사이에 자신만의 가슴 따스한 인장을 새겨 넣었다. 지난 2월 갑자기 세상을 떠난 요한 요한손의 유작 <맨디>도 잊어선 안 된다. 80년대 유행하던 신시사이저 색채를 재현해낸 기묘한 다크 에너지의 광기를 담은 무시무시한 아방가르드 사운드였다. 디즈니가 쉽게 버린 카드가 되고 말았지만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는 사실 올해 최상의 결과물들 중 하나였다. 신구 조화를 이룬 두 명의 존이 만들어낸 스펙터클의 미학은 너무나 완벽했다.

(왼쪽부터)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서던 리치: 소멸의 땅> 사운드트랙 표지

(왼쪽부터) <콰이어트 플레이스>, <카우보이의 노래> 사운드트랙 표지

<인크레더블 2> 사운드트랙 표지

동양인들이 나온 영화로 최고 흥행을 기록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음악도 눈여겨볼만하다. 실력에 비해 저평가 받아온 브라이언 타일러가 작심하고 만든 스코어는 그에게서 보기 드문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빅밴드 재즈 사운드를 선사했다. 실험적인 사운드로 인상 깊은 분위기를 직조해낸 제프 배로우와 벤 살리스버리의 <서던 리치: 소멸의 땅>과 장르물의 묘미를 안겨준 마르코 벨트라미의 <콰이어트 플레이스>도 의미 있는 영화음악이었다. 코엔 형제의 든든한 음악적 조력자 카터 버웰의 존재감이 여전한 <카우보이의 노래>와 14년 만에 돌아온 마이클 지아키노의 레트로한 사운드 <인크레더블 2>도 인상적이고, 언제나 대작들에서 제 몫을 해낸 제임스 뉴턴 하워드의 일련의 결과물들도 꼭 언급하고 싶다.


블랙 팬서

By 러드윅 고랜슨

<블랙팬서> 사운드트랙 표지

러드윅 고랜슨

2018년 북미에서 가장 성공한 영화를 뽑으라 한다면 단연 <블랙 팬서>다. 이제껏 북미에서 이 영화보다 더 성공한 영화는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와 <아바타> 단 두 편뿐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9번째로 돈을 많이 번 작품이 됐다. 그뿐만 아니라 MCU 사상 최초로 골든 글로브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오스카 입성도 꿈이 아닐지 모른다. 물론 이건 음악을 맡은 러드윅 고랜슨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올해 차일디쉬 감비노와 협업으로 팝에서 히트한 그는 자신이 맡은 영화음악에서도 이 작품을 비롯해 <베놈>과 <크리드 2>를 모두 흥행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다. 탁월한 감각과 함께 천부적인 실력을 갖춘 그는 직접 아프리카에 가서 몇 달간 머물며 현지의 소리들에 귀 기울이며 아프리카 전통 악기와 연주자들을 공수해 <블랙 팬서> 음악을 완성했다. 힙합과 슈퍼히어로 그리고 아프리카라는 이질적인 세 가지 요소를 전혀 위화감 없이 한데 융합시킨 그의 역량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매번 새로운 영역과 소리에 도전하는 MCU 스코어들이지만, <블랙 팬서>는 그중 가장 어려운 걸 해냈다.


개들의 섬

By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개들의 섬> 사운드트랙 표지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웨스 앤더슨에게 두 번째 베를린 영화제 상을 안겨준 <개들의 섬>은 그의 두 번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일본 문화에 대한 애정과 세상에 대한 풍자를 잊지 않은 사랑스러운 작품으로 특유의 미장센과 독특한 캐릭터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는 게 바로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음악이다. 이번이 벌써 4번째 공동 작업인 그들은 앞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오스카 음악상을 거머쥔 바 있다. 동유럽 음악에 대한 유쾌한 해석이었던 전작처럼 이번 <개들의 섬>에서 데스플라가 시도하는 건 일본 민속 음악의 미니멀한 접근이다. 일본 전통의 타악기 타이고와 코키리코, 효시기, 샤쿠뵤시 등 다양한 퍼쿠션들을 활용해 리드미컬한 소리들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한편, 두터운 남성 보이스와 맥박처럼 규칙적으로 약동하는 단조로운 섹소폰 선율을 통해 신비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색채를 가미한다. 여기에 <7인의 사무라이>나 <주정뱅이 천사> 테마, 아카츠키 데루코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선율들을 뒤섞으며 색다른 조화의 미덕을 만들어낸다.


<블랙클랜스맨>

By 테렌스 블랜차드

<블랙클랙스맨> 사운드트랙 표지

테렌스 블랜차드

재즈 트럼펫터로 유명한 테렌스 블랜차드는 <모 배터 블루스> 연주를 통해 스파이크 리 감독과 인연을 맺었다. 그 후 1991년 <정글 피버>를 시작으로 영화음악에 뛰어든 그는 이번 <블랙클랜스맨>까지 27년간 15편째 스파이크 리와 호흡을 맞춰오고 있다. 재즈 아티스트로는 꽤 많은 상을 받은 그이지만 영화음악가로선 그다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이번 작품으로 계기로 뒤늦게 그 노고를 인정받는 분위기다. 한물갔다는 세간의 우려를 말끔히 불식시키며 이 작품으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스파이크 리는 1970년대 인종차별 단체인 KKK단에 위장 잠입한 흑인의 실화를 때론 유머스럽고도 때론 진지하게 그려낸다. 테렌스 블랜차드는 이번 작품을 위해 70년대 재즈와 펑크 그리고 고전적인 심포닉 사운드를 혼용해 묵직한 테마와 풍자를 감각적이며 감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지미 헨드릭스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일렉 기타 선율과 두터운 브라스섹션이 잘 어우러져 그 시절의 공기를 그럴듯하게 재현한다. 사실 그는 <말콤 엑스>나 <25시>를 통해 진즉에 인정받았어야 할 숨겨진 영화음악가다.


<이프 빌 스트리트 쿠드 토크>

By 니콜라스 브리텔

<이프 빌 스트리트 투드 토크> 사운드트랙 표지

니콜라스 브리텔

데뷔작 <문라이트>로 새로운 작가의 출현을 알렸던 배리 젠킨스 감독의 차기작 <이프 빌 스트리트 쿠드 토크>는 제임스 볼드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다. 전작만큼 뛰어난 영상미와 강렬한 주제의식, 시적인 정서를 지닌 작품으로 호평받고 있는데, 제임스 랙스톤의 촬영만큼 격찬을 받은 게 바로 니콜라스 브리텔의 영화음악이다. 그는 배리 젠킨스 감독처럼 갑툭튀한 영화음악가로 나탈리 포트만과 아담 맥케이와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짧은 기간 동안 자신의 진가를 만천하에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문라이트>의 연장선상에 놓인 스코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그 분위기와 스타일을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으며, 가슴을 짓누르는 스트링과 일렁이는 피아노, 산란하는 브라스 그리고 잘 계산된 엠비언트 등이 맞물리며 만들어내는 미니멀하고 서정적인 심상은 먹먹하고 아스라이 다가온다. 짧고 반복적인 테마가 주는 깊은 울림은 브리텔만의 인장으로 쉬 잊히지 않는 잔향을 깊게 관객들 가슴에 아로새긴다. 아담 멕케이와 함께 한 <바이스>에서는 또 다른 모습을 들려주며 그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키운다.


<메리 포핀스 리턴즈>

By 마크 샤이먼

(왼쪽부터) <메리 포핀스 리턴즈> 사운드트랙 표지, 마크 샤이먼

무려 54년 만의 속편이다. <메리 포핀스 리턴즈>는 디즈니 역사상 가장 긴 간격을 두고 나온 속편으로 기록을 세웠다. 원작자 P. 트래버스는 7편의 메리 포핀스를 더 썼지만 영화화된 작품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됐으면 <세이빙 미스터 뱅크스>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을 정도. 원작자 타계 후에야 간신히 진행된 속편의 연출은 뮤지컬에 일가견이 있는 롭 마샬 감독이 맡아 환상적인 비주얼을 완성해냈다. 셔먼 형제가 작곡한 뛰어난 원곡의 뒤를 이을 작곡가론 마크 샤이먼이 간택됐는데, 빌리 크리스털과 로브 라이너 감독의 음악적 파트너로도 잘 알려진 영화음악가다. 사실 그전엔 뛰어난 무대 음악가로도 눈부신 활약을 했던 터라, 그 쇼 체질에 최적화된 경력을 십분 발휘해 뮤지컬 황금기 시절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재현하는데 성공한다. 콜 포터나 리처드 로저스나 프레드릭 로우 등 명작곡가가 환생한 듯 고전을 완벽하게 되살린 샤이먼의 성취야말로 <메리 포핀스 리턴즈>의 가장 큰 축복이다. 그래미와 에미, 토니상을 받은 그가 여섯 번째 도전 끝에 오스카마저 거머쥘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사운드트랙스 / 영화음악 애호가